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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시:2012년 7월 9일 10일(1박2일)
2,장소: 부산우정청 산청 지리산 수련원
3.일정:마산역~남사예담촌~덕천선원~산천재~부산우정청 산청 지리산 수련원(9일)
부산우정청 산청 지리산 수련원~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지리산국립공원중산리탐방안내소~남명기념관~목면시배유지
~정취암~충익사~마산역(10일)
4.참가자:강신수 김윤철 김재호 박순규 박은호 이주환 정현호 조현식 지우상 한용기
남사예담촌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이 있다.
지리산 초입에 자리잡은 남사예담촌은 안동하회마을과
더불어 경상도의 대표적인 전통한옥마을이다. 경남하면
산청남사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도 유명하고 전통 한옥 마을로도 유명하다.
전통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요즘 평범하게
살아 가면서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지리산 초입의 이 작은 마을이
유난히 정감 있고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해묵은 담장
너머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삶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이 있다. 한옥은 수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 삶의 양식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한 민족의 문화가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딛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것이다. 농촌 전통테마 마을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속에서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배움의 휴식 터로 자리 잡을 것이다
덕천서원
덕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천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1576년(선조 9)에 창건되었으며,
조식(曺植)의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으며,
그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1576년(선조 9)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士林)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며 조식유적지(사적 305) 내에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덕천서원은 강우유맥 남명학파의 본산이 되었으며
인조반정 등으로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유적지 경내에는 덕천서원과 함께
산천재(山天齋)·세심정(洗心亭)·조식묘 등이 있다.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하였는데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덕산 입구의 입덕문(入德門)을 지나면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덕천서원에 이른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고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산천재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김해,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었다.
그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를 몹시 사랑했다.
이 매화나무에 붙였던 그의 애정을 다음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40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의
그 맑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속에 지금도 스며 있는 듯 하다.
산천재의 정원의 끝 강쪽 언덕에는 남명매보다는 뒤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또 산천재의 바깥뜰에는 수형이 아름답고 크게 자란 활엽상록수인
가시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중산리탐방안내소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탐방안내소에는 지리산의 자연과 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과 영상물 그리고 체험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
지리산의 새로운 명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탐방을 준비하며'라는 주제로 마련된 1전시실에는
'국립공원 소개'를 비롯해 지리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리산 모형'과 '지리산 10경' 그리고
'반달가슴곰 박제' 등이 전시된다.
제2전시실은 '영원히 보존할 지리산'이라는 주제로 지리산에서
시식하는 '동물이야기', '식물이야기' 및 '구상나무 숲길체험',
'반달가슴곰 포토존'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3전시실은
지리산의 사계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
지리산 사계 영상실'로 운영된다.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김성수 소장은 "중산리 탐방안내소는
지리산을 직접 탐방하지 않고도 지리산에 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
이라고 강조하고 "일반 탐방객은 물론 학생들 교육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탐방안내소는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519-2번지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智異山-討伐展示館)은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는 역사 전시관이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인 중산관광단지 내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다. 산청군청이 총 사업비 16억 원을
투입해 2001년에 건립하여 개관했다
.[1] 2층 건물로 약 145평 규모이다.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토벌 작전과 관련된 실물 자료와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2] 실내전시관에는 유격대와
토벌대에 대한 역사적 사실, 총기류, 압수품, 사진 자료와
문학 작품, 영상물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전시관에는
복원된 유격대 아지트와 토벌대가 당시에 사용했던
중장비 무기, 조형 작품 등이 있다.
[3] 유격대원과
토벌대원이 손을 잡고 있는 조각품이 놓여있는 등
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전시관의 명칭에 '빨치산'을 넣을 것인지 '공비'라는
표현을 쓸 것인지를 놓고 설립 과정에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4] 산청군청은 전시관 건립과 함께 지리산 내원골 등지에
빨치산루트라는 관광코스도 개발하였는데,
남명기념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468
남명기념관은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선생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사업을 추진하여 2004년 8월에 개관하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이 있으며, 외부 공간에는
신도비, 남명석상, 여재실 등이 있다.
0 제1전시실
남명 선생이 실천하는 학문으로의 전환점이 된
서적들과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등 남명의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0 제2전시실
남명의 가르침을 따랐던 제자들을 주제로 한 전시실로
제자들의 유물과 미니어처 연출,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의 업적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0 제3전시실
남명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오늘날의 노력과 이에
대한 실천의지를 표현한 공간으로 사숙 및 문인의
유물과 사적의 전경모형을 볼 수 있다.
목면시배유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한 목면시배유지는
고려말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棉花)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붓대에 면화씨를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잘 몰라 한 그루만을 경우 살릴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 이전에는 명주,
모시, 삼베 등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고생을 하였으나
목면의 전래로 우리나라 의복 역사상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서민생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목면시배지(木棉始培地) 주변에는 지금도 조상의
얼을 되새기기 위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목면시배유지는 고려말 공민왕 때 '의류혁명'을 일으켰던
문익점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으로,
지금은 목화밭과 전시관, 나라에서 문익점 선생에게
하사한 부민관 등을 볼 수 있다. 목면시배유지를 본 후에는
현대 불교의 대표 선승 성철스님의 생가와 겁외사를
찾아보는 것도 주변 볼거리의 좋은 여정이 될 것이다.
방학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들러
목면시배유지의 정경을 감상하고 역사도 공부하며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 있는 체험학습을 즐겨보자.
정취암
경남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927-2 927-2
대성산정의 절벽에 자리한 정취암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정취암 탱화가 유명한 절이다.
기암절벽에 매달린 정취암은 옛 단성현(丹城縣)
북방40리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절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
하여 예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 6년에 동해에서 아미타불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비추니 한 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대사께서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淨趣寺)를 창건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에 중수하고 조선 효종 때에 소실되었다가
봉성당 치헌선사가 중건하면서 관음상을 조성하였다.
1987년 도영당은 원통보전공사를 완공하고 대웅전을
개칭하여 석가모니 본존불과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95년에 응진정에 16나한상과 탱화를
봉안하고 1996년 산신각을 중수하여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다.
이 탱화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위 끝에 서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면 천장 만장
높은 곳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는 시원함과 함께 적막과
고요 속에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든다
충익사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경역 : 23,600㎡(7,140평), 건물 9동, 조경수목 5,000여본
이곳은 임진왜란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홍의장군 곽재우(1552~1617)와 그 휘하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곽재우 장군은 명종 7년(1552)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하였는데 문무에 다같이 뛰어났으나, 관직 없이 초야에서 지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병이 침입하여 서울로 진격해오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 고 분연히 일어나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의 침공을 막았다.
장군은 홍의에 백마를 타고 휘하에 17명의 장수와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정암진, 기강, 현풍, 창녕, 화왕산성, 진주성 등의 전투에서 실로 신출귀몰하는 전략, 전술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백전백승함으로써 왜병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목사를 지냈고, 한성부 우윤, 함경도 관찰사를 일시 역임하였다. 장군은 사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장군의 추모행사는 1972년 이래로 매년 거행하며 1978년 이곳에 사당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