
영화를 봤습니다. "여자, 정혜" 제목도 재미있습니다.
정혜는 "여자"임을 아주 강조하는 제목말입니다. 웃습죠? 본 영화를 본 이후에 뭐라고 말로 표현할수 없는 "공감"과 참을수 없는 "인내심"의 한계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자를 강조하는 영화, 여자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회자거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평과 혹평과 호평이 "설왕설래"했던 것이 본 영화입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군요.
(이하 비평들)
'발견인가
착각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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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자, 정혜>가 개봉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반대의 시각
또한 만만치 않다. <여자, 정혜>를 뜨겁게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네 명이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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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참석자 | 곽영진(영화평론가),
문일평(영화평론가), 박은주(조선일보 영화담당 기자), 황진미(영화평론가)
FILM2.0 이 영화에 대한 국내외 영화제에서의 초기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국내 공식 기자 시사
이후 이에 반하는 비판적 시각 또한 불거져 나오고 있다. 논란의 씨앗을 품고 있는 셈이다.
박은주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미처 <여자, 정혜>를 보지 못했다. 입소문이 하도 좋게 나서 기자 시사 때 극장 안에 들어가서는 '그래, 얼마나
좋은가 보자'라는 심정으로 앉아있었다. 처음엔 핸드헬드 카메라가 거슬렸다. 작가주의 영화 문법책이 있다면 그걸 보고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보다 보니 이 영화가 저렇게 흘러가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싶은 궁금증이 생기는 거다. 사건이 일상에서 시작해 점점 크게 전개되는데 갑자기
증폭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작은 통로를 지나가는 듯 조용하게 전개됐다. 결국 영화가 끝나고 나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째려보는 심정으로 봤다가
극장을 나설 땐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됐다.
문일평 나는 <여자, 정혜>를 지나치게 형식적인 자의식이
두드러진 영화로 봤다. 이것이 유효한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감독이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고 영화를 찍기로 했다면 거기엔 분명 거부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왜 그렇게 찍었는지 이유가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대목부터 이 영화에 강한 의구심이 생긴다.
[[3]]황진미 난 지금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싶은 심정이다. <여자, 정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몇
달 전 김소영 교수가 한겨레 신문에 <여자, 정혜>를 소개한 글을 읽으면서다. 그 칼럼을 읽고 난 후 기대심리가 생겼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봤더니, 이럴 수가 있나. 영화가 시작한지 20분 동안 아무 얘기도 진행이 안 되는 거다. 솔직히 이건 폭력이다 싶었다. 더더욱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영화가 요즘 페미니즘이 참 이상한 방식으로 폭력 내지는 독재적인 논리를 생성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서다. 최근 남성
평론가들은 '내가 여성에 대해 얘기를 하면 정치적으로 부당한 얘기를 하는 게 될지도 몰라'라는 식의 강박을 갖는 것 같다. 그래서 굉장히 한심한
영화인데도 여성도 아닌 남성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순간, 바로 부도덕하고 올바르지 않은 자로 여겨질 지 모른다는 강박을 느끼는 것 같다. 그것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이상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끈 불끈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여성을 얘기하는 건 좋은데, 왜 여성이 꼭 저렇게 답답하고 갇혀있는 여성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불쾌함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혜가 지닌 자기 모순이라는 게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분열적인 상황만
단순히 표출해내는 방식으로 얘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수습되지 않는다. 이럴 순 없다.
곽영진 <여자,
정혜>는 잔잔하고 세밀한 묘사로 일상성을 차분하게 그려낸 영화라고 본다. 그런데 스토리 영화도 아니고 캐릭터 드라마도 아니기 때문에
할리우드와 충무로 영화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불편하고 지루한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느낌도 물론 받았다. 하지만 뚜렷하다 못해 진부한 이야기
구조, 강렬하기만 한 캐릭터로 관중들의 이목을 끌려고 기획되는 영화들이 대거 만들어지는 한국영화 풍토에서 <여자, 정혜>처럼 전혀
다른 영화가 나오는 건 의미가 있다. 좋은 대접을 받을 만하다.
FILM 2.0
벌써 의견이 팽팽히 갈린다. <여자, 정혜>를 바라보는 시각의 첫번째 분기점은 과연 이 영화를 섬세하고 절제된 작가주의적
형식미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울 것 없는 습작일 뿐더러 무의미한 자의식 과잉의 영화로 봐야 할
것이냐다.
[[0]]문일평 이 영화가 지닌 형식적인 자의식은 이런 거다. 러닝 타임 내내 거의 컷을 안
나누고 핸드헬드로 인물을 응시한다. 그래서 과도하게 리얼리티를 부각시킨다. 이건 홍상수 같은 감독들이 많이 했던 것처럼 현실이라는 질료가 갖는
구심력을 그대로 보전하겠다는 얘기다. 영화는 현실이라는 구심력, 연출이라는 원심력 그 둘 사이의 긴장에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은
구심력을 강조하는 감독이고, 홍상수 감독은 원심력의 힘을 믿는 감독이다. <여자, 정혜>의 경우 후자에 해당하겠지만 문제는 구심력과
원심력 모두 약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일상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조작된 일상이다. 정혜의, 감독의 자의식 안에 갇힌
일상이다. 현실의 욕망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뭔가 다른 것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지루한
일상'이라는 것의 전형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황진미 <질투는 나의 힘>을 보면 박해일이 문성근네 집에 가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소변을 본 후 오줌 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휴지를 꺼내서 슬쩍 닦는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굉장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 행동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줌을 흘리는 건 일상이지만 영화에선 하필 그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하는
모습은 수컷 대 수컷의 영역 표시를 상징한다. 수컷들이 어떻게 권력관계에서 경쟁하고 대립하고 용납하고 화해라는 이상한 끈으로 맺어지는가 라는
묘한 전체 상황을 한 장면에서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 정혜>에서는, 예를 들어 정혜가 참외를 씻는다 하자.
그러면 그 참외를 씻는 동작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편취급소에서 정혜는 보통 우편이 아닌 등기 업무를 맡고 있다. 여기서 낯선 사람이 정혜에게
'자, 등기요'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보통 우편이 아닌 등기를 맡은 이 여자 정혜에게 그렇게 아무런 상징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는 우편취급소 직원이다라는 사실, 3분이면 설명이 끝날 이 얘기를 20분을 끌고 있다. 미학적으로 볼 때 일상성을 완전히 오독한
영화다.
[[2]]박은주 <여자, 정혜>에서 중요한 건 카메라 시점이다. 전지적 시점이라기보다는 관찰자적
시점이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그래서 늘 정혜 옆을 따라가거나 서 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다 보니 깨달았다. 카메라의 위치 자체가 내가 저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의 궁금함, 저 여자가 과연 어떤 여자고 무엇을 하는 여자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라는 궁금증을 설정해 주고
있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카메라의 위치에 내가 위치하게 되는 순간들이 왔다. 굳이 이 영화에 비판을 가하자면 홈쇼핑 소리라든가, 차 소리
등등 소음을 다루는 방식은 차이 밍량의 영화와 대단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차이 밍량 초기작인 <애정만세>의 작법과 너무
유사하다. <여자, 정혜>의 가장 큰 단점이 아닌가 싶다. 끊임없는 대만의 소음 소리들, 이 소리들을 통해 자기를 발언하지 못하는
사람을 소리 속에 가두는 차이 밍량의 방식과 <여자, 정혜>에서 들려오는 알람 소리, 홈쇼핑 소리 등 소리 속에 여자를 가두는 이윤기
감독의 방식이 굉장히 유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성의 일상에 비교적 충실하다. 우편취급소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나는 이
우편취급소 신이 정혜와 그 주변 사람들을 캐릭터화 하는데 굉장히 성공적인 역할을 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점심 먹었어? 뭐 먹었어? 같은 아주 쓸 데 없는 일상의 질문들을 한다. 그런데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여자 동료들, 우체국 소장 같은
캐릭터들이 속한 세상이야말로 이 여자, 정혜가 이런 지루한 일상을 살 수 밖에 없겠다는 상황을 잘 설정해주고 있다고 본다.
황진미 여자 정혜나, 영화나 감독 모두 무지무지한 에고이스트다. 3인칭이 없다. 1인칭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혜는
직장의 친구하고도 별로 친하지 않고 그를 완전히 주변화시킨다. 주인공이 그 사람과 꼭 소통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 안에서
주변 캐릭터들을 놓아두는 방식이라는 게 캐릭터를 사물화시킨다. 옆에 앉아있는 동료나 아무 의미가 없고 그가 하는 얘기는 수많은 소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 그녀는 왜 그렇게까지 주관적인가. 감독의 의도는 그녀가 사회성이 없는 것은 오로지 아픔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아픔, 상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해석은 정말 위험한 것이고, 이야기 자체가 불합리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박은주 난 이 영화가 그 상처를 대단한 사건처럼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초반에 그 상처를 준 장본인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왜 이렇게 힘든가 하는 종류의 암시를 주고 나서 그 후 적당한 시점에서
정혜가 얼마나 그 상황에서 고통받았는가 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혹은 과장되게 혹은 여러 각도에서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는
어릴 때 엄청난 상처를 받은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가 성장해서 이렇게 폐쇄적인 여자가 됐다가 아니라, 폐쇄적인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는 다양한
삶을 살아왔고 그 인생에 있었던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로 과거의 상처를 처리하는 식인 거다. 즉, 감독은 원인이 던져준 대등한 결과물로서의
폐쇄성을 설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를 끌고 왔다.
[[1]]곽영진 나도 그 의견에 동감한다. 정혜는 어떻게 보면
비정상적이고, 일종의 자폐성도 있는 여자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해 예의 없는 것, 싸가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수용하거나 타협할 수 없어
한다. 이윤기 감독은 좌절 속에서의 희망이나 사랑과 화해, 이런 예상 가능한 것들을 차단하면서도 정혜가 지닌 이상함 속에서 우리들 누구나 느끼는
고독, 쓸쓸함, 버려진 듯한 느낌을 도출해내려 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으로, 특별한 여자를 통해 보편성에 접근해
가는 장점이 분명 있다. 정혜가 과거에 힘겨운 일을 당해서 이런 폐쇄적인 여자가 됐다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 단서가 되는 장면을
후반에 배치했다. 정혜가 맥주집에서 술 주정 부린 남자를 모텔로 데려오고 난 후 주절주절 우는 남자를 안아주는 장면이 있고 그 사이에 과거의
상처와 관련된 회상 신이 나온다. 왜 하필 여기에 회상신을 배치했을까. 버려진, 혹은 상처받은 존재에 대한 연민과 긍휼함이 거기에 있었다. 이
두 장면은 과거가 정혜의 폐쇄성, 결벽증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이지 정혜의 전체를 지배하는 사건은 아니라는 의미를 부여해준다.
황진미 과거의 상처가 삶의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의견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윤기 감독은 철저하게
모더니즘적인 사고에 입각해 있다. 외부에서부터 정혜에게 저인망을 치기 시작한다. 직장에서는 이렇게 살고, 집에서는 저렇게 산다는 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이 여자가 술주정 하는 어떤 외로운 남자를 단골 술집에서 주워 온다. 정혜가 이 남자를 위로해주는데, 남자는 정혜에게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바로 아까 헤어진 다른 여자에게 울면서 전화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혜가 외롭다는 거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곧바로
성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이건 근대 인간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그 사람의 내면을 알면 알수록 내면 중 가장 깊은 것은 성생활이다'라고 단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는 이 영화나 정혜가 무언가를 돌파하는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면승부를 전혀 안 한다. 영화
<바이브레이터>에도 주인공 여자에게 한마디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내면이 있다. 이 여자도 너무나 처연하고 상처받고 외롭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찌됐든 낯선 남자의 트럭에 올라탄다. 자기 내면에 대해서 적어도 자기 검열이 없이 솔직하다. <바이브레이터>는
나름대로 하나의 단락 속에서 구심점을 가지고 완결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여자 정혜>는 거의 백지 상태다. 이건 맹물을 떠다
놓고 동치미 국물이다, 육수다 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다. 네가 은근하고 담백한 국물 맛을 몰라서 그러니 자꾸 먹어보라는 거다.
박은주 물론 이 영화가 거의 <선데이 서울>에 한 줄로 나올 듯한 줄거리라는 건 동의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극한 형식성을 통해서 한 줄로 요약될 굉장히 초라한 이야기를 두 시간으로 만들면서 정혜라는 특별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 더불어서
지독하게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해 일종의 긍휼한 마음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문일평 이 영화는,
그리고 이윤기 감독은 계속 일상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정서, 이 여자의 내면의 무엇인가를 전달해 줄 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영화사를 훑어보면 이런 식의 관찰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이끌어내는 영화들이 많긴 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는 예술을 통해 현실을 포획하려는
욕망, 이전의 문법으로는 포획할 수 없는 것들을 포획하려는 욕망이 형식적인 자의식을 만들고 그 자의식이 관객과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다. 한마디로
영화가 주인공 정혜와 너무 닮았다.
FILM 2.0 <여자, 정혜>는
여성 자체를 다루는 시각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남성 감독의 시선으로 본 여성의 일상이나 여성성, 여성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비판과
지지가 공존한다.
[[4]]황진미 이 영화가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지, 혹은 정치적인 대의에
복무하느냐? 전혀 아니다. 정혜가 열다섯 살에 겪은 상처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가 될 만하다. 그러면 그 사건이 일상에서 어떻게
녹아들었는가를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를 봐서는 단 하루만 그랬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긴장이 이 여자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사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 이상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그
사건이 어떻게 그녀의 삶 속에 삼투가 되어서 정혜의 삶을, 영혼을 잠식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전혀 안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감독이 여성의 일상에
대해 대단히 오해를 한 상태에서 여성, 일상, 혹은 그 외의 어떤 것까지 마구잡이로 대상화시켜놓고 신비화하는 방식으로 얘기를 풀어갔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성 정치학적으로 <여자, 정혜>는 무지하게 낙후된 영화다.
박은주
김기덕의 영화가 늘 성 정치학적인 면에서 공격을 많이 받지 않았나. 김기덕 영화나 이 영화나 일종의 보편적 인간성, 모든 담론들을 다 답지한
인간이 아니라 특별하고 개별적인 인간을 다룬다. 그런데 그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성 정치학적인 시각들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신문에 사회면 기사를 쓰거나 건강면 기사를 쓴다고 해보자. 힘든 일을 당했을 때 가까운 가족에게 상의를 하고 거기서 깨쳐나오도록
노력을 하라는 얘기들이 오간다. 그건 바꿔 말해서 그만큼 고난을 헤쳐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지금 정혜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보수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하는 건 그만큼 확률적으로 보수적인 캐릭터가 더 많이 존재한다는 얘기도 된다. 그리고 정혜라는 캐릭터는 특정
사고를 경험했던 사람들을 대변하는 가장 일반적인 캐릭터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을 다루는 시각을 두고 보수적이라거나 왜곡됐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게 과연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문일평 이 영화에서 여성만 줄곧 등장하다가 어쩌다 남성이 등장할 때가 되면
영화가 갑자기 기존의 문법으로 찍힌다. 예를 들어 정혜와 결혼했던 남자가 등장할 때 롱 테이크로 일관하던 화면은 처음으로 컷을 나눈다. 나중에
보면 신혼여행 갔을 때 남편이 강제적으로 다가서자 정혜가 "왜 이런 식으로..."라며 싫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마치 에로 영화에서 많이
보는 앵글과 컷 나누기를 사용한다. 즉, 남성이 등장할 때는 영화가 굉장히 상투적으로 돌변한다. 여성만 등장할 때는 여성을 자세히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때문에 여성 비평가들한테는 호감을, 남성 비평가들에게는 정말 여성을 잘 그린 영화가 아닐까 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여성
심리의 디테일은 거의 백지다. 영화의 이런 면은, 나도 남성이지만 정말 왜 이렇게 찍은 건지 의구심이 간다.
박은주
이 영화의 장점은 여성성에 대한 발견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소통 안 되는 인간에 대한 발견을 했다는 점이다 .그 인간을 이해하는, 혹은 그 인간을
추적해가는 과정에 영화의 매력이 있다.
문일평 물론 영화의 핵심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은근히
더 크고 더 중요하게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가 존재한다. '여자, 정혜'라는 영화 제목부터 계속 이 영화를 모던한 여성 영화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점은 또 다른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에 호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여성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감독의 의도는 더 이상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이 영화가 어떤 식의 얘기를 하고 어떤 식으로 우리를 유도하고 있는가를 간과해선
안된다.
곽영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에 대해 유감을 가질 순 있겠지만 정혜에게 집중하기 위해 주위의 캐릭터들이
대상화되거나 주변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그려진 여성이 반여성적이거나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 그려졌거나 보수반동성이 녹아있다고 보긴
어렵다. 정혜가 작가에게 우연스럽게 바람을 맞았고, 모텔로 데려간 남자에게서 소원함을 당하긴 했지만 그녀는 남자에게 규정당하기 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황진미 하지만 그 근저에는 감독이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어떤 정박된 여성성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제목을 굳이 붙이자면 '자폐녀, 정혜'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 <말아톤>에서 우린 어차피
주인공 초원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지만 초원이와 어머니와의 소통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나. 어쩌면 초원이 혹은 어머니의 생각이 순전히 우리의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성찰적인 계기를 끊임없이 가져가면서도 그 안에 조연 캐릭터도 있고, 조승우도 내버려 두지 않고, 그 엄마도 대책없이
성스러운 어머니로 표상화시키지 않는다. 근데 <여자, 정혜>는 그중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박은주 나
같은 사람은 성격이 굉장히 과격하고 괴팍하기 때문에 뭐 하나 상처받았다고 소심해하는 애들을 보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근데 <여자,
정혜>는 내게 정혜처럼 답답하게 사는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심리적 통로를 뚫어줬다. 어떤 사람들에겐 상처가 있는데 그 사람들의
상처는 상처로 보이지 않는다. 상처를 다른 것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상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점을 그려낸다.
황진미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정혜는 나름대로 굉장히 오만하다. 정혜의 그 오만함이 관객을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든다. 관객, 조연, 기타 등등을 정혜 선에서 차단해버리는 느낌이 너무 많이 든다. 정혜가 구두를 사러 갔는데 그 상점에서 남자 직원이 정혜
팔을 붙잡는 장면이 있다. 남자 직원이 "언니, 언니"하면서 팔을 잡아끌자 정혜는 기분이 나빠진다. 그런데도 계속 끌려 다니다가 카운터에 가서는
"손님을 좀 인간답게 대해주세요"라고 화를 낸다. 정작 자신을 불쾌하게 했던 점원과는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불쾌하게 여겼는지 제대로 소통하지도
못하고 휘리릭 나가버린다. 정혜가 지닌 이 일종의 자폐성이 연민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정혜 안에는 어떤 오만의 철벽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거다.
이 이상한 여자에게 애정을 주고 있는 감독 자신도 굉장히 오만해 보인다는 거다. 그래서 이 영화 안에는 소통의 계기가 없다. 작가주의를 얘기할
때 미학적으로, 혹은 정치, 윤리적인 측면에서 뭔가 새로운 얘기가 있다는 것이 기본 전제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건 없다. 이 영화가 여자를
그렸다는 단순한 소재주의에 입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과 모더니즘까지 얹혀져 더욱 호평받는 식으로 얘기되서는 안 된다.
FILM 2.0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비주류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라 할 만한 <여자, 정혜>가 해외에서 현대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건
합당한가 위험한 일인가?
[[5]]박은주 현재 한국영화의 상황 속에서 <여자, 정혜>는 저예산
영화고, 신인 감독이고, 주인공은 스크린 배우가 아니라 TV 스타였던 김지수다. 몇 개의 표식만으로도 이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페미하고
모던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틀이 형성돼 있다. 어떻게 보면 감독은 의도하진 않았으나 결국은 대국민 사기극을 연출하게 되는 셈이다.
정황은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이것이 감독이 비난받을 소지는 아니다. 이건 한국영화계의 시스템 상 이런 구조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독될 수 있는 소지가 너무 많은 데다가 몇몇 영화제에서 상을 탔고 해외로 불려다니니 평론가가 아닌 일반 기자들 입장에선 이런 몇 개의 표상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짓눌리는 부분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 정혜>가 관객들에게 다소 배신감을 안겨줄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곽영진 해외에서 호평 받았다는 것 때문에 이후에도 호의적인 평이 따를 거라는 여지는 정말
일부라고 본다. 호의적인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이 영화에 배치돼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오버하는 구석이 있고, 리얼리티가 손상됐고,
연결에 있어서 논리적인 관계가 잘 성립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감독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도된 작가적 욕망을 실현한 것이고 그
욕망을 지금 <여자, 정혜>라는 형태로 전달했다고 하는 건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 본다.
황진미 김기덕
영화가 상을 받는 방식하고 이 영화가 상을 받는 방식은 또 다른 것 같다. 주변에 물어봤었다. 대체 <여자, 정혜>는 왜 상을
받았을까. 그 중 영화제의 유럽 심사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일상성의 코드를 가진 영화라서일 거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이건
예술적인 건데 우리가 무식한 나머지 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식의 이상한 오독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닌가. 그런 혐의가 너무 많이 든다.
박은주 난 역으로 이 영화가 몇 군데서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상한 문화 식민주의적인 시선을 갖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니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건 오히려 역차별 아닌가. 나도 사실은 그런 역차별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봤었지만 달라졌다. 이건 위험한
논리다. 마치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유럽 영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상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문일평 현대
미술이 20세기에 극단적인 소통 불능의 상태에 빠진 이유는 자족적인 언어가 계속 세련된 언어처럼 포장돼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 미술은
20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자폐적인 예술이 돼 버렸다. 이브 미쇼가 한 말이 있다. 예술을 죽여버려야 된다, 그래야 전혀 새로운
개념의,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는 뭔가가 태어난다고. 그러니 <여자, 정혜> 같은 시도 자체가 일단 의미가 있다고 얘기하다
보면 언어 자체가 무정부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 이 영화의 언어 자체가 유효하지 않으니 새로운 시도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의미 없다.
곽영진 <여자, 정혜>가 내러티브의 시선도 좋고 캐릭터의 연약함도 좋고 비행동과 무위가 특징인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모더니즘을 디디면서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래서 선댄스에서 반응은 좋았지만 수상에 실패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자, 정혜>는 한국영화에서 이례적으로 개인에 대한 성실한 천착과 탐구를 통해 사적 공간과 주변, 사물을 그려나가지만 감독이 영화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영화는 스펙터클과 인물의 다채로운 구도 속에 개인을 위치시키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갔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 특이함에 대해 열광할 필요는 없지만 인정할 필요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성과와
함께 반성도 불러일으키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황진미 지금까지의 모든 문학작품이나 극은 개인을 다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개인이 어떤 개인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거다. <피와 뼈>의 김준평 같은 개인은 그 개인의 삶에 역사성 사회성이
확 내리꽂히는 경우다. 그런데 모든 것이 탈각된 상태의 진공 속에서의 개인은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 진공 속의 특이한 개인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여성주의적인 글쓰기 등등의 논의와 맞닥뜨려지면 부풀려지는 경향이 있다. 여성으로서의 개인에게 탈역사, 탈사회 같은 의미가 부여되는
역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건 정말 생각해볼 문제다. 허구헌날 TV 보고 스타크래프트 하고 안 감은 머리나 득득 긁는 백수 남자를 영화로
그린다면 코미디로는 그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단편영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이런 진공 상태에 빠진 개인이 여성이 되면 여성적 글쓰기, 페미니즘과 묘한 결합을 이루면서 이상한 정치성을 발휘한다는 거다. 난 그게 문제라고
본다. 남자 김준평은 원래 나쁜 놈이지만 그 안에 어떤 식민지적 역사가 있고, 굳이 그걸 거론하지 않더라고 원래 지독한 인간형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풀어나간다. 근데 <여자, 정혜>에서는 개인을 둘러싼 얘기는 모두 날아가고 매일 혼자 꿍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상한 여자
정혜를 잡아다 놓고, 거기에 여성성을 역투사하고 있는 거다. 대체 이게 뭔가. 칸딘스키가 추상 표현주의를 이루어 냈으면 그 뒤에 폴록은 전혀
다른 얘기를 내놓는 것, 그게 발전하는 거다. 근데 <여자, 정혜>의 얘기는 이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10년 전에
다 한 얘기들이다. 지루함을 사용하는 긴장미도 잘못 됐다. 모든 것이 나열일 뿐이다. 난 관객들이 이건 뭔가가 있는데 내가 몰라서 지겨운 거
아니가 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내 말이 일조가 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 뿐이다.
박은주 이 영화가 오만한
영화라는 데 동의한다. 말 걸지 않고 소통시키려 하지 않고 이해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점과 위치를 통해서, 혹은 정혜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을 통해서, 혹은 정혜의 인생에서 원인과 결과를 도출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 여자 정혜라는 사람과 이 영화를 관객이 온전하게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시도가 의미 있다고 믿는다. 영화 자체가 도도한 자세로 있으면서 속삭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은 굉장한 장점이라고 본다.
곽영진 여자, 정혜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서 마음의 조각, 심상을 울림으로
전달하려 한 이 영화의 방식은 사뭇 양극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 같다. 관객이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든 분명 근거는 있다. 이제는 젊은 감독들이 좀
더 치열함을 발휘해 기존의 화법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자기 세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다.
박은주 논쟁을
하다 보니 어떤 면에선 한국영화계가 풍성해진 것을 느낀다. 10년 전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면 무조건 좋다고 했을 것이다. 상업 영화 틀 안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도 없고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대단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식적인 영화를 만들게 놔두는 제작자도
없을뿐더러. 그런데 이런 영화에 대해서 지지 혹은 비난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은 한국영화의 양과 질이 어느 정도 확보됐기 때문인 거 같다.
(인용처: 필름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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