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대종교
임정 수립에 즈음하여 실시된 1919년 9월의 제1차 조각에서는 재정과 외교의 문제로 미국세력의 원조를 기대하여 대통령에는 재미활동가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임정 7부문의 총장 가운데 내무총장에 #이동녕(李東寧)[ 이동녕은 원래 기독교 신자였는데 대종교도들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913년경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이현희,『臨政과 李東寧研究, 일조각, 1996, p.390). 현재 임오교변 이후 일제의 전면적인 자료 압수로 인해 대종교 측에는 그에 관한 자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민족독립운동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그가 1917년경에 대종교 ‘서이도본사’에 소속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현규환,한국유이민사, 어문각, 1969, p.569). 재무총장에 #이시영(李始栄)), 법무총장에 #신규식 등 세 사람의 대종교도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 수립 당초로부터 많은 대종교도들이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임정의 요직으로 참가한 대종교는 앞에서 말한 이동녕․신규식․이시영 외에도 박은식․조완구(趙琬九)․박찬익․조성환․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윤세용(尹世茸)․현천묵(玄天黙)․김좌진(金佐鎮)․김승학(金承学)․황학수(黄学秀)․이범석(李範奭) 등이 있었다.
또한 1922년의 제3차 조각부터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한 제15차까지의 조각에 있어서 대통령․국무총리를 비롯해 임시정부에 입각(入閣)한 대종교도의 연 인원수는 총 37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27년 간에 걸친 임정의 역사에서 대종교도들은 시종일관 임정에 전면적인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대종교가 사실상 임정의 최대 배후지원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종교 이외에도 임정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참가하였으며, 특히 기독교 인사들은 임정 운동에 있어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대종교의 경우 임정에 참가한 많은 인사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임정에서 행해진 각종의 국가의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기타 종교와 다른 이른바 ‘국교(国教)’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국조 단군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 ‘홍익인간’을 표방하는 대종교의 단군민족주의 사상은 단지 대종교 신도뿐만 아니라 임정에 참가한 모든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신봉하는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대종교의 종교의례로서 창시된 ‘#개천절’과 ‘#어천절’ 행사는 임정에서도 공식적인 의례로 채용되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계승된 ‘개천절’ 행사는 태고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풍속과 같이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개천절’ 행사는 대종교 대종사홍암 나철에 의해 대종교가 중광된 해인 1909년 11월 15일(음력 10월 3일)에 처음으로 거행된 대종교의 의식이었다. 그런데 임정 측에서도 대종교의 ‘개천절’에 본받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을 추모하는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거행하였다.
우선 임정이 수립된 해인 1919년 음력 10월 3일(양력 11월 24일)에 임정의 국무원(国務院) 주최 아래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회로 개천절 기념행사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때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기념행사가 국조 단군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황조 성탄절(大皇祖聖誕節)’이자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건국기념일(建国記念日)’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이다.[ 독립신문, 양 1919년 11월 27일자, 제2면 제1단, 「대황조성탄급건국기원절 축하식」 그 뿐만 아니라 임정 측에서는 단군의 승천을 추모하는 ‘어천절(御天節)’에 대해서도 정부 공인으로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거행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음력 3월 15일을 단군이 아사달산에서 승천하였던 날로 여겨 매년 이 날에 ‘어천절’ 행사를 교단의 정식 대제(大祭)로 축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정이 수립되자 ‘개천절’과 더불어 ‘어천절’ 행사도 정부의 공인 경축 행사로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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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음력 3월 15일(양력 4월 22일)에 임정 주최로 어천절 행사가 거행되었다. 이 때는 임정의 의정원(議政院) 의장(議場) 내에서 행사가 이루어졌는데, 회장에는 “「가미고이」(높은 은덕의 의) 기좌에는 「도가오소」(기리 사모의 의)의 백견폭이 걸렸으며 그 상방에는 화연홍단에 금자로 「한배검」이라 새겨 붙인 편액이 존엄히 걸려있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신규식이 임정의 법무총장으로서 “한갈갓흔 마음을 모아 한배검의 녯 갈으치심을 생각하며 노래함으로 오날을 지내옵나이다”라는 축사를 낭독하였고, 그 후 일동이 일어나서 엄숙히 경례를 행하였다. 이어서 '신가'의 합창이 있고 조완구에 의해 단군 승천의 역사가 강설된 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다음과 같은 찬송사가 낭독되었다.
“우리 황조는 거륵하시샤 크시며 지헤로오시며 힘지시샤 이를 좃차베푸시니 인류의 한배시며 임검이시며 스승이샷다 허물며 그 핏줄을 이으며 그 가라침을 바다온 우리배달민죡이이오 … 불초한 승만은 이를 본밧아 큰 짐을 메이고 연약하나마 모으며 나아가 한배의 끼치심을 빗내고 질기과져 하나이다.” [독립신문, 양 1921년 4월 30일자, 제1면 제1단, 「찬송사」].
이러한 찬송사의 내용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도 대종교의 단군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1921년 초 상해 신원(申園)공원에서 이승만이 대종교의 핵심 인물이었던 신규식․박찬익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南坡朴賛翊伝記刊行委員会 편, 南坡朴賛翊伝記, 을유문화사, 1989, p.161.]
또한 이승만 이외에 미국에서 활동한 거물급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도 임정의 단군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 음력 10월 3일(양력 11월 11일) 상해에서 '건국개천절'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그 때 안창호도 이 행사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송축사(頌祝詞)를 낭독하였다.
“거룩하다 우리 시조단군- 그 덕이 놉고 업이 벗나도다 그 열어주신 남은 따은 삼천리의 꾸다운 한반도이오 그 오천년 동안 길너오신 남은 자손은 이천만의 용장한 대한사람이로다.”[독립신문, 양 1921년 11월 11일자, 제3면 제1단, 「시조건국개천절」.
이와 같은 축사의 내용을 통해 안창호도 대종교의 단군사상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임정을 지탱한 여당 정당이었던 '한국독립당'은 1935년 음력 10월 3일의 개천절을 건국기념일로 축하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공포하였다.
“음력 10월 3일은 국조 단군의 탄생일이며 또한 그 건국일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중으로 10월 3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 단군 이전에 桓國이 있었고 桓國을 역사적으로 발전, 확립시킨 중흥적 건설자가 즉 환웅이며 환웅의 태자가 즉 단군이다. 역사상 桓儉이라고 하시는 분이다. 삼한은 환국의 여파이고 고구려․백제․신라는 삼한의 지류이며 … 4천여년 桓國 곧 한국의 일관된 국가의 영광을 갖게 된 것이 우리 민족의 특징이다. … 사후의 天堂이 아니라 꿈속의 理想鄕도 아닌 우리의 삶 앞에서 우리의 피를 가지고 우리의 영광 찬란한 국가를 재건설하기 위해, 4268년 전의 桓國 開祖 단군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영원히 자립 자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독립당을 고수, 발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4268(1935)년 10월 29일 건국기념선언:한국독립당>
현재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기초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을 스승으로 우러러보는 열렬한 대종교도인 신규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여러가지 대립에 의해 거의 해체상태로 유명 무실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임정을 지켜 나간 것은 대종교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혀 인식되어 있지 않다. 한국민족운동에 있어서 대종교의 역할은 완전히 간과되어 대종교의 존재는 역사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영역에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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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p.784.
「韓末における檀君教の「重光」と檀君ナショナリズム」,}朝鮮学報 제180집, 朝鮮学会, 200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