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변당과 적룡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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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꽃 잔치를 한답시고 방방곡이 상춘인파로 미어지고 봄꽃이 피는 마을마다 축제분위기로 동네방네가 시끌벅적한데 북한은 또 무엇을 얻어내려는 획책으로 어깃장을 부리는지 몽니치고는 심히 지나치다. 핵실험이후 연일 쏟아내는 대남협박이 도를 넘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몰아붙이며 서해안 해안포가 모두 문을 열었고 한밤중인 새벽 1시30분에 최고사령부 작전회의를 긴급소집하여 미사일부대에 사격대기를 지시하고 전투태세로 돌입하는 등 시국이 심히 불안하여 사명대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남해고속도로 북창원 요금소를 나와서 북면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서 30번 도로를 따라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들녘은 봄보리가 파랗게 바닥을 깔았고 산기슭의 과수원에는 매화꽃이 활짝 피었고 한물이 지난 개나리도 빛깔 곱기는 그대로고 진달래도 산모롱이의 솔숲 그늘 사이사이마다 모닥모닥 앉아서 별난 이야기를 도란거리는데 가로수인 벚꽃나무도 서둘러서 거들고 나서니 사방천지가 만화방창이라 화향이 천지에 그윽하다.
표충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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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본포다리를 건너서 2~3Km 남짓한 거리의 도로 길섶에 “남휘 정선공주 묘역”이라는 문화유적의 황토색 안내판이 차를 세웠다. 빤하게 뚫린 들길 건너편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널따랗게 잔디를 깔고 봄 햇살을 한가득 안은 묘역이 크기로 봐서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구중심처의 궁궐왕녀인 공주의 묘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무엄하게도 생각 없이 차를 몰고 들어갔다. 묘역 앞 갈림길에 단청이 찬란한 비각이 길을 막듯이 서있어 비문을 살펴보니 “의산군소간공구당남선생신도비”라 쓰였고 “방손 부총리 덕우 근서” 라고 말미를 맺었으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셨던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이르는 것이었다. 비각 뒤로의 산기슭에 널따랗게 자리한 묘역은 문인석 두 쌍과 석등 한 쌍에 사자상 한 쌍을 앞세우고 커다란 상석을 나란하게 맞대어 사면으로 돌을 두른 커다란 쌍분 옆으로 “왕녀정선공주이씨지묘”와 세월의 때가 묻어 마모도 심한데다 돌이끼가 피어서 판독하기가 어려운데 남은 글자는 “소간남휘지묘”라는 작달막한 석비가 긴긴 역사 속에서 가냘픈 숨결의 작은 일렁거림이 가슴속에 여울진다. 양위분이 남이장군의 조부모이시고 따님은 사임당신씨의 증조모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기서도 잠시 남이장군과 유자광을 생각해보면 인생사 외길 같은 내일로 이어지는 오늘의 길이 보인다. 그러나 할머니의 무릎도 멀어져 갔고 할아버지의 사랑방도 사라진지 오래라서 호랑이 담배 먹던 옛이야기마저 잊혀져가는 오늘의 실상이 유구한 역사 앞에 송구스러울 뿐이다. 역사는 진실 앞에 솔직하지 못해도 미래는 역사를 되새기며 성장한다. 의령남씨 7세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손자인 보국숭록대부의산군 남휘와 조선 태종의 4녀이자 세종의 누이동생인 정선공주의 내외분인 양위분께 예를 올리고 나니 아득한 역사 속의 후미진 골짜기에 괴나리봇짐 멘 외로운 길손임을 실감케 한다.
의령 남씨 묘소와 태종 네째공주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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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을 재촉하여 30번 도로를 따라 십 여분 남짓 북진을 하자 무안천과 맞닿은 모로삼거리에 “어변당”이라는 문화재안내판이 잠시 들렸다가 가란다. 길손이야 반겨주는 안내판이 고마워서 우회전을 했더니 이내 들판 건너편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 왔다. 자그마한 주차장 앞의 안내판을 마주하자 박곤장군은 태종11년에서부터 세종말년까지 무신으로서 벼슬을 두루 거치며 변방 수비와 명나라와의 외교 등 보국애민의 충절임을 뒤늦게 알게 됨이 부끄러웠다. 예도를 상징하는 삼강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충효사와 우로는 향토사료관이 그리고 좌로는 적룡지의 작의 연못을 앞에 둔 어변당이 효심지극한 장군의 고결하고 검소함을 일러주는 사랑채이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잇문인 유제문을 들어서면 장군의 덕행을 기리는 덕연서원이 근엄하게 자리 잡아 어변당의 전경은 작은 궁궐이 내려앉은 듯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고기가 붉은 용으로 변화여 승천을 하였다는 어변당과 적룡지 앞의 장군께서 심었다는 수령500년의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표충비를 찾아 왔던 길을 되돌아 2~3Km 남짓한 거리의 무안면 소재지에 닿으니까 간선도로 옆으로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비각 안내소가 말쑥한 차림으로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충비의 정문격인 맞배지붕의 삼비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잔디마당의 정면으로 삼단축대위의 솟을삼문이 고색창연한 옛 멋을 풍기는데 왼쪽으로 단청이 산뜻한 팔작지붕의 표충각이 화강암 축대위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선 솟을삼문을 들어서니 마주하는 비각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표충비각”이라 쓰인 하얀 글씨의 편액이 비각 건물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게 커다랗게 걸려있다. 홍살을 두른 비각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함장배례하고 다가섰다. 받침돌과 머릿돌은 하얀 화강암인데 비신은 새까만 오석으로 촘촘히 음각된 비문은 날렵한 세필인데 전면은 “송운대사비명”으로 사명당의 행적을, 그리고 후면은 대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비”라 새겨 대사의 공덕과 행적을 새겼다는 비석의 크기가 장중하여 두 분 대사의 팔척장신을 마주한 듯 위엄이 넘쳐난다. 나라에 커다란 변고가 있을 때마다 빗돌에서 땀이 흐른다니 작금의 북한 동정이 사뭇 염려되어 혹시나 땀을 흘리지는 않을까하고 사면을 둘러보았으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를 않았다. 비각 옆으로의 안내판에는 땀을 흘린 연월일시와 그 량을 빼곡히 적어두었다. 이럴 땐 야박하게 과학만을 말하지 말고 그저 영험한 신비로 남겨서 호국보민의 사명대사의 유훈으로 역사의 대물림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대사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취임 첫 부활절 메시지에 한반도의 평화를 염려하셨습니다. 부디 국태민안을 길이길이 영유케 보우하여 주옵소서! 모두의 바람을 대신 빌고 돌아서니 매향이 그윽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데 뜰 앞의 노거수인 향나무는 세월의 애환을 얼기설기 엮어서 똬리를 틀은 듯이 커다랗게 원을 만들어 하늘을 받히고 그늘을 지어서 고달픈 중생의 심신을 쉬게 한다.
담장너머로 홍제사 본당인 설법보전의 추녀 끝이 하늘을 치받고 날아가듯 날렵하여, 담장을 사이에 둔 작은 통문을 들어서자 화려한 단청의 빛깔이 곱고도 현란한데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이란 하얀 주련이 주홍기둥을 등진채로 길손을 반기며 무언으로 설한다. 법문의 깊이도 불도의 높이도 길손 같은 중생이 어찌 알랴만 그저 무량무상하리라는 짐작만을 하고 삼비문 뜰 안의 표충각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면으로 중앙에 사명당 유정 송운대사의 영정이, 우측엔 휴정 서산대사의 영정이, 그리고 좌측엔 기허 영규대사의 영정이 배향돼 있어 임진 정유 왜란에 호국의 일념으로 행장에 걸맞잖게 창검을 휘두르며 가사장삼자락에 왜적의 피를 묻힌 구국의 의승장께 헌향삼배의 예를 올리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독도가 보이고 연평도가 보이고 장산곶이 보였다. 천안함 유족들의 오열하는 통곡소리가 검푸른 파도에 뒤범벅이 되어 귀를 울린다. 호국보민을 위해 무엇을 했냐고 퉁방울 같은 눈을 부라린 금강역사가 번득거렸다. 온갖 탱화가 펄럭거리고 출렁거리는데 가냘픈 향냄새가 짙어진 한참만에야 온갖 상념을 털고 눈을 떴다. 그저 오늘을 있게 한 고마움에 감사를 드리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억제했던 감회가 요동을 쳤다. 표충각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정면의 세분 대사의 영정 측면으로 고 박정희대통령 내외분의 존영도 커다랗게 모셔져 있어, 예상 밖이라서 멈칫하고 의아해 했었는데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지극히 조용한 표정으로 길손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다. 내게는 참으로 힘겨웠던 지난날이었건만 향을 사르고 예를 올렸다. ‘대통령이 되신 영애를 굽어 살펴 주옵소서.’ 모두를 위한 솔직한 기도였다. 바람이 살며시 문을 닫았던 모양이다. 가만히 문을 열고 내려서려는데 우렁찬 법고소리가 우레같이 천지를 진동했다. /지역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