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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을 찾아서
황 희 黃 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정승이자 청백리로 탄현면 금승리에 지방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묘가 있고, 문산읍 사목리에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伴鷗亭이 있다. 초명은 壽老, 자는 懼夫, 호는 尨村, 본관은 長水, 이조참의에 증직된 石富의 증손이고, 의정부참찬에 증직된 均庇(균비)의 손자이며,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낸 君瑞의 아들이다. 1363년(공민왕12) 開城 可助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龍宮 金氏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福安宮錄事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후, 1383년 사마시에 오르고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389년(창왕 1) 별장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현 적성면)훈도·성균관학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杜門洞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추관·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로 재임중 부모의 喪期를 마치지 않은 繕工監 鄭蘭의 직무가 起復시켜 관직에 임명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직첩에 서경하지 않아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후 언사로 인해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다시 문하부우습유에 임명되었고, 1399년(정종 1) 10월 문하부우보궐에서 면관되었다가 그해 2월 복직되는 등 강직한 직언으로 인해 수차례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후 경기도도사를 거쳐 내직에 등용되어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 등을 역임하고, 1401년 (태종 1) 知申事(승정원도승지) 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하여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된 후 병조의랑으로 옮겼다가 1402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특별히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고, 1404년 10월 우사간대부·좌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언(좌부승지)에 올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정계에 유력자로 부상된 것은 1405년 12월 왕명의 출납을 총괄하는 승정원지신사가 되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태종의 총애를 받던 박석명이 5년간 재직하던 지신사를 사임하면서 그 후임자로 좌부대언인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는데, 좌부대언에서 지신사로 승진된 것은 당시의 인사 관행상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에 그는 공신이 아니었으면서도 공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는 태종이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을 수밖에 없는 것이오."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실제로 1407년 11월 閔無咎의 옥사와 관련하여 태종이 靜妃와의 별거문제를 의논하자 이를 극구 만류하여 관철시키는 등 태종의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자문에 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도승지로서 知吏曹事를 겸임하며 문관의 인사행정에 커다란 실권을 행사하였다. 당시 문·무관의 인사는 좌·우정승이 각기 判吏·兵曹事를 겸임하여 총괄하였는데, 지이조사를 겸임하였던 그는 판이조사를 겸임한 좌정승 成石璘과 판병조사를 겸임한 우정승 李茂보다도 왕의 신임을 더 얻어 문무관의 인사행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408년 도승지로서 생원시의 시험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옛 규례에는 반드시 성균관대사성으로 시관을 삼았었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할 정도로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였다. 1409년 8월 참지의정부사로 승진되기까지 근 4년간 도승지로 재임하는 동안 국정에 커다란 실권을 행사하면서 태종대의 왕권 강화와 제도 개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1409년 12월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2월 지의정부사와 7월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411년 9월에는 병조판서로서 명에 다녀왔으며, 1413년 4월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하였다가 6월에 다시 예조판서에 인명되었다 1415년 5월 이조판서로 재임중 송사처리에 연관된 문책으로 6월에 파직되었다가 그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직되었다. 그후 1415년 11월에 의정부참찬, 12월에 호조판서를 거쳐 1416년 이조판서로 재임하면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곧 이어 공조판서로 복직된 후 1417년 2월 평안도도순문사로서 평양윤을 겸임하였고, 그해 9월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왕실의 嫡庶子封爵法을 개정하였으며, 1418년 1월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그해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庶人으로 격하되어 5월에 交河로 유배되었고, 곧 이어 남원에 이배되었다. 그 당시 태종은 그에게 세자로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양녕대군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세자의 나이가 어리고 과실의 대부분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태종은 그가 중립을 취하여 사태를 관망하는 것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도 臺諫에서는 양녕대군 및 그에 관련된 인물들을 계속하여 탄핵하였으나 상왕(태종)의 오해가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2월 남원에서 소환되어 직첩을 환급받고 3월에는 과전을 환급받은 후 10월 경시서제조 의정부참찬으로 복직되었다. 그후 1423년 5월 예조판서에 이어 7월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이임하자 관동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아쉬워하였고, 특히 1425년 강원도 삼척에서는 중국의 周代에 선정을 베풀었던 文王의 서자인 召公에 비유하여 그의 행차가 머물렀던 곳에 대를 쌓고 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지금도 '정승고개'라고 부르며 유덕을 기린다고 한다. 1423년 12월 판우군도총제부사로서 강원도관찰사를 겸임하였고, 1424년 6월 의정부찬성, 이듬해 3월 사헌부대사헌을 겸대하였다. 1425년 3월에는 남원부사 李侃이 보낸 물품을 수뢰한 고위 관직자를 조사할 때 조정의 다른 재상들과는 달리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여 당시의 여론이 황희만이 정직하다고 평가하였다.
1426년 2월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그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1월 좌의정 겸 판이조사로 재임중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기복되다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藥山城基를 답사한 뒤 약산을 요충지로 판단하고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하여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같은 해 6월 좌의정으로 재임중 사위인 徐達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기도 하였다. 서달이 그의 모친 최씨를 모시고 대흥현으로 가는 도중 신창현을 지나다가 그 고을의 아전이 말을 잘 듣지 않자 때린다는 것이 지나쳐서 아전을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孟思誠이 조서를 변조하고, 또 몇 개월씩이나 사건의 심리를 고의적으로 지연시켰다는 사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지만 세종은 대신의 진퇴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이러한 요구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1430년 12월 좌의정 황희가 교하현령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현령의 아들을 行首로 임명하였다는 것과, 監牧을 잘못하여 國馬 1,000여 필을 죽게 한 혐의로 사헌부에 투옥된 太石鈞의 감형을 담당관에게 사사로이 부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파주의 伴鷗亭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종이 그를 파직시킨 것은 일시적으로 대간의 탄핵을 무마하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세종은 그를 파직시킨 지 1년도 안 되는 1431년 9월 영의정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그후 1449년 10월 관직을 떠날 때까지 19년간을 영의정부사로 재임하면서 1432년에는 장리의 자손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서용할 수 있도록 장리자손금고법을 완화시키고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 면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수행하였다.
또한 1432년 겨울 여진족이 평안도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을 때 여연·강계 지방의 백성을 위한 구호책을 진언하여 조세와 부역을 30년 동안 탕감하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청에서 의복과 식량을 주며 친척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기르게 하되 친척이 없는 경우에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구휼토록 하였다. 특히 1436년 7월 좌의정 崔潤德이 영중추부사로 체직되고 이듬해 10월 우의정 盧閑이 파직됨으로써 1437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영의정으로 홀로 재직하면서 국정 전반을 처리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에 파주의 반구정에서 여생을 보내면서도 국정의 중대사가 있으면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 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小學·家禮·性理學 등을 즐겨 공부하였지만 뚜렷한 學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는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관직생활 동안 그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내정면에서 세자의 강학 요청과 양녕대군 문제, 민무구 등 외척의 문제, 경제육전의 개정, 상정 조례의 논의, 법관의 남형 금지, 소나무의 남벌 금지, 태만한 수령의 처벌 규정 등의 시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국방문제와 대외 관계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에 대한 방비책과 구휼을 통한 회유책을 동시에 강구하였다. 특히 공조판서 재임시에는 각 도에 비치한 군사와 군수물을 낱낱이 점검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하였다. 그밖에도 야인 토벌과 4군 6진의 개척, 부방인의 대우문제, 서북토관제의 정비, 병마군기의 점검, 봉화의 시행, 강무시의 군복 제정 등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곡식종자를 배급케 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하여 백성의 복식생활을 풍족케 하는 등의 민본정책을 폈다. 그의 이러한 민본적 경제정책은 법률의 개정에도 반영되었다. 종래 元集과 續集으로 나뉘어져 내용이 중복되거나 누락되어 그 내용이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을 수정·보완하여 『經濟六典』을 펴냈으며, 과전수세법, 공물문제, 기민의 구제책, 賤妾소생의 천역 면제 등 광범위한 대민정책을 펴서 민중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하였다.
문화면에서도 우리의 가정생활로부터 국가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즉 집현전을 중심으로 문물을 진흥시키고, 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고려의 예법을 명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하여 개정·보완하였다. 그밖에도 복제규식으로부터 아악전례제도, 사직제도, 산천제사, 산릉보수칙, 기자묘의 신위제호, 종친대신의 상사의주 제정, 역대 국조제사제도 은제 등을 광범위하게 마련하였다. 불교정책에 있어서는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하여 태종의 회암사 행차를 반대하였고, 세종 말기에 세종이 궁중에 內佛堂을 설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며, 승도 600명을 동원하여 풍저창과 광흥창을 건립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적 출판에도 힘써 「노걸대」 . 『박통사」 . 『효경』 등을 간행케 하고 문학적인 면에서도 시와 가사 등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청빈한 관직생활과 자상한 인품, 그리고 인재양성 등에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루는 태종이 황희의 집에 들렸는데 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멍석은 낡아서 많이 헤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태종이 "이 자리는 뽑아서 가려운 데를 긁는 게 좋겠다. "고 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웃는 모습으로 대했기 때문에 好好耶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느긋한 성품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하루는 집안의 하인들이 싸우다가 그 중의 한 명이 그에게 와서 상대방의 비행을 말하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자 "과연 네 말이 옳다. "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자 "과연 네 말도 옳다. "고 하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부인이 "사물에는 一是一非가 있는 법인데 모두 옳다고 하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사물의 판단력이 흐리고서야 어떻게 막중한 국사를 처리하십니까?" 라고 말하자 태연스럽게 "과연 당신의 말도 옳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에 임해서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하루는 국정을 처리하기 위하여 영의정을 비롯한 6조의 판서들이 모였다. 그때 공조판서였던 金宗瑞는 자기 소속 관서인 공조로 하여금 음식물을 준비하여 회의 참석자에게 대접하게 하였다. 이를 보고 "국가에서 예빈시를 의정부 옆에 설치한 것은 삼의정을 접대하기 위한 것인데, 만약 음식물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예빈시로 하여금 음식물을 마련해 오게 해서 먹도록 할 것이지 어째서 공조로 하여금 사사로이 음식물을 제공케 한단 말이오."라고 김종서를 신랄하게 문책하였다.
이와 같이 국정에서의 책임한계와 공사의 구별을 엄격히 하였던 것이다.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 예를 들면, 김종서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김종서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박절하다고 할 정도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종서의 잘못을 나무라고자 할 때는 대신 노비를 매질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김종서를 모시고 다니는 하인을 가두기도 하였다. 이를 본 동료들은 황희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말하였고, 김종서 자신도 속으로 언짢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좌의정인 맹사성이 그에게 "김종서는 유명한 재상인데 대감은 어째서 그렇게도 김판서의 허물을 잡으시오?"라고 비난하자,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김판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것이오. 그의 성격이 고매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뒷날에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의 성격이 신중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그 기운을 꺾어 매사를 가볍게 처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곤욕을 주려는 것이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김종서를 의정으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신분의 고하에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를 등용시키고자 하였다. 한번은 집에 어린 사내종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글 읽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서도 그 글자와 뜻을 해석할 정도로 총명하였다. 이를 본 그는 그 사내종의 부모를 조용히 불러서 "지금부터 이 돈을 가지고 너의 신분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자식을 열심히 공부시켜 성공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당시에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커서 천민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을 숨기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때의 사내종은 뒷날 글을 열심히 읽어 과거에 급제한 후,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과거의 일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다른 말을 하면서 그 선비의 말을 가로막은 다음 조용히 그를 불러 "그때의 일은 너와 내가 알뿐인데 사실을 말하면 너의 출세에 지장이 생기니 평생토록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처럼 태종대와 세종대에 걸쳐 국가 발전과 민생의 안정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고, 청빈한 생활과 어진 성품으로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1452년(문종 2)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아들 黃守身이 좌익공신에 책록되면서 남원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파주의 반구정과 문경의 肅淸祠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파주의 應村影堂, 상주의 玉洞書院, 장수의 滄溪書院, 남원의 楓溪書院, 진안의 安華山書院, 완주의 龍津書院, 삼척의 山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尨村集」이 있으며 시호는 翼成이다.
임진강 하구 - 기러기동창회·갯벌의 개리 등 장관
임진강은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로 허리가 잘리고도 하루도 쉬지 않고 55년을 흘렀다. 임진강은 분단됐으나, 그 강물은 단 한번도 나뉜 적이 없었다.
총길이 254.6㎞, 유역면적 8117.5㎢,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강인 임진강은 함경도 마식령에 샘을 두고 3분의 2를 북에서 흐르고 3분의 1을 남쪽에서 흐른 뒤 한강과 만나 황해로 해소된다. 그래서일까.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난 뒤 가장 먼저 부각된 남북의 협력사업으로 경의선 철도 복원과 함께 임진강의 치수사업이 꼽혔다.
임진강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홍수와 범람이 일어나기 쉬운 강이다. 먼저 고미탄천, 평안천, 역곡천, 차탄천, 포천천, 한탕강, 사천, 신천 등 지천이 많아 큰 비가 내렸을 때 본류인 임진강의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게 된다.
또 임진강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북쪽의 산들은 나무를 베어내고 이른바 '다락밭'을 일군 곳이 많다. 따라서 산이 물을 충분히 머금었다가 천천히 뱉어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본류로 토해낸다. 이 과정에서 함께 쓸려내린 흙과 모래는 하천의 바닥에 쌓여 수위를 높임으로써 범람의 또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임진강 문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에서 황해에 이르는 하구다. 이 곳은 한-미 연합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중립지대고, 남북공동수역이며, 동 식물의 천국이다.
애기봉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면 교하의 강물은 장관이다. 왼쪽에 임진강이 북쪽의 관산반도를 끼고, 오른쪽에 한강이 김포반도를 돌아 합치면서 커다란 호수같은 물천 지를 이룬다. 이 일대에는 독수리, 청둥오리, 황오리, 흰뺨검둥오리, 흰죽지비오리, 쇠기러기, 큰기러기, 재두루미, 개리 등이 철에 따라 터를 잡고 노닌다.
또 교하 어름에 2만평 가량 펼쳐진 갯벌은 온갖 생명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오직 새와 물고기만이 자유롭게 다니는 이 곳 교하 부근에 뱃길을 다시 열자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임진강 하구는 민통선지역으로 인적이 드물어 분단의 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철새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 이곳의 겨울 철새들은 단풍잎에 서리가 내릴 때쯤 날아들기 시작해 늦어도 3월이면 떠난다.
이곳에서 망원경에 잘 들어오는 것은 청둥오리다. 이놈들은 우리나라 철새의 감초격으로 전국 어디서든 쉽게 관찰된다. 수컷은 머리와 목이 청녹색을 띠고, 목에 흰 스카프를 둘렀으며, 몸통은 흰색에 가깝다. 암컷은 갈색 깃털에 붉은 부리를 가졌다. 요즘은 가끔 한강을 중심으로 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텃새화된 녀석들도 눈에 띈다.
문산 읍내를 거쳐 임진강변의 반구정에 가면 아침 햇살에 황오리가 뜨고, 저녁 노을에 기러기가 깃을 접는 건강한 생태계를 만날 수 있다. 반구정은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정자다. 흰뺨검둥오리, 흰죽지비오리 등 오리류가 주류인 이곳의 철새 가족들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황오리다. 황오리는 덩치가 오리류 가운데 큰 편에 속하고, 몸 색깔은 이름에 걸맞게 밝은 주황색이다. 날개에는 흰색 띠를 둘러서 한껏 멋을 냈고, 암수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반구정 부근의 임진강은 황복어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황복어는 날씨가 풀려 황오리가 북녘으로 날아가고 나면 알을 낳으러 서해에서 올라온다. 이곳의 황복어는 한때 남획과 환경오염으로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으나 최근 들어 다시 잡히고 있다.
임진강 하류의 충적평야에서는 매일 기러기들의 동창회가 열린다. 이들은 자유로로 쌩쌩 내달리는 차량들의 소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떼를 지어 앉고 뜨는 장관을 펼친다. 이곳에는 쇠기러기보다 큰기러기의 개체수가 월등히 많다. 쇠기러기는 한때 흔한 철새로 기록되었으나, 최근에 수가 크게 줄었다. 갈색 몸통, 흰 이마, 주홍색 부리, 짧은 목을 하고 있어서 큰기러기와 쉽게 구별이 된다. 시베리아 동부에서 날아온 큰기러기는 몸이 크고 검은 부리끝에 황색 띠가 특징이다. 이들은 하구의 작은 섬이나 농경지에서 곡식 낟알과 풀뿌리를 뜯어 먹고 산다.
이곳은 독수리의 본적지로도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탄 적이 있다. 독수리는 검은 몸통에 날개가 넓고 끝이 갈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놈들은 보일락 말락 높게 떠서는 죽은 동물이나 힘이 빠진 철새들을 노리고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재두루미도 이곳에서 곧잘 발견된다. 재두루미는 전 세계에 6천마리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3분의1 가량이 우리나라에서 월동한다. 이 지역에 날아오는 재두루미는 소규모 가족단위다.
오두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점에서는 천연기념물 제325호인 개리 수백마리가 떼를 지어 머리를 갯벌에 처박고 갯벌을 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개리는 쇠기러기와 큰기러기의 중간 크기이며, 기러기보다 목이 긴 편이다. 이놈들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갯벌에서 머리를 빼내 온통 뻘로 범벅이 된 얼굴로 주위를 멀뚱히 살피는 모습이 마치 채플린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곧 맑은 물가로 가 깨끗이 세수를 하는 깔끔함을 보이기도 한다. 개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곳과 금강하구에서만 발견된다.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보물 제93호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 자락에 위치한 용암사(龍岩寺) 경내 좌측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입상은 천연 바위벽을 이용해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2구(軀)의 거대한 불상으로 토속적인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압감(威壓感)은 있으나 신체 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서투른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반구정(伴鷗亭)
사적 제225호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명상(名相)인 방촌 황희(黃喜 1363∼1452)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한국전쟁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에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1975년에는 단청을 하고 축대를 손보았다. 그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하였다.
이곳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안(江岸)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허목(許穆)의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20리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보광사(普光寺)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아래에 위치한 천년 고찰로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894) 왕명으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에 탄 것을 광해군 14년(1622)에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였다. 그 후 영조 16년(1740)에 보수가 이루어져 인근에 있는 영조의 사친 숙빈(淑嬪) 최씨의 능인 소령원(昭寧園)의 기복사(祈福寺)로 삼았다고 한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일부 건물이 불에 탔으나 그 후 재건과 보수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多包系樣式)의 팔작집이다. 장대석의 높은 기단위에 자연석 추춧돌을 놓고 그 위에 지름이 대략 1자5치 정도되는 굵은 기둥을 세운 조선후기의 건축물 양식을 띠고 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도기념물 제45호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효종 1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 39년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두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오두산성(烏頭山城)
사적 제351호 탄현면 성동리 자유로(自由路)가 지나는 오두산의 정상부분과 산사면에 띠를 두르듯이(테뫼식) 축성된 석성(石城)이다.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맞닿은 곳에 표고 119m로 솟아있으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산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북한 지역이, 남쪽으로는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서쪽으로는 한강이 북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어 두강이 만나서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산 정상부근에는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통하여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파손되었으나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조사에서 규모가 밝혀지고 삼국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백자, 기와, 철촉 등의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최근 오두산성은 문헌적으로, 고고학적으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주목받고 있는데 백제의 북방 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은 병신전쟁(丙申戰爭·396)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수군이 백제의 아신왕(阿辛王)을 치고 수도 위례성(慰禮城)을 함락시키기까지 광개토왕의 남하정책 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명회와 압구정(狎鷗亭)과 기심(機心)
가슴속의 기심(機心)을 끊을 수 있다면 벼슬의 바다 앞에서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胸中政使機心斷 宦海前頭可狎鷗 흉중정사기심단 관해전두가압구
성종 때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최경지(崔敬止)가 당시의 권신(權臣)인 한명회를 비웃어 지은 시이다. '기심(機心)'이란 기회를 틈타 남을 속여 자기에게 이롭도록 일을 꾸미려는 마음을 말한다. 《열자(列子)》〈황제(黃帝)〉편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매일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와 친하게 노는 젊은이가 있었다. 갈매기들은 젊은이의 어깨에도 내려앉고 손바닥에도 내려앉았다. 젊은이의 아버지는 어느 날 아들에게 갈매기를 한 마리 잡아오라고 하였고 젊은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젊은이가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를 부르자 갈매기는 한 마리도 내려앉지 않았다. 갈매기들이 젊은이의 기심을 알아차린 것이다.
수양대군을 도와 구테타에 성공한 한명회는 생전에 온갖 권세를 다 누렸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자연으로 돌아가 앞서 소개한 《열자》속의 젊은이처럼 기심이 없이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의미에서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그러나 정자를 다 지어놓고서도 말만 은퇴한다고 할 뿐 권세 욕심에 은퇴를 계속 미루었다. 이에, 최경지는 한명회를 향해 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아무리 압구정에 나가봐도 기러기와 친해질 수 없을 것이라며 위와 같은 시를 지은 것이다. 참으로 뼈가 있는 풍자이다. 그때 그렇게 지어진 압구정이 있는 압구정동은 지금 서울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늘 은퇴를 들먹이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열심히 일도 하지 않을 당신, 떠나라! (胸:가슴 흉 狎:친할 압 鷗:갈매기 구익 連:이을 연 理:이치 이 枝:가지 지)
압구정동의 유래
압구정동 동명의 유래는 이곳에 조선 세조때 權臣 韓明會가 지은 狎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원래 狎鷗는 한명회의 號로서 "세상일 다 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아주 친근하게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뒤 狎鷗亭은 제자도와 함께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하여 錦陵慰가 된 박영호에게 하사되었으나, 갑신정변때 역적으로 몰려 한 때 몰수되었다가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으나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에는 뒤주니(지금의 현대아파트 200동단위 일대), 먼오금(지금의 압구정2동 일반지역), 옥골(지금의 한양아파트 일대), 장자말(지금의 구정초,중고교 및 구현대아파트 일대)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는데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고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으며 장자말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 불렀고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강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업위주의 마을이었으나 일제때부터는 배밭 등 과수농업을 주로 해 온 마을이기도 하다. 그 후 1960년대에는 1970년대에 걸친 정부의 경제정책에 의해 서울 근교의 농촌마을이었던 이 마을의 고유의 주택을 비롯하여 벌판의 야산과 전답이 모두 개발되면서 서울의 신흥 주택가 및 상업지역으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狎鷗亭址는 지금의 현대아파트 74동과 72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유래
RODEO란 원래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의 등을 타고 굴복시키거나 계속 버티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들이 솜씨를 겨룬데서 발전한 서부적인 놀이 경기이며, 또한 미국 비버리힐즈의 세계적인 패션거리인 "로데오 드라이브"가 있습니다.
아마도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라는 말은 90년대 초 패션의 중심가로 자리잡고 당시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기존질서나 가치로부터 탈피하려는 신세대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거리로 미국 비버리힐즈의 로데오거리를 본뜬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들만의 압구정로데오"에서 우리들의 "압구정로데오"로서 사치, 향락의 거품이 빠지고 대중과 젊음의 문화가 약진하는 로데오 거리로 변모되었습니다.
90년대 초창기에는 소위 오렌지 족이라는 부유층의 자녀들이 많이 활보했던 거리였으나 지금은 옛말이 되어 버렸고, 참고로 문정동, 목동등 일부지역에서 상권확장과 손님유치를 위해 로데오거리를 칭하고 있는곳이 많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로데오 거리 입구에 로데오거리 상징탑이 2002.6월 건립되었읍니다.
수양의 '장량' 한명회<1415 - 1487>
권람이 수양대군의 좌장 역할을 했다면 한명회는 '장량'격이었다. 말하자면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였다.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141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읜 탓으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서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하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거사 국면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그는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들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바'살생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1457년에 이조판서,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체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거머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하였다. 그리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뭍여 '압구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를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됐다 하여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를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반구정과 압구정
파주에서 서쪽으로 시오리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세종조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尨村) 황희(黃喜)정승의 정자입니다. 18년간의 영상직을 치사(致仕)하고 90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며 그의 노년을 보낸 곳입니다. 단풍철도 지난 초겨울이라 찾는 사람도 없어 한적하기가 500년전 그대로다 싶었습니다. 당신은 아마 똑같은 이름의 정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狎鷗亭)이 그것입니다. 압구정은 세조의 모신(謀臣)이던 한명회(韓明澮)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입니다. 반구정의‘伴’과 압구정의‘狎’은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둘 다‘벗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정자는 다같이 노재상이 퇴은하여 한가로이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입니다만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은 참으로 판이합니다. 반구정이 지금도 갈매기를 벗하며 철새들을 맞이하고 있음에 반하여 압구정은 이미 그 자취마저 없어지고 현대아파트 72동옆의 작은 표석으로 그 유허임을 가리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정자의 주인인 황희정승과 한명회의 일생만큼이나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상의 자리에 올랐던 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람은 언제나 명상(名相) 현상(賢相)의 이름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권신(權臣) 모신(謀臣)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조의 찬란한 업적 뒤에는 언제나 황희정승의 보필이 있었으되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몽매하다고 할만큼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 있었고, 심지어는 물러나 임진강가에서 야인어부들과 구로(鷗鷺)를 길들일 때에도 그가 당대의 재상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이고 정난공신 1등, 익대공신 1등 등 네차례나 1등공신이 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쿠데타와 모살과 옥사(獄事)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후에 신원되기는 하였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입은 권력자였습니다.
황희정승은 두문동에 은거하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원칙에 따라 진퇴했던 반면, 한명회는 스스로 실력자에게 나아가 그를 앞질러 헤아리고 처리해나간 모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얼킨 일화도 판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황희정승의 집안 노비 두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사내종에게도‘네 말이 옳다’ 계집종에게도‘네 말이 옳다’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그 무정견을 나무라자‘부인의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언언시시(言言是是)정승이라 불릴 정도로 그는 시(是)를 말하되 비(非)를 말하기를 삼가였고 소절(小節)에 구애되기보다 대절(大節)을 지키는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황희정승이 겸허하고 관후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회자됨에 비하여 한명회에 관한 일화는 그와 정반대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강정(江亭)에 걸려있는 한명회의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싯귀의 扶를 亡으로, 臥를 汚로 고쳐써서‘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는 뜻으로 바꾸어버린 일화는 유명합니다. 사람들은 한명회가 대노하여 이를 찢어버렸다는 후일담까지 곁들여놓았습니다.
2시간도 채 못되는 거리에 남아 있는 반구정과 압구정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 인품의 차이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황희가 문화통치기의 재상이었고, 한명회는 의정부중심의 합의제를 타파하고 강력한 왕권체제로 회귀하던 시기의 재상이라는 정치체제상의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의 차이로 환원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피라밑의 건설이 정치가 아니라 피라밑의 해체가 정치라는 당신의 글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을 회복하고 노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형태의 피라밑을 허물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우리가 맡기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모든 것을 심판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몫은 우리가 내려야할 오늘의 심판일 따름입니다.
반구정과 압구정의 남아 있는 모습이 그대로 역사의 평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차이가 함의하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해체해야 할 피라미드는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회복해야할 땅과 노동은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압구정이 콩크리트 더미속 한 개의 작은 돌멩이로 왜소화되어 있음에 반하여 반구정은 유유한 임진강가에서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람부는 반구정에 앉아서 임진강의 무심한 물길을 굽어보았습니다. 분단의 제거야말로 민족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최선의 정치임을 이야기하는 듯 반구정은 오늘도 남북의 산천과 남북의 새들을 벗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