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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카자흐스탄을 가다
카자흐스탄 지도 출처: Britannica 재편집
어언 20여 년 전 일이다. 필자는 실크로드의 대상(caravan)들이 동서양의 문물을 갖고 사막과 초원과 험난한 계곡을 넘나든 그 길을 자동차 여행을 꿈꿨던 일이 있다. 중국의 서안에서 로마까지 여정이다. D-day는 새천년(New Millennium)으로 잡았다.
이 꿈은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수교계획' 발표에 따라 1990년 9월 30일 '한ᐧ소 수교'와 1992년 8월 24일 '한ᐧ중 수교'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여행 일정은 5개월로 하고 강건한 체력과 모험심이 강하고, 운전경력 20년 이상의 네 사람(PᐧJᐧKᐧ필자)으로 결정하였다. 그때부터 정보 수집과 여행비용 등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4명이 차내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4륜구동차로 한다는데 뜻이 모아졌다. 이로부터 3년여 동안 수시로 만나 도상연습(圖上練習)을 하면서 실크로드 탐험에 꿈을 부풀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97년, 일행 중 P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J도 가족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동행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실크로드 여행의 꿈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적막에 감싸인 알마티 국제공항과 일행을 태울 승합차(오른쪽 승용차 앞 큰 차)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실크로드 여행의 꿈은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 봄, 가족들이 모여 3년간 미뤄왔던 가족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서 아들이 "금년 하계 휴가는 ‘카자흐스탄 여행’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였다. "그곳에는 저의 절친이 오래전부터 초청이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먼 곳”을 하고 망설였으나, 나로서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불현 듯 2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필자는 불문곡직하고 적극 찬성하였다. 비록 실크로드의 전 구간이 아니라고 해도 실크로드의 흔적이라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 알마티(Almaty)에서 처음으로 만난 고려인
8월 10일 우리 가족 9명은 부산을 출발, 인천공항에서 예정보다 2시간 늦은 20시30분(KST) 카자흐스탄(Kazakhstan) 알마티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사위가 암흑인지라 오로지 항로모니터만 바라보며 대충 어느 상공을 날고 있는가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인천에서 알마티공항까지 항공거리는 편도 4,300km였다. 그로부터 6시간 후 23시30분(LST) 알마티공항에 도착하였다. 시차가 한국보다 3시간 늦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출구에는 김상욱 사장(이하 김 사장) 부부가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둠 속에서 본 알마티공항의 면적이나 규모는 꽤 컸으나 늦은 시간 탓인지 인천에서 온 여객이 대부분으로 비교적 한산하였다.
붐비지 않고 여유로운 알마티 국제공항 입국장
바깥에는 우리가 사용할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사는 러시아인 세르게이라고 했다. 밤늦은 도시를 한마디 말도 없이 40여분 후 숙소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숙소는 호텔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본 건물은 별장 같이 커다란 2층짜리 건물 2동이었다. 그중 뒤쪽 건물로 안내하였다. 도로변에 있는 건물은 높다란 블록담장에 둘러싸여 있고, 마당에는 4,5그루의 아름드리나무가 있었으며, 앞동과 뒷동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1층은 널따란 거실에 주방, 욕실이 있고, 2개의 방에 트윈 1실, 트리플 1실이었다. 2층에는 방 3개에 트리플 3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당초 김 사장은 아들에게 숙소는 자신의 별장을 사용하기로 하고, 아침 식사는 부산에서 준비해 간 간식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차량만 준비하고 가이드는 김 사장 내외가 맡는다고 약속된 것이다.
일행은 김 사장과 간단한 여행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 내외를 보낸 후 방을 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여정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가장 무더운 여름인데도 에어컨이 없었다. 그러나 더위를 느낄 수 없었고, 숲속인데도 모기마저 없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이웃에서 개 짖는 소리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알마티는 워낙 습도가 낮고 공기가 건조하여 모기의 유충이 서식할 수 없으며, 밤에는 시원하다고 했다. 그래서 낮에도 그늘만 있으면 시원했다.
필자는 아침 5시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어제 밤에 본 건물은 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 2동이 20m정도 간격을 두고, 그 사이에는 남새밭이 있었다. 거기에는 낯익은 오이, 토마토, 고추, 상추, 배추 등 각종 채소가 심어져 있었다.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더니 널따란 도로를 따라 깔끔한 주택들이 아름드리 수목에 덮여 마치 커다란 공원 안에 있는 시가지 같았다.
숲속의 공원과 같은 시가지와 도로
20여분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본 다음 아침식사를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금 전에 보았던 남새밭에 동년배로 보이는 한 남자가 채소에 물을 주고 있었다. 카자흐어나 러시아어를 모르는 필자는 목례를 했다. 그러자 그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는데, 아무래도 한국인 같아보였다.
나는 체면불구하고, 당신은 '한국인'입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미소만 짓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어로 물어보았으나 역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망설인 후 어설픈 한국어로 “고려인[까레이스키]입니다.”라고 했다.
고려인 박 게르만 씨(右)
그곳에 사는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인’ 또는 ‘북한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고려인’으로서 '박 게르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나는 그를 잠깐 기다리게 한 후 숙소에 들어가서 준비해간 김과 마른멸치, 컵라면, 김치 등을 약간씩 갖고 나가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그도 서둘러 자기 집(2동의 건물 중 앞쪽)으로 가더니 여성 한 분을 데리고 왔다. 그 여성은 유창한 한국어로 “김옥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게르만 씨는 남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상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남편 박 게르만 씨는 “북한 출신으로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하기 이전에는 공산당 고위간부로 활동한 사람”이며, 자신은 조상의 고향이 강원도 정선이며, 현재는 “고려인연합회 고문”으로 활동한다고 하였다.
또한 건물 2동 중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건물 2층이 ‘고려문화원’ 사무실이라고 했다. 따라서 건물 2동 모두는 ‘고려문화원’ 원장인 김 사장 소유이며, 건물 관리 겸 한국과의 공식 행사 때, 통역을 맡는 등의 일로 이 집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아침마다 눈만 뜨면 남새밭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애써 가꾼 오이ᐧ상추ᐧ토마토 등을 따서 우리에게 먹도록 권하였다. 그때부터 게르만 씨는 경계를 풀고 잊어버렸던 한국말로 대화를 했는데, 우리가 귀국할 무렵에는 한국말을 꽤 능숙하게 하였다.
□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제원
중앙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은 국토가 남북보다 동서가 훨씬 긴 형태로 국토면적은 남한의 27배(세계 9위)나 된다. 이처럼 광대한 국토에 인구는 1,800만에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9,977달러로 대한민국의 1/3 수준이다. 여기에 고려인 동포가 10만8천여 명이고, 한국인 교민이 2천여 명 살고 있다.
대외관계는 1992년 남북한이 동시에 수교하였으나, 북한은 1998년 2월 대사관을 철수하였다. 이 나라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73%, 러시아정교가 20%이며, 민족 구성은 카자흐인 67.5%에 러시아인 19.8%다. 언어는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를 공용하며, 수도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분리될 당시에는 알마티였다. 하지만 알마티는 전체 국토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1997년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국토 중부 지역에 있는 아스타나(Astana)로 수도를 옮겼다.
그런데 건국 이후 초대 대통령으로 연임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가 2019년 퇴임하자, 그를 기념해 수도 아스타나의 지명을 누르술탄으로 바꿨다. 하지만 알마티는 지금도 정치ᐧ행정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카자흐스탄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스텝(steppe) 지역인 탓에 호주, 캐나다와 함께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반면 중앙아시아 최대의 자원대국으로 원유 매장량 세계 12위와 우라늄이 세계 2위이다.
북쪽은 러시아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중국과 몽골에 남쪽으로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 접하며,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 닿아있다. 카자흐란 이름은 '유랑자' 또는 '독립인'이라는 말로 이들 민족은 13세기 징키스칸의 후예로 전통적인 유목민족이다.
□ 항공편과 언어
인천공항에서 알마티로 왕복하는 항공편은 아시아나에서 운항한다. 운항 편수는 계절에 따라 다르므로 참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19년 10월 경우에는 매일 한 편이 왕복한다. 카자흐스탄은 2014년 11월부터 무비자 입국이 허용되어 30일까지 체류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은 공문서는 카자흐어로 작성하고, 정부에서도 카자흐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반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또한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으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마티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출입국신고서와 여권을 제시하여 도장을 찍어주는데, 출입국신고서는 출국 때 다시 제출해야 하므로 반드시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
□ 사람 우선의 교통 문화
알마티에서는 철저하게 ‘사람 우선’ 교통질서가 지켜지고 있다.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도 사람이 도로를 건너면 자동차는 무조건 정차한다. 그리고 속도ᐧ신호 위반, 추월, 끼어들기 등은 하지 않고 여유롭게 하는 운전 문화는 우리가 배워야 할만 했다.
'사람 우선' 교통 문화(전면 대형 차는 무궤도 노면 전차)
알마티공항에서 교통수단은 버스, 무궤도 노면전차, 지하철 등이 운행된다. 그러나 밤 10시 이후에는 운행이 끝나므로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택시 역시 많지 않다. 이때에는 자가용으로 영업하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택시와 자가용을 구분하는 표시가 없으므로 지나가는 차만 보이면 무조건 손을 들어 행선지를 알려주고 같은 방향이면, 요금을 흥정하고 합승할 수 있다.
또한 시내에서 불편한 것은 안내판이나 간판 등이 카작어나 러시아어로 되어 있는 만큼 개인적으로 야간에 시내를 관광하려면 카작어나 러시아어의 기본 정도는 익혀서 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렌트카를 이용할 경우 스마트폰에서 구글지도를 다운 받아 사용해야 하며, 운행 중에는 밤낮 구분 없이 전조등을 켜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알마티에서 쇼핑
재래시장에는 페르시아 카펫보다 화려하고 깔끔한 디자인에 저렴한 가격의 양모 머플러를 150달러 정도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먹거리는 중앙시장인 그린마켓에 가면 야채, 어류, 육류 등 다양한 식료품과 의류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이 시장의 반찬가게에는 고려여인들이 주를 이루며.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도 입구 쪽에 있다.
깨끗한 시장과 잘 정리된 알마티 재래시장
최근 개장한 메가파크(MegaPark) 쇼핑몰은 유럽의 초현대식 쇼핑몰에 버금갈 정도로 잘 갖춰져 있으며, 알마티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그라프로 백화점도 쇼핑장소로 둘러볼 만하다.
공산품은 카펫 정도이며, 농산품으로는 버터, 치즈 등 유제품과 시베리아산 견과류가 인기가 있다. 그러나 견과류는 계절에 따라 해가 바뀐 제품은 주의해야 한다. 한국인의 선호품으로는 ‘러시아산 벌꿀’이다. 벌꿀은 중량으로 판매하는데 1인당 5kg까지만 살 수 있다.
그 이유는 5kg를 초과하면 알마티공항에서 압수를 한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싹쓸이'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와는 정반대인 이 제도는 눈여겨 볼 대목으로 생각되었다. 필자도 꿀을 사갖고 와서 먹어보았더니 과연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알마티 재래시장의 고려인 상점
□ 전통요리 샤슬릭(shashlik)
유목민족 국가답게 요리 종류가 다양하지 않는데, 수시로 이동하는 생활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목축으로 생업을 하던 사람들이 많은 탓으로 고기 요리가 발달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러시아 동부지역의 전통음식인 ‘샤슬릭’은 숯불로 구운 일종의 바비큐다. 이 샤슬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기는데 시원한 ‘고려국시’와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알마티의 명소 텐산[天山]을 오르다
침블락 스키장 게이트 지붕 위의 '눈표범'
이현경 교수(이하 이 교수)에게 히말라야 전설의 동물 '눈표범'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실물을 본 사람은 없다는 대답에 웃음을 자아냈다.
□ 침블락(Chimbulak)의 만년설과 스키장
제1 곤돌라 승강장(자동차로 해발 1,600m까지 올라가서 1,2,3단계로 곤돌라를 환승해야 한다)
아침 9시 우리 일행을 초청한 김 사장 부인 이 교수와 카자흐스탄국립대학 한국어과 최이라 (고려인 3세) 학생이 15인승 벤츠를 타고 숙소로 왔다. 기사는 어제 밤 공항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이 교수는 현재 카자흐스탄국립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처음에는 남편 김 사장이 대학졸업 후, 카자흐스탄국립대학의 한국어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 그들 부부가 알마티에 자리를 잡게 된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후 김 사장은 대학을 사직하고 지금은 알마티 고려문화원장, 경상남도 해외통상자문관, 재외동포 신문ᐧ방송편집인협회장, 동포한글신문 한인일보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에서 오는 언론인ᐧ상공인ᐧ기업인 등의 컨설턴트(Consultant)로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를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국내 유명 방송에 출연한 중앙아시아의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해발 2,860m 제2곤돌라 승강장 스키장 종합안내 센터(자랑스런 LG광고판)
이날은 3,500m의 침블락 만년설과 스키장으로 유명한 텐산이 목적지였다. 자동차로 숙소에서 40분 정도 달려가자 정상으로 오르는 제1승강장(해발 1,630m)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순차적으로 곤돌라(gondola)를 갈아타며 정상으로 올라갔다. 제2승강장에 내리자 해발 2,650m였다. 이때부터 일행 모두가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다고 했다. 고산병 증상이었다.
침블락 제2 곤돌라 승강장(2,260M~2,860M) 자랑스런 삼성 갤럭시 노트 광고판
침블락 스키장은 무더운 여름이라 눈은 보이지 않고 고산지대 수목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득한 하늘아래 ‘만년설’이 손짓하듯 나타났다. 갈증 때문에 연신 물을 마시면서 제3곤돌라를 타고 마지막 승강장에 내렸다. 고도계는 3,200m를 가리켰다. 난생 처음 백두산보다 높은 산에 오른 것이다. 보다 가까워진 만년설은 햇볕에 반사되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년설에서 녹아 흘러내리는 고드름 물
침블락 곤돌라 제3 승강장(2,860m~3,200m)
하늘에서는 따가운 햇볕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한걸음이라도 만년설에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 더욱 힘겨운 것은 뜨겁게 달아오른 자갈길과 가파른 경사였다. 100m를 오르는데, 1시간은 걸리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만년설을 바라보면서 셔터만 눌러댔다.
천산의 만년설(3,500m) 1
일생에 두 번 다시 이 성산(聖山)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발길을 돌리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 자꾸만 뒤쪽이 돌아 보였다. 휴게소에서 차가운 음료수로 목을 축인 후 하산 길의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천산의 만년설(3,500m) 2
한 발자국이라도 만년설에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역부족이었다(해발 3,300m)
텐산 관광을 마치고 시내에 들어오자 점심 때가 지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이 교수를 따라 들어간 곳은 알마티의 명소 콕주베(Koktyube) 전망대가 보이는 고급스런 식당이었다. 식당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코스로 나오는 요리를 보고 감탄하였다.
알마티에 도착하여 처음 먹어 보는 식사
게다가 서빙(serving)을 하는 종업원들을 보고 일행의 젊은이들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김태희 보다 더 예쁘다"라고 마냥 즐거워 했다. 필자는 김태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눈에 봐도 '볼쇼이발레단원' 보다 더 예뻤고, 매너 또한 수준급이었다.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는 가짓수보다 내용이 충실하였다.
더욱 후식으로 나온 크림과 과일 종류와 맛은 일품이었다. 크림은 유제품이 풍부한 나라라서 그렇다 해도, 과일은 당도와 맛이 우리나라 과일과 비길 수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식대가 꽤 비쌀 것 같았다. 알마티에서 처음 먹는 식사라서 이곳 물가를 몰라서였다.
비용이 과다하면 김 사장에게 부담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사 후 계산서를 보니 1인당 1만2천원이었다. 이를 보고 참으로 물가가 싼 나라다.하고 모두가 웃으면서 안심을 했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야채
□ 카자흐스탄 국립 중앙박물관
카자흐스탄 국립중앙박물관 외관
이 박물관은 1931년 알마티시 정교회 건물 내에 개관하였으나, 1985년에 현재 건물로 이전했다고 한다. 박물관의 소장품은 당초 군사박물관을 위해 1830년부터 유물을 수집했다고 한다. 박물관 건물은 유럽 건축양식에 카자흐스탄 전통 양식을 가미한 몇 채 남지 않은 건물로서 총 3층, 17,557㎡ 규모에 4개의 중앙전시실로 구성하여 20만 점의 소장품을 보관하고 있다.
중앙홀 정면에 전시되어 있는 황금인간(Golden Man)은 BᐧC 500년경 제작된 것이라고 했다. 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대 기류가 주를 이루었고, 실크로드와 관련된 유물이 많았다. 그러나 박물관의 건물과 주변 경관에 비해 전시 유물의 진열상태 등은 엉성하였다.
카자흐스탄 국보(이식 쿠르간에서 출토한 황금인간)
2층에는 한국관이 있다고 해서 달려가 보았다. 그런데 폭3m, 높이2.5m, 깊이1m 정도의 두꺼운 쇼케이스에 거북선 한 점과 국빈 방문 때 기념사진, 신문 기사 등이 전부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같은 쇼케이스 안에 일본 여성이 '기모노' 부채를 든 작품 한 점이 진열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 이 교수에게 물어 보았던바, 한국 대사관에 시정을 요청하였으나, 아직도 시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관에 전시된 기모노에 부채를 든 일본 여성
전시유물에 대한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했는데, 2천 원을 내면 허용한다고 했다. 또한 전시 유물의 도록이나 팜플렛 등은 아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박물관 관람의 흥미를 잃고 말았다.
박물관 전시 유물
박물관 전시 유물(콧수염을 기른 것을 보아 카작인이 아니고 서양인으로 짐자된다)
박물관 전시 유물(콧수염이 없는 것을 보아 카작인이 아닐까?)
이날 저녁은 게르만 씨 부부가 숙소에서 ‘고려국시’를 만들어 우리 일행을 초대한다고 이 교수가 귀뜸해 주었다. 그동안 정이 든 탓이라고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이 사용하는 건물 넓은 거실에 고려국시와 과일 등을 잔뜩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 사장 부부가 합석한 가운데 게르만 씨는 우리 일행의 알마티 방문에 대한 환영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곳 문화는 손님을 초대하면 초청한 사람이 10분이고 20분 동안 환영사를 한다고 했다. 이럴 경우 통역을 해야하므로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 사장이 가능한 시간을 단축하도록 양해를 구한 후 게르만 씨 부인 김옥자 여사의 유창한 한국어 통역으로 10분 만에 환영사를 마쳤다.
환영사 내용은 그들이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과정과 이곳에 정착하여 삶의 실상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품격과 수준이 돋보이는 그의 환영사는 그의 과거 지위를 느끼게 했다.
고려국시 만찬장(맞은 편 벽을 등지고 앉은 코너부터 김 사장, 박 게르만[상고머리], 김옥자[게르만 부인], 이현경 교수[김 사장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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