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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는 모든 신자에게 아주 힘든 일로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주 정상입니다. 솔직히 목사인 저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조차 전도에 대해 설명하는 중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고백했습니다. 아덴에서 전도를 실패한 적이 있었고, 항상 유대주의자들의 훼방과 핍박이 따랐으며, 이방인들은 복음을 자신들의 윤리와 철학에 따라 판단하여서 어리석다고 매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전도를 하면 그와 비슷한 반응을 접하는데다 무엇부터 어떻게 전해야 할지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두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자 전도세미나에도 참여하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여전히 힘듭니다. 배운 대로 전도해봤는데 세미나에서 배운 것과는 다르게 다양하게 반응하니까 당황하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영어로 “How are you?”라고 인사했는데 상대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니까 “I am fine thank you!”는 써먹지도 못하고 첫마디부터 말문이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상대하는 사람마다 또 그 처한 상황마다 일률적으로 통용되는 전도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은 전도뿐 아니라 신앙상의 모든 문제에 방법론적인 정답은 없습니다. 본인이 주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 동행하면서 깨달은 진리를 삶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을 터득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전도하는 방법을 몰라서 전도가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던 이미 전도 자체가 아주 힘들게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했던 여러 번의 실패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에선 좋은 방법보다 신자의 전도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가 더 중요하고 우선입니다. 전도가 힘들다고 여기는 까닭도 전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인식부터 고쳐야만 그나마 전도를 제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만 열거해보겠습니다.
전도이지 구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전도는 어디까지나 전도(傳道)이지 구원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가 알아듣게 전하는 것이며 구원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까지 받아내어야 전도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흔히 사영리(四靈理 - 네 가지 영적 원리) 전도법을 많이 권장하는데 마지막에 주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시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당장 운명하기 직전이라면 몰라도 단순히 그렇게 한다고 상대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진정한 회심을 할지는 크게 의심스럽습니다.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 후에는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 전도자 쪽에서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자기 할 바를 다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성령이 역사해 주신 결과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면서 심히 떨었다고 실토한 후에 곧바로 전도에 결실이 맺히는 것은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전도는 지혜로운 말로 전해야 하지만 그런 말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만 전한다는 것은 또 자기 교회로 꼭 인도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총동원주일, 전도왕 선발 등의 교회행사로 그런 오해가 생겼고 교인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전도의욕을 고취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교회의 교인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늘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지 단순히 하나님만 전해선 안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어 세상 만물과 인생 만사를 통치하시는 것만 믿게 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가르치고 세상 사람들조차 수긍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도를 전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신자 본인부터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대신 죽으신 은혜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교리에 수긍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전도자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천하의 죄인인데다 그 죄를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자신의 옛 자아를 꺼내놓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 받아야만 하는데 그 일은 바울이 말한 대로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영리 전도가 부족하다고 말씀드렸고 또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의 도만 온전히 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생존해 있었고 성령이 강력히 역사했습니다. 성경은 물론 십자가 구원교리조차 체계화 되지 않았어도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그분을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메시지만으로 전도가 가능했습니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복음을 아무리 잘 풀어서 설명해도 질문자님이 체험한 대로 전혀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체념 내지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체로 고난 중에 믿는다.
미국의 통계이긴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계기의 대부분(90% 정도-구체적인 수치는 기억 못하나 확실함)이 삶에서 큰 고난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정적인 파산, 가정의 파괴, 가족의 죽음, 인간관계의 깊은 상처 등으로 겪는 큰 아픔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원만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큰 문제인지라 절대자의 도움이 절실해졌던 것입니다. 저도 완전한 불신자 집안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출석하게 된 첫째 이유가 바로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고난이 아닌 이유로 예수 믿는 자는 겨우 10%인데 그 중에 대부분(85% 가량)이 어렸을 때에 교회주일학교에 다녔던 경험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이미 심겨져 있었기에 세상으로 잠시 외도했으나 결국은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럼 고난을 겪고 있거나 기독교에 이미 익숙한 자들 외에 순전히 스스로 구원받고 싶어서 교회에 출석한 자는 극소수(1-2%)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그 방안이 자연스레 도출됩니다. 우선 주일학교를 활성화시켜서 어린이들로 전도시키고 주일학교에서 십자가 복음의 기초를 잘 심어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른인데 전도 대상자를 두고 큰 고난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그런 자들을 우선적으로 찾아가서 섬겨야 합니다.
사방이 완전히 막혀 탈출구가 없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거나 최소한 그분에 대해 마음이 조금 열립니다. 처음으로 인생에서의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며 또 신자가 던지는 그런 류의 질문에도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인생이 무상해질 때에 과연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이 땅에서 왜 살아야 하며 어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을지 등을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곤경을 역이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도 공사역 중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주로 만나서 치유해주고 천국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이 절실히 또 시급히 필요한 사람을 먼저 찾아가서 그들의 필요부터 채워준 것입니다. 전도란 그래서 기독교교리를 전하는 것에 앞서서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것이 그 도움을 주는 신자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라는 점을 인식시켜주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처음부터 복음을 바로 대놓고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함께 짊어지든지,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들어주며 위로하든지, 심지어 그런 때는 같이 있어만 주어도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면 자연스레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럼 또 의외로 복음을 술술 잘 전할 수 있고 상대도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역사해 달라고 기도는 해야 합니다.
제자로 만들어라.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죄에서 구원하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전하는 신자부터 그렇게 구원 받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 죄인들과 전혀 다른 거룩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상대로 하여금 전도자가 예수를 믿어서 확연히 달라진 점들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 교리보다 자신의 간증을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단순히 간증만 전하고 그쳐선 안 됩니다. 기회가 닿으면 십자가 구원의 진리, 예컨대 사영리로 정리된 내용을 어쨌든 말로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 후로 어떻게 믿음을 유지 성장 시킬 수 있는지 등등 계속해서 가르칠 내용은 무궁무진합니다.
서두에서 복음을 전하면 전도의 끝이라고 했습니다. 구원까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한 번 말로 전한 것으로 전도를 끝내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합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한 자가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까지 계속 섬기고 말씀을 가르치고 나아가 적당한 교회로 인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마28:19,20)처럼 제자가 다른 제자를 키우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도자부터 십자가 복음에 대해 능통해야 하고 자신의 말로 정확히 진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누가 언제 복음에 대해 묻더라도 잘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전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겪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불신자들은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영원에 대해서 알고 싶고 구원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기독교 신자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복음에 대해서 먼저 물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자는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전도에 아주 중요한 측면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가 전도를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겠습니까? 신자가 신자답게 살지 않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답은 당연히 후자일 것이며 우리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 불신자가 물어올 때를 대비해서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스스로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합니다. 일단 무조건 믿어보라든지, 믿지 않으면 지옥 벌을 받을 각오를 하라든지, 논쟁적으로 자기 의견만 강요하는 것 등은 금기입니다. 상대의 궁금증을 제대로 해소시킬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모르거나 말이 막히면 다시 연구해서 토의해보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성령님만이 결실을 맺어주기에 신자는 그런 성령의 역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겸손히 전해야 합니다.
불신자가 하나님과 영원이나 구원에 대해서 먼저 질문해 오면 전도는 사실상 반 이상 이뤄진 것입니다. 물어올 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는 상기 말씀이 전도의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먼저 질문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길은 전도자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고 또 상대를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진심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전도란 그래서 기독교 교리를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로 오히려 의심 질문 비평 반발을 하게끔 인도하는 것입니다. 논쟁이 아니라 온유하게 진리를 전하는 것인데 사람마다 반응이 달라져도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해도 아무 반응이 없거나 아예 말을 끊는 자는 전도가 아주 힘들고 아직 때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적당한 때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도
베드로의 이 권면은 최근의 상황에서 더더욱 중요해졌는데 전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필요성도 대두되었습니다. 포스터모던 시대인지라 절대적 진리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 진리로 그치지 않고 자기가 진리를 정하고 자기 판단만이 선과 진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히 젊은 세대는 아무도 스스로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영적 인식이 없습니다. 일이십 년 전만 해도 당신은 죄인이라고 하면 대체로 수긍했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전도의 본질이었습니다. 사영리전도 법처럼 당신은 죄인이고 스스로 죄를 씻을 길이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고 말하면 전도가 그런대로 쉽게 이뤄졌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죄에서 구원받는 방법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최근 세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면 반발부터 합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구원 받을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낍니다. 그래서 이젠 전도하려면 절대자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다는 것부터 증명해야 할 판국이 되었습니다. 상대로 하여금 절대자와 자기와의 관계부터 맺고 싶다는 마음부터 들게 만들어야 합니다. 전도의 핵심인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변증적인 전도를 해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나아가 피조세계 전반에 대한 거대담론에 대해서 토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은 필수이며 그 외에 현세대의 사고 문화 종교 등은 물론 영적인 흐름까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성경적인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가치관 위에 세우고 그것을 풀어서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신본주의로 바꾸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할 수 있게끔 설득시켜야 합니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서두에서 강조한 대로 전도에선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고 담대하게 고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소극적 수동적 내성적인 사람의 기질과 성격은 적극적 능동적 외성적으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전도에서 가장 필요한 마음은 상대의 영혼을 정말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예수를 모르면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비참한 멸망이요 죽음이라는 점을 전도자부터 절감해야 합니다. 내가 만났고 알고 따르는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지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쳐야 합니다. 세상에서 재물 권력 명예 지성 건강 외모 가문 학벌 등등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가졌어도 예수가 없다면 너무나 불쌍하다는 심정이 저절로 들어야 합니다. 종교적 의무감에 따라 부득이 함으로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앞에서 전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특별히 변증적인 전도를 해야 한다니까 전도가 더 어렵게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예수님, 아니 바울 같은 심정을 가지면 그 방법은 부차적입니다. 진리와 진심은 언제나 힘이 있고 상대에게 그대로 통합니다. 상대를 향한 순전한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만 기도도 끊이지 않고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성령이 역사하여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담대히 전할 수 있는 마음도 생기게 해주며,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말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지혜까지 심어줍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도에 왕도는 없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상대의 심령이 너무나 불쌍한 마음이 있다면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진정한 사랑으로 신실하게 섬기는 일부터 하면 됩니다. 그럼 성령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고 그 상대에게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전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다 기회가 닿는 대로 예수 십자가의 도를 말로 풀어서 전해야 하며 상대가 묻는 질문에 잘 대답할 준비도 미리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자신이 부족하면 성경진리에 능통한 멘토를 두어야 합니다. 상대가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전도는 반 이상 이뤄진 것이므로 그런 분과 함께 만나도 됩니다. 상대로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해 흥미나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전도의 첫 걸음이자 본질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6985#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