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이처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 안도현, <모항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다.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 대신 왼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달렸다. 모항을 지날 즈음 바닷가 갯벌에 다닥다닥 붙어 무언가에 열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빠, 스톱!" 아홉 살 딸아이의 외침에 시커먼 갯벌로 핸들을 돌렸다.
모항을 처음 찾은 건 대학 시절. 벌써 15년하고도 몇 년이 흘렀다. 바다가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아 변산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잔 그날,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시시콜콜한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시인의 말대로 이미 모항이 내 몸 속에 들어와 있었다.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당시만 해도 모항은 변산의 모퉁이에 툭 불거진 곳에 자리한 조그마한 어촌마을이었다. 오늘 다시 이곳을 찾으니 포구로 가는 길은 더 이상 구불구불하지도 않고,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은 그런 한갓짐도 없었다. 세상의 흐름 속에 제 살길을 찾아가는 우리네 인생처럼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빠른' 관광지의 그저 그런 모습들뿐이었다.
아이의 손에 이끌려 갯벌체험장에 들어섰다. 아이는 신이 나서 이미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줄을 서고 있었다. 갈고리 모양의 호미와 조개를 담을 바구니 하나씩을 챙겨 신발을 벗고 갯벌로 내려갔다.
먼저 조개를 캐고 나오는 이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죄다 바구니 가득 조개를 들고 나왔다. 조개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아이들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갯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책에서 몇 번 이야기 한들 무엇하랴. 직접 와서 발로, 손으로, 눈으로, 피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큼 효과가 있겠는가.
조개를 캐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조개를 캤음에도 처음엔 쉽사리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늘 밥상에 올라온 삶은 조개만 보다가, 그도 아니라면 엄마 따라 시장에서 보았던 조개가 전부인데, 갯벌에서 조개가 난다는 건 배워서 알고 있지만 이런 바다 밭에서 조개가 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조개를 캔다는 사실이.
바다는 잔잔했다. 바람도 쉬고 있는 갯벌에는 호미질 소리와 이따금 긴 탄식만이 들려왔다.
딸애가 첫 조개를 캔 후 자랑을 했다. 먼저 캐고 갯벌을 나오는 이들의 바구니에 조개가 가득했지만,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조개를 캘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몇 번 허탕을 쳤다. 이미 사람들이 캐고 난 자리라서 조개가 없다는 걸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다 쪽으로 더 나가자 거짓말처럼 조개가 호미에 걸려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물 반 조개 반'이었다. 아니 '펄 반 조개 반'이었다. 호미질만 하면 바지락 등 각종 조개가 한 번에 서너 개씩 나왔다. 몇 번 허탕을 친 아이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체험장이라지만 조개가 이렇게 많을 수가 있을까. 아내는 금세 한 바구니를 채웠다. 뭔가 이상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곳은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양식장으로, 씨조개를 기르는 곳이었다. 자연 갯벌로는 체험하는 이들의 수를 감당할 수 없어 씨조개를 심어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개를 캐는 것이 지겨운 이들은 아예 몸을 갯벌에 던져버린다. 선글라스 쓴 멋진 꼬마 아가씨가 잠시 자세를 잡는가 싶더니, 어느새 새 자리를 물색한 가족에게 돌아가 열심히 조개를 캔다.
조개 캐는 일이 재미는 있는데, 어린아이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허리가 아픈지 한 아이가 '어휴'하고 일어나더니 한참이나 서 있었다. 오빠로 보이는 아이가 여동생이 캔 조개를 한 번 더 살펴보고, 호미질에 싫증난 삼형제는 손으로 펄을 휘저으며 조개를 찾는다.
바구니를 가득 채운 아이는 조금씩 지겨워지는데, 아직도 조개 캐는 데 열심인 사람들은 많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더니 너무나 열심인 아빠와 아들. 조개 캐기 삼매경에 빠져 엉덩이가 조갯살처럼 드러나는 줄 몰랐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 아이 엄마가 아이를 보고 한바탕 웃더니 바지를 올리라고 한다. 여행자도 웃고 있자니 머쓱해서 잠시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베두인 같은 차림새의 '부자'가 정답다.
갯벌은 단지 조개만 내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가족끼리 똘똘 뭉치게 했다.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걸 갯벌은 끈끈하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의 등에 업힌 아이도 떨어질세라 엄마를 꼭 붙잡고, 아이는 조개를 찾아 이리저리 갯벌을 옮겨 다닌다.
때론 둘이서, 때론 여럿이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캐서 갯벌을 벗어난다. 갯벌의 소중함도 알고, 땀 흘려 일하는 맛도 알았다. 저마다 바구니 가득한 조개를 들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각자 잡은 조개는 깨끗이 씻어 집으로 가져가면 된다. 다만 아무리 많이 캐어도 1인당 1kg 이상은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서운할 필요는 없다. 그것만 해도 한 끼를 먹고도 남으니 말이다. 오늘 저녁 밥상에는 아이의 소중한 땀과 함께 시원한 바지락이 올라올 것이다.
☞ 여행팁 모항갯벌체험장은 전북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에 있다. 입장료는 중학생 이상 8000원, 초등학생 이하는 5000원이다(단체 20명 이상은 10% 할인). 자신이 캔 조개는 가져갈 수 있는데, 1인당 1kg만 가져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