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평소대로라면 염창동 나이아가라 호텔을 지나 우회전하여
안양천길로 들어서야 했지만 오늘은 정반대다.
나이아가라 호텔을 끼고 돌아 가양대교 방면으로 핸들을 틀었다.
회사가 아닌 곧장 개성공단으로 가기 위해서다.
자유로를 시원하게 내달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 방면으로
접어들자, 검문소 철책 바리케이트가 막아선다.
이곳에서 함께 출경키로 한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어
도로 한 켠에 정차한 채 검문소를 통과하는 차량들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업무상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승용차들 사이로 생산에 필요한
원부자재 적재차량들도 보였다.
지인과 만나 검문소를 통과해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닿았다.
내 차는 주차장에 세워 두고 출입경이 등록된 지인의 차량에 동승해
출경키로 했다. 주차장엔 낯익은 방송사와 신문사 차량들이 줄지어
주차해 있고 출입사무소 로비엔 방송사 촬영장비들이
포토라인을 따라 널브러져 있다.
그제서야 눈치챘다. 여야의원 8명이 현정부 들어 처음 오늘 아침
개성공단을 방문한다는 뉴스를 어제 접했었다.
몇 분 앞서 모두 출경 한 모양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왜 하필 오늘인가.
입주기업 법인장들이 이들을 맞느라 시간을 쪼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입경시간도 정해진 터라 시간내 몇몇 기업의 생산현장을
제대로 돌아볼 수나 있을런지 걱정이 앞선다.
2005년 방문 이래 7년만의 출경이라 출입사무소에 들러 미리 신청해
놓은
방문증명서와 초청장을 찾아 출경수속을 마친뒤 휴대전화는
개성공단 입주기업 전용 사물함에 넣어놓고 차량에 동승했다.
입북 대기 중인 차량 운전자들은 차에서 내려 등록된
번호판(림0000시)으로 차량 넘버를 가리고 붉은 삼각 깃발을
매단 채 출발시간을 기다린다.
정해진 출경시간이 되자, 국군 안내지프가 선두에서 출발했다.
모든 차량이 익숙하게 따른다. 별도 안내멘트도 없다.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듯 모두들 반사적으로 척척 알아서 움직인다.
7년만에 다시 들어가는 나의 눈만 두리번거릴뿐.
북으로 난 비무장지대 도로가엔 채 녹지않는 눈이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지만 안내차량의 속도에 맞춰 이동하다보니 빙판길이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
앞서가던 안내지프가 유턴하자, 그 자리에 인민군 지프가 바톤을
이어받아 고빼를 닮은 긴 차량을 매달고서 천천히 북으로 안내했다.
헐벗은 산자락을 망연히 바라보는 사이 북측 CIQ에 도착했다.
차량은 운전자와 함께 정렬해 있는 상태로 세관원 검색을 받는다.
이들은 뒤트렁크도 열어보고 차 내부 수납공간도 꼼꼼하게 살핀 다음,
통행증에 확인도장을 콱 박아 준다.
그렇게 모든 차량의 검색이 끝날때까지 출발선에서 대기한다.
동승자는 차에서 내려 실내에서 수속을 밟아야 하기에
CIQ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검색대를 통과한 손가방을 세관원이 다시 열어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꺼내보더니 "볼일 보고 나갈 때 한번 열어보자"며 미소짓는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모습이 아니다.
수시로 드나들어 낯을 익힌 남측 사람들과는 환한 표정으로 곧잘
농담도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면서 눈 맞추는 것조차 회피했던
초창기와는 사뭇 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CIQ를 빠져나와 채 10분도 안걸려 개성공단에 들어섰다.
제법 공단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건물 외관은 서울의 G밸리
한 구역을 옮겨다 놓은듯 하다.
공단도로의 신호등 체계도 가로등도 심지어 보도블록까지
낯설지 않아 여기가 정말 북한이긴 한가 싶을 정도다.
근무시간이라 도로는 텅 비어 있는데도 제복을 갖춰 입은
교통안전원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서 간간이 오가는 차량에
눈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선 깜빡이를 먼저 켜도 벌금,
늦게 켜도 벌금을 물린다니 딱 '이현령 비현령'이다.
의류를 생산하는 M사 사무실을 노크했다. 사무실은 분주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페이퍼 웍에 여념이 없는 두 명,
봉제반장을 불러 원단 스와치를 놓고 설명하는 한 명,
그리고 환한 표정으로 목례를 건네며 커피를 끓여 내 온 한 명..
모두 사무실에 근무하는 북측 여직원이라고 했다.
머릿속에 떠올리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표정들이 서울 여느 사무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작업현장을 둘러봤다. 추운 날씨인데도 생산열기가 넘쳐나고 있는
작업장은 기운찬 재봉기음으로 가득했다.
건성으로 일한다는 건 이젠 터무니없는 얘기인 것 같다.
작업물을 매만지는 손길이 민첩해 보였고 라인반장이 작성해 놓은
생산기록도 꼼꼼하고 치밀했다.
생산라인에서 반장, 조장들이 수시로 생산공정을 설명하고
생산효율을 높이자는 슬로건을 내건 모습에 적이 놀랐다.
서울에서 온 기기 A/S맨들도, 부품을 싣고 온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원단창고 한켠에 가득 쌓인 초코파이 상자도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초코파이는 근무의욕을 높이고 사기진작에
큰 도움을 주는 귀한 간식으로 통한다.
이렇듯 남북측의 정치적 경색과는 아랑곳 없이 더디지만 개성공단은
변해가고 있었다.
같은 날 이곳에 온 여야 국회의원들은 입주기업 관계자들로부터
애로사항을 들었다.
그리고 5일뒤 개성공단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내용인 즉, 그동안은 개성공단 공장에서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는
정도의 설비 반출만 승인했으나 앞으로는 생산활동에 필요한
추가 설비 반출이 가능하게 된 것과 창고 개축 등
공장 일부분에 대한 대체 건축은 5·24조치 내에서
탄력적으로 조치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북측과 협의를 필요로 하는 핵심 현안인 북측 근로자
공급 문제와 기숙사 건설, 3통(통행, 통관, 통신) 해결 등에
대해서는 북측과 포괄적으로 합의할 용의가 있다는 선에
머물러 여전히 답보상태다.
몇몇 봉제입주기업을 둘러보고 돌아나오며 올려다 본
개성의 하늘은 유난히 청명했다.
2004년 말부터 가동된 개성공단은 그간 남북관계에 따라
안개도 끼고 바람도 불고 진눈깨비도 흩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북측 CIQ를 벗어나면서 조금 전 생산현장에서 만난 북측근로자들의
손매와 눈썰미를 떠올렸다.
그들에게서 개성공단의 희망을 걸어본다.
첫댓글 평화통일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