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신부님, 나의 신부님!”
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통틀어 나는 세 분의 신부님을 만났다. 물론 딱 세 분만 만났다는 것은 아니고 더 많은 신부님을 만났으나 내 인생에 커다란 획을 긋게 하신 세 분의 신부님이 계시다는 뜻이다. 나는 시골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 마을은 옥구라는 넓은 평야지대의 일부분이고, 해 질 녘 노을이 무척이나 아름다우며 마을에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정도는 다니는 마을이다. 그러나 내가 수산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교통이 전혀 발달되지 않은 동네였다. 우리 동네에 텔레비전이 처음 들어온 것이 내가 6학년쯤 되었을 때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아주 깡촌이었다. 나는 깡촌의 여자 아이답게 나이 먹기, 구슬치기, 자치기,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공기놀이, 비석 치기, 발야구, 삔 따먹기 등을 하며 자랐다. 자치기를 할 때 바닥에 있는 나무를 딱! 하고 치면 그 막대기가 대굴대굴 구르며 내 배꼽 높이 까지 올라오는 데 그 막대기를 정확하게 가운데를 딱! 쳐서 날릴 때마다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신나게 놀며 지내던 내게 처음으로 신부님이란 분이 나타나셨다. 가난하고 먹을 것 없는 동네, 그 동네에는 우리 집 담을 경계로 수산 공소가 있었다. 우리는 공소 예절을 지냈고, 신부님 없이 주일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3학년이 되었을 즈음, 어떤 신부님께서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우리 마을에 오셨다. 버스도 다니지 않고, 당연히 차도 없던 시절이라 그 젊고 잘 생기신 신부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을 때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신부님은 우리 공소 사람들에게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서 군산 팔마 성당에서 우리 마을까지 약 10킬로 정도 되는 길을 걸어서 오신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 나는 군산시내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검은 수단을 입고, 나타나신 신부님께서는 우리 공소에 있는 3학년 아이에게 첫 영성체와 첫 고백을 시켜 준다며 기도문을 외우라고 하셨다. 우리 공소에는 3학년이 나랑 내 친구 딱 두 명이었는데 그 친구는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 나 혼자 떨리는 마음으로 첫 고백을 하고, 첫 영성체를 영하였다. 나는 그날 불렀던 성가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주의 말씀받은 그날 기쁘고도 복되어라. 기쁜 이맘 못 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그 기쁨을 잊지 못해 나는 그 순간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신부님은 일년에 두 번 오셨는데 신부님 오시는 날은 동네 잔치날이었고 밥상에서 남은 반찬들로 우리는 정말 풍요로웠다.
이 신부님은 바로 M 신부님이다. 우리 신랑은 원래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세례를 받기 원했다. 우리 아이들과 이루는 가정은 꼭 성가정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그가 나와 결혼을 결심하고 직장 근처의 성당을 찾아서 교리를 받기로 하였는데 그때 그 본당 신부님이 M 신부님이셨다. 우리는 결국 M 신부님께 혼배성사를 받으며 성가정으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나의 두 번째 신부님은 L 신부님이다. 이 무렵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때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우리는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꼭 타야 했으나 눈이 오는 날에는 버스가 고개를 넘지 못해 빼먹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동네 어른들이 경운기를 끌고 오셔서 우리는 경운기를 타고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공소는 팔마 성당에서 옥봉 성당 소속으로 바뀌었다. 옥봉 성당은 우리 집에서 시내를 가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옥봉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이 버스도 또 한 시간에 한 대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그 멀고 먼 곳에 우리의 본당이 우리들의 힘으로 세워졌다. 시골 사람들이 돈도 없고, 성당을 지을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모내기를 하러 다니며 돈을 모았다. 신자들과 함께 신부님께서도 모내기를 하러 다니셨다. 나는 모내기를 해서 지어진 우리 성당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옥봉 이란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준공식이 모두 끝나고 다들 돌아간 뒤였다. 성당에 가서 짧은 기도를 올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 버스 편이 없어서 결국 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9시가 지나 있었다. 그 거리가 어찌나 멀고 낯설던지 나는 그때의 길고 긴 시간, 그때 스쳐 지나갔던 산딸기며, 뱀딸기며, 이름 모를 풀들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L 신부님께서는 나의 성소를 소중히 여겨 주셔서 수녀원에 입회하고자 하는 자매들과 성소 모임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는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약 4년쯤 근무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수녀원에 입회할 생각이었다. 가족들도 그리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수녀원에 진짜로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학교에서 가입한 공무원 연금도 정리하고, 교직원 공제도 정리하고, 수녀원에 입회할 준비를 모두 마칠 때까지 나의 입회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특히 아빠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런데 일이 착착 진행이 되어 가자 아빠와 엄마는 나와 함께 이별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엄마를 모시고,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겨울의 제주도는 눈이 많이 내렸고, 우리는 왠지 모르게 행복하기보다는 춥다고 느끼며 여행을 마쳤다. 겨울 방학 동안 모든 입회 준비를 마친 나는 한 달 정도 미리 수녀원에 들어가서 살아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수녀원에서 기도를 하는 데 나는 기도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기도 힘이 들었고,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적응을 잘 못하고 있었다!
한 달 정도의 생활을 마치고 나는 학교에 사직서도 낼 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를 잘 아는 수녀님께서 내가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몸을 좀 보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한의원엘 갔고 한의사는 체력이 약하고 맥도 약하니 보약을 좀 먹으라 하였는데 이상하게 그 보약을 먹고 나서 나는 갑상선 항진증에 걸리고 말았다. 보약을 먹고 걸린 건 지 발견한 건 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국, 나의 수녀원 행은 갑상선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 한 번 주저앉으니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다. 성당에서도 나는 죄를 지은 것 같아 의지할 데가 없었고, 어렸을 때부터 수녀가 되기로 한 내 마음과의 약속, 혹은 하느님께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괴로웠다. 그즈음에 내가 만난 신부님이 바로 나의 세 번째 신부님이다. 그 신부님은 이제 막 신부님이 되신 처음으로 본당 주임 신부님이 되신 분이셨다. 나는 흔들리는 내 마음을 신부님께 의지했다. 신부님은 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뻔히 알고 계셨다. 멀리 내치지도 가까이 손 내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냥 그렿게 계셔 주셨다. 나는 부름을 받은 사제의 참모습을 그 신부님을 통해 보았고, 신부님의 마음에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신부님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사제였다. 사제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흔든다고 흔들릴 사람도 아니었지만 나는 사제를 흔들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행스럽게 흔들림 없이 신부님은 다른 성당으로 옮기셨다. 신부님은 떠나시면서 내가 가졌던 수녀가 되지 않은 또는 못한 거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가지고 가셨다. 나의 세 번째 신부님은 K 신부님이다. 나는 신부님을 마음에서 훌훌 떠나보냈다. 훌륭한 사제, 영원한 사제, 아름다운 사제가 되셔요. 나의 신부님.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그 뒤로 나는 신부님보다 멋진 사람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by빨간 너구리 Apr 13. 2021
첫댓글 순수와 순정을 깨우는 글이어서 공유합니다. 프러포즈한 네번째 신부님은 바로 신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