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는 한국인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알싸한 매운맛과 신맛, 그리고 발효에서 오는 복잡 미묘한 풍미는 없던 입맛도 살리는 매력이 있다. 오죽하면 ‘김치 없인 못살아’란 노래 가사까지 나왔을까. 백김치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아무래도 빨갛게 고춧가루를 뒤집어쓴 붉은 김치의 아성을 무너뜨기에는 다소 아쉽다.
김치에 들어간 고추는 본디 물 건너온 외래종이지만 오늘날 무엇보다 한국적인 재료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사람들은 외국에서 고추가 들어간 음식을 보면 고향 음식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이 나라 사람들도 고추를 먹나 보네’하며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유럽인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오래전부터 고추를 먹어왔다.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 두 나라는 신대륙에서 고추를 처음 들여와 키운 지역이자 서유럽에서 고추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했다고 여겼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약재와 관상용으로만 쓰이던 고추가 어느새 그들의 식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아 식탁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고추, 맵기로 결심하다
흔히 고추 하면 빨갛고 긴 고추를 떠올리는데 피망, 파프리카도 고추에 속한다. 멕시코의 칠리 Chili, 프랑스의 피망 Piment, 헝가리의 파프리카 Paprika, 미국의 레드페퍼 Redpepper는 모두 고추를 뜻하는 말이다. 전부 고추라고 부르지만 각 나라별로 선호되는 고추의 품종이 다르다. 대부분 말려서 빻아 조미료로 쓰기도 하고 볶거나 쪄 채소처럼 요리해 먹는다.
열대성 작물인 고추는 특히 헝가리에서 인기가 높으며 인도와 동남아, 그리고 원산지인 남미와 북아프리카 등에서도 많이 재배되고 또 소비되고 있다. 전 세계 생산량과 소비량만 따지면 고추는 후추의 20배가 넘는다.
전혀 맵지 않은 고추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매운맛을 빼놓고는 고추를 논할 수 없다. 어째서 고추는 매운맛을 갖게 됐을까. 매운맛은 고추에 들어있는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의 작용 때문이다.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캡사이신은 고추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무기다.
여느 생명체가 그러하듯 고추의 지상목표는 씨를 퍼뜨려 종을 보존하는 일이다. 식물은 동물처럼 움직이지 못하기에 씨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보통 열매를 가진 식물들은 스스로 동물의 먹이가 되어 씨를 퍼뜨린다. 우리가 식물의 열매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식물의 교묘한 전략 덕분이다. 이점에서 새와 같은 조류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존재다. 씨앗을 그대로 삼키고 배설할 뿐만 아니라 멀리까지 날아가 씨앗을 퍼뜨려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포유류들이다. 열매를 쪼아 삼켜먹는 조류와는 달리 포유류들은 어금니를 이용해 열매를 씹어먹는데 이렇게 되면 씨앗이 파괴된다. 고추 입장에서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추는 포유류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매운맛을 스스로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캡사이신의 정체다. 캡사이신은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는 조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반면 포유류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매운맛의 실상은 살아남기 위한 고추의 눈물겨운 분투인 것이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에 위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관.
고추, 뜻밖의 여정
고추가 유럽에 건너오게 된 건 스페인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이후다. 이 시기 유럽인들이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서쪽으로의 항해를 결심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향신료 때문이었다. 후추나 넛맥, 클로브 등 이국적인 풍미를 주는 향신료는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기호품이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 때부터 향신료는 인도에서 육로와 뱃길 등 다양한 루트로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리스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까지 유럽에서 향신료는 식재료와 약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그러던 중 15세기를 기점으로 지중해의 패권이 아랍 세력,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면서 향신료 무역로가 대부분 막히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서방세계에 대한 견제책으로 향신료 무역을 통제했고 오직 베네치아만이 향신료를 수입해 팔 수 있었다.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게 된 베네치아는 막대한 부를 벌어 들였다. 날이 갈수록 향신료 값이 치솟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서쪽으로의 탐험이었다. 중개상을 거치는 것보다 인도에서 직접 향신료를 가져오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선박 제조 및 항해기술의 발달과 장거리 항해를 가능케 한 의학의 발전 등도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는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인도를 향한 새로운 무역항로를 개척하는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한 콜럼버스는 후추를 손에 넣지 못했다. 대신 지금의 아이티 섬 인근에서 원주민들이 아히 Aji라고 부르는 고추를 발견했다. 후추의 매운맛과는 다르지만 독특한 풍미를 주는 고추는 비싼 후추를 대신할 만한 향신료로 유럽에 소개됐다. 하지만 고추는 고상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대신 생김새 탓에 오랫동안 귀족들의 관상용 식물로 자리했다.
그러던 중 영리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의 상인들에 의해 약재로써 효능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고추가 주는, 정확하게는 캡사이신 성분의 작용으로 인해 생기는 열이 몸의 차가운 성질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좋은 약재로 알려졌고 때로는 각성제로, 최음제로도 소개되면서 수요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일반 대중에게 고추는 후추의 대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열대성 작물인 고추는 기후가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은 남부 유럽에서 키우기에 적합했다. 이들 지역에서 고추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백김치가 붉은 김치로 바뀐 것과 같이 고추는 지역의 전통요리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고추사랑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고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이 때문에 고추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전통요리들이 많이 존재한다. 고추를 부르는 이름도 피미엔토(스페인), 피멘토(포르투갈)로 비슷하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고추 요리 중 하나는 파드론 고추 Pimiento de Padrón를 이용한 요리다. 짜리 몽땅한 피망같이 생긴 파드론 고추를 볶은 후 올리브유와 소금만 곁들이는 비교적 심플한 요리다. 고기나 생선 등 메인 요리에 곁들여 먹거나 그 자체로 술안주, 타파스로 먹기도 한다. 생긴 것도 쭈글쭈글해 마치 우리네 꽈리고추볶음 같아 보이는데 맛과 향도 닮았다.
스페인에선 고추를 야채처럼 통째로 요리에 쓰기도 하지만 말려서 곱게 간 분말 형태, 피멘톤 Pimentón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우리에게 파프리카 가루로도 알려진 피멘톤은 고추의 종류만큼 다양하다. 매운맛을 내는 피칸테 Picante와 단 맛이 나는 둘체 Dulce, 약간의 산미가 나는 아그리둘체 Agridulce, 훈제향이 진하게 배어있는 아후마도Ahumado 등으로 나뉘며 스페인 라 베라 la Vera 지역의 훈제 피멘톤 Pimentón de la Vera이 유명하다.
피멘톤은 요리의 맛을 살려주는 훌륭한 조미료다. 특히 갈리시아 지방이 자랑하는 문어요리 풀포 Pulpo Gallego에 빠질 수 없는 필수 재료이기도 하다. 푹 익힌 문어 위에 올리브 오일과 피멘톤, 그리고 소금을 뿌려줘야만 갈리시아식 풀포라 할 수 있다. 피멘톤 둘체를 뿌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취향에 따라 매운 가루를 뿌리기도 한다. 피멘톤 향, 그리고 진한 올리브 오일의 풍미가 곁들여져 부드럽게 씹히는 문어는 말 그대로 와인 도둑이 따로 없을 정도다. 집집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어를 삶기도 하지만 어떤 피멘톤을 쓰느냐에 따라 풀포의 풍미는 달라진다.
고춧가루로 만든 소시지, 초리조
피멘톤의 가장 훌륭한 용도는 뭐니 뭐니 해도 초리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초리조는 소시지의 일종이다. 만드는 과정에서 피멘톤 가루를 넣어 붉은빛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매콤한 향은 나지만 혀와 입안이 아파올 정도로 맵지는 않다. 적당히 매콤한 맛이 소시지의 풍미를 더 살려준다.
도대체 어떻게 소시지에 피멘톤을 넣을 생각을 했을까. 김치가 원래 소금과 마늘, 젓갈을 이용한 백김치의 형태였다가 고추가 전래된 후 붉은 김치로 재탄생한 이유와 같다. 소시지에 들어가는 소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재료가 바로 고추였기 때문이다. 이는 캡사이신 성분이 가진 항균작용 덕이다. 비싼 소금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피멘톤을 넣어 만든 초리조의 독특한 풍미는 머지않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 전통요리로 당당히 우뚝 서게 됐다. 궁핍이 오히려 다양성 면에서 풍요를 낳은 셈이다.
초리조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다. 그냥 썰어 와인 안주로 먹기도 하지만 각종 요리에 맛 내기 재료로도 사용한다. 전통적인 초리조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의 소시지는‘채워 넣는다’는 뜻을 가진 엔치두 Enchido라 불리는데 매콤한 초리조는 수많은 엔치두 중 하나다. 스페인의 소시지가 점차 사람들의 변하는 입맛에 맞춰 세련되고 정갈한 맛으로 수렴되고 있는 반면, 포르투갈은 다양한 형태의 전통 소시지들이 아직 살아남아있다. 돼지 간이나 혀 같은 내장과 특수부위를 갈아 넣은 소시지들은 소박한 시골의 맛 같은 것이 난다. 투박하지만 저마다 독특한 풍미를 내는 소시지를 쉽게 맛볼 수 있다는 것이 포르투갈의 매력이기도 하다.
포르투갈에서 맛 본 초리조 아 봄베이루 Chouriço à bombeiro는 재미있는 요리다. 돼지고기와 지방, 와인과 피멘톤, 마늘, 소금을 넣고 훈연 건조한 포르투갈의 초리조를 즉석에서 구워 먹는 포르투갈 전통요리다. 아싸 초리조 Assa Chouriço라 불리는 보트처럼 생긴 점토 그릴 안에 알코올이나 증류주를 넣고 칼집을 낸 초리조를 얹는다. 안에 있는 알코올에 불을 붙이면 위에 있던 초리조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지면서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먹는 재미 못지않게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