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광덕사 회주 혜인 스님
개원을 기념해 ‘금강경 독송 100일 기도 및
10인 고승 초청 법회’를 진행하고 있는
제주시 오등선원(주지 제용 스님)은 지난 8일 6번째 법좌로
서귀포시 약천사․ 단양 광덕사 회주 혜인 스님을 초청,
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혜인 스님은
‘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을 주제로
법문을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저마다 품고 있는 여의주 찾기에 게을리 말아야”
스님과 불자들은 8만 4000가지 경전을 각자의 방편에 따라 수행합니다.
수행자가 추구하는 경전에 따라 수행방편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
저는 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수많은 공덕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8만 4000가지 경전 가운데
저는 ‘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 공덕이 이 우주를 칠보(七寶)로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적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한 후 15년 동안 참으로 가난한 수행자였습니다.
대구 보현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가려면 차비가 없어
남의 사찰 마당을 쓸어 주고 품삯을 받아 가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원도 원주에서 강릉으로 가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원주-강릉간 버스요금이 530원이었는데
수중에는 130원 밖에 없었습니다. 버스기사에게 간청했지만
130원 어치만 태워주고 도중에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차비가 없어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하루 100리를 15일 동안 걸어가는데 고무신 밑창에
엄지손가락이 통과할 정도로 구멍이 났습니다.
그 고무신을 꿰매고 다니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제가 부처님 같이 설산 수행은 아니했지만
그 아래 정도의 고행은 해 보았다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제가 지금은 비록 법문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외국까지 법문 하러 다니지만
그 당시는 대중 앞에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습니다.
제가 조천읍 양진사를 창건했는데 낙성식 날 여러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법문도 아닌 주지 인사말을 해야 하는데 며칠 전부터 너무 떨렸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눈을 뜨면
“원근각처에서 많이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을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낙성식 당일 날 어찌나 떨리던지 대중은 보이지 조차 않고,
‘원근각처’ 8번이나 말했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 쉼 없이 염송하면
부처님은 우리 곁에서 가피력 내려주십니다”
그 후에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마음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전생에 몸과 마음이 한량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 죄를 없애고 모든 마음을 뜻대로 성취하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관세음보살을 명심해서 부르라.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생각하고 공경 예배하는 자는
물에 빠져죽지 아니하며, 불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아니하며,
또한 복이 없는 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복을 얻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낱낱이 성취하게 하느니라.’
저는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읽은 후 늘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걸을 때나 해인사에서 하루 5000배를 할 때 숨이 목까지 차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시 잊지 않고 불렀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마음을 어찌나 잘 아시는지
어린아이가 울면 어머니가 그 뜻을 다 헤아리듯이
중생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약천사 창건 불사 역시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만병통치약과 같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절에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부르는 등 일상생활화 해야 합니다.
고성(高聲)염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마음속에서 부르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우리 곁에서 가피력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경기도에 무학대사가 상주했던 천하 명당의 자리에
‘회향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 아랫마을에 사는 노부부는
늦은 나이에 딸을 보았는데 절세미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노부부는 스님께
“어떻게 하면 좋은 곳에 시집을 보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많이 부르십시오.
그러면 좋은 곳을 넘어 왕비까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노부부는 스님의 말에 따라 관세음보살 10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노부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관세음보살 기도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절을 찾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1년 동안 정성껏 기도를 올렸지만
관세음보살님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노부부가 기도하는 동안
이 마을에 사는 품팔이 총각이 딸을 보고 반했습니다.
선녀 같은 딸을 본 총각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노
부부의 집을 기웃거리는데
노부부가 이른 아침마다 절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궁금해 하던 총각은 관세음보살님 뒤에 가서
노부부의 사정을 엿듣게 됐고, 총각은 꾀를 내게 됩니다.
1000일 기도 회향을 앞둔 3일째 되던 날 총각은
관세음보살처럼 흉내를 내며 노부부에게
“너희 딸을 왕비를 만들고 싶다고 그랬지.
왕비로 만들고 싶으면 지금은 비록 품팔이를 하면서 살고 있지만
동네 총각에게 딸을 시집보내라.
그러면 반드시 너희 딸은 왕비가 될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노부부는 품팔이 총각을 사위를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관세음보살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총각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노부부는 총각에게 사위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총각은 한 수 더 뛰어 재물까지 줘야 사위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노부부는 어쩔 수 없이 재물까지 주고 딸을 총각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총각은 들뜬 기분에 콧노래를 부르며 딸과 함께 고향인 문경으로 향했습니다.
문경으로 가던 중 지방순시에 나선 임금 행렬과 마주치게 됐습니다.
임금이 멀리서 재물을 가득 싣고 가는 총각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도적일지 모르니 가서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병졸들이 좇아가자 총각은 지레 겁을 먹어 도망쳐 버렸고,
남아 있던 노부부의 딸을 임금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임금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관세음보살이 왕비의 인연까지 만들어 주었구나”하면서
노부부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됩니다.
“우리 중생들 역시 부처의 씨앗 갖고 있지만
그 마음 있는 곳 몰라 부처가 되지 못할 뿐”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무(南無)’라는 말은 ‘귀의’를,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한량없는 수명을 가진 부처님을 말합니다.
몸이라는 것은 100년도 안 돼 썩어 없어지지만
법문을 들은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썩지도,
죽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미타’입니다.
불교는 ‘내 마음 주인공’ 찾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부처님이 되셨고,
우리 중생들 역시 부처의 씨앗을 갖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지 못할 뿐입니다.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일 뿐
부처님과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것은 똑 같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친구 몰래
여의주를 친구의 옷 속에 집어넣고 갔습니다.
친구는 여의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안주머니까지 잘 꿰매 주었습니다.
거지처럼 살았던 친구는 죽을 즈음에
“왜 여의주를 준다고 하면서 아직까지 주지 않느냐”고 친구에게 다그쳤습니다.
이에 친구는 “나는 너에게 일찍이 주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안주머니에 있던 여의주를 꺼내 친구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육체라는 옷 속에 여의주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번쩍거리는 본래의 마음, 부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의주를 다른 말로 하면 ‘아미타’입니다.
중생들은 여의주를 찾지 못할지언정 부르기만 해도 공덕이 옵니다.
옷 속에 있는 여의주(본래 마음)를 찾는 행동을 해야 만
언젠가는 ‘아미타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나옹선사가 아미타불에 대해 읊은 게송입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尾陀佛栽何房)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幕忘)
염도염궁무념처(念度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불 어느 곳에 계신가 / 마음 가운데 두고 잡아두고 간절히 잊지 말자 /
생각이 다하여 무념체에 이르게 되면 / 육문에서 항상 자금광이 빛났음을 알리라.’
불자들께서는 이것을 명심하여 자고 일어나 잠잘 때까지
마음속에 늘 관세음보살님과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모든 고통을 구해내고 어려움을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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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 스님은
1943년 남 제주에서 출생한 혜인 스님은
15살 때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62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동화사 금당선원 등지에서 10안거를 성만했으며,
1970~1971년 해인사 장경각에서 100만배 기도를 회향했다.
제주 약천사를 중창해 제주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 매김 시켰고,
현재 단양 광덕사에서 64만평 규모의 세계일화도량
건립불사를 진행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큰 원력과 강한 추진력을 가진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조계종 계단위원과 약천사․ 충북 단양 광덕사 회주를 맡고 있다.
2009. 2. 18.
제주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