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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우아아아!”
“….”
“뭐야! 속았어! 모든 일을 내게 떠밀다니 이럴 수는 없어!”
여인천궁의 모든 재화를 다루고 벌어들이는 금당의 당주 금선자 하화리는 10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과 거칠고 험한 북지성의 산길을 걷느라 고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라혼 상공의 방법이란 사람들에게 ‘머물 곳이 있다. 그곳까지 오면 집과 호구지책을 마련해주겠다’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정말 인정사정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각 요소요소마다 무료 급식소를 열고 밀떡을 빚어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근 10만에 이르는 배를 채워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막대한 곡식이 그들의 입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는데 올해는 농사가 흉년이 아닌 평년작이었지만 많은 세력이 곡식을 군량으로 사재기하여 곡식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화리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곡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는 길목 요소요소까지 그것을 옮기는 일도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하 당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신 거예요?”
“소궁주, 이건 너무하잖아요.”
“뭐가요?”
“상공께서 책임지신다고 장담했는데, 그게 저들을 황무지로 내몬 것이라니….”
설화는 하화리의 푸념에 먹을 것을 얻어가는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저들 중 절반 이상은 장동의 피난민이 아닌 북지성의 유리걸식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희망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저들에게 약속한 것은 머물 곳과 일거리가 전부예요. 저는 아직 제게 모든 것을 맡긴 사람들까지 책임질 힘이 없으니까요.”
“소궁주?”
“….”
“그럼 앞으로는 그 힘이 생길 것이란 말인가요?”
설화는 금선자 하화리의 물음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석양이 지고 하화리가 준비한 양식이 다 떨어질 때쯤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떨어져 내려왔다.
“소궁주님!”
“소매?”
매 소녀 응소매(鷹少梅)였다. 응소매는 가쁜 숨을 내쉬며 설화 소궁주에 다가와 가까스로 한마디를 전할 수 있었다.
“헥헥헥… 소궁주님, 흑막에서 웅랑교가 거병해서 제평을 불태웠대요.”
“그래?”
“뭐야? 그 웅랑교가 거병했단 말이야?”
설화는 응소매의 말에 ‘그런 일이 있구나’ 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천하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대상인(大商人)인 하화리는 놀라 되물었다.
“소매, 그게 무슨 소리니? 웅랑교가 거병했는데 제평은 왜 불태워?”
“아이 참, 그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다만 지금 무산곡에 동맹을 청하는 웅랑교의 고수가 와 있다고요. 그래서 궁주님이 어서 빨리 회궁하시래요!”
“나를?”
“예.”
“소궁주, 아무래도 묘올산성에 틀어박힌 군사들의 힘을 빌리고 싶은 모양이에요. 예로부터 척박한 흑막에서 일어선 세력은 하나같이 강군이었지만 물자가 풍부하지 못한 탓에 자연 소멸하기 일쑤였어요. 흑막에서 일어난 세력이 중주에 있던 나라와의 싸움에서 전투는 항상 이겼지만 전쟁은 이긴 적이 없거든요.”
“전투는 맹장이 이끄는 강병이 있는 군대가 이기지만, 전쟁은 창고가 든든한 군대가 이기는 이치 말이죠!”
“그래요. 그런 그들에게 흑막과 중원을 잇는 북지성의 대종도(大縱道)가 정립천하를 외치는 무리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소궁주님, 금 당주님. 궁주님의 엄명이라고요! 이렇게 시간을 끌 일이 아니잖아요.”
응소매는 웅랑교의 사신으로 온 고수의 살기 넘치는 기세에 질린 나머지 그녀가 판단하기에 여인천궁 제일 고수인 설화가 어서 빨리 궁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들은 이미 여인천궁이 자리잡고 있는 무산곡(巫算谷)으로 진입할 때 상당한 신위를 보이며 여인천궁의 여고수들을 너무도 간단히 제압했다. 자존심 때문에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웅랑교에서 보내온 고수는 사실상 안방에 무단으로 쳐들어온 무뢰지배(無賴之輩)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웅랑교와 우리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잖아. 그런데 용케 궁 안으로 들였네? 궁주님에게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건가?”
“아니에요! 그들은 그냥 들어왔다고요. 토연이하고 미초하고 중상을 입었는데….”
“뭐야? 그럼 사신이 아니라 침입자잖아!”
“하 당주 언니는 이곳을 부탁해요. 소매, 가자!”
“아니….”
―휘익~!
“나도 같이 가야….”
금선자 하화리는 눈 깜짝할 새에 점으로 변한 설화의 무시무시한 경공 조예에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중얼거렸다.
“우리 궁의 옥녀신법이 저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난 내가 여인천궁 제일 경공인 줄 알았는데….”
***
웅랑교의 장로(長老) 천웅흥조(千熊興爪) 웅량흘(熊良屹)은 북지성에 거점을 마련하고 웅랑교의 남하를 위해 오래전부터 북지성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최근 북지 무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여인천궁을 심혈을 기울여 주시했다. 웅량흘이 판단하기에 여인천궁의 힘은 확실히 천하를 울릴 만했으나 웅랑교에는 한참 못 미쳤다. 웅량흘은 거친 흑막의 사내였고 흑막에선 약자가 강자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그러니 ‘약자’인 여인천궁은 바로 웅랑천교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다.
“궁주, 약속한 하루가 지났소. 이제 확답을 주시오. 친구가 되겠소, 적이 되겠소.”
“오호호호호호, 곰이 미련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진정 그렇군요. 전 이미 확답을 드렸습니다. 웅랑교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고….”
웅량흘은 미간 사이에 <Y> 모양의 굵은 핏대를 세우며가 서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확실히 처음부터 여인천궁주 섬섬옥수 상유란의 뜻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웅량흘이 곰인 것을 빗대 ‘미련한 곰’ 운운했으니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내가 그대를 궁에 머물게 한 것은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묘올산성의 군사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군사들은 우리 소궁주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조정의 일에 관계를 맺고 싶지 않군요.”
“….”
상유란의 말은 웅량흘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태자가 황제의 후계자이기는 하지만 황제에겐 신하에 불과하듯 무림의 문파나 방파에서도 문중의 수장 밑으론 모두 문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여인천궁의 소궁주 천상천화가 마치 궁주라도 됐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천궁 장동에서 조정을 돕는 무림맹의 한 축을 이루었고 지금은 비록 이름만 남은 무림맹이나 사실상 천상천화가 이끌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실제로 일을 벌이고 움직인 여인천궁 소궁주 천상천화가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여인천궁주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천상천화라 해도 그녀는 여인천궁의 소궁주였고 바로 웅량흘과 대면하는 섬섬옥수 상유란의 제자였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법도에 따라 상유란이 내린 마음의 결정을 제자이면서 여인천궁의 궁도(宮徒)인 천상천화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웅량흘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클클클클, 뭐 좋소. 강호 무림은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곳. 말로 해서 안 되니 힘을 쓸 수밖에….”
“감히!”
―크르르르르르….
웅량흘의 한마디가 여인천궁의 정청(政廳)에 떨어지자 그의 뒤에 있던 일곱 명의 웅랑교 제자들이 두 명의 웅인(熊人)과 다섯 명의 낭인(狼人)으로 화신(化身)하며 진득한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흥,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하는군. 검녀들은 이십팔로옥녀검진을 펼쳐라!”
이제껏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며 웅랑교 장로라는 작자의 방자한 작태를 지켜보던 검선자 주묘연은 궁주의 명이 있기도 전에 여인천궁 최고의 합격진인 이십팔로옥녀검진(二十八路玉女劍陣)을 발동시켰다.
“클클클클, 이따위 어설프기 그지없는 검진으로는 본교의 칠현무진(七玄武陣)를 이기지 못한다.”
“흥, 노망난 우둔한 늙은 곰 한 마리 잡기엔 충분하다. 그리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묘연아!”
“궁주.”
상유란은 폭주하려는 검선자 주묘연을 조용히 불러 말리고 나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웅량흘에게 말했다.
“웅량흘 장로, 본 궁주가 곡의 입구에서 소란을 피운 그대를 궁으로 들인 것은 그대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 궁주가 저어한 것은 웅랑교와 본궁은 그간 내왕이 없었고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강호 무림이라 하나 서로 원수질 일을 만들 필요가 없기에 그런 겁니다. 하지만 계속 안하무인처럼 행동한다면 그대들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흥!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상유란은 웅랑교 장로 웅례흘의 반문에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이대로 물러가겠다면 그냥 보내주겠으나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웅랑교와 여인천궁은 한 하늘을 지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이가 될 것이다.”
“큭큭큭큭, 그럴 만한 힘이 있다면 한번 해보시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이십팔로옥녀검진을 펼친 검녀들도, 칠현무진을 펼친 웅랑교의 교도들도 먼저 손을 쓰지 못했다. 우습게도 일이 끝까지 가버리자 웅량흘의 눈에 여인천궁의 만만치 않은 저력이 보인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엔 여인천궁의 최고수들인 장로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허,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계집들의 포위를 뚫기는 쉽지 않을 것인데….’
여인천궁주 상유란은 이미 최후 통첩을 했고, 공은 웅량흘에게 넘어왔지만 결론은 맞서 싸우다 죽느냐, 적당히 힘쓰다 여인천궁을 빠져나가느냐, 아니면 일단 그냥 물러서느냐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웅랑천하(熊狼天下)를 위해 거병한 웅랑교가 기름진 남주(南州)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흑막에서 일어난 세력은 흑막을 북막(北幕)이라 하며 중원십일주 지역을 남주라 불렀다. 북지성의 대종도를 장악한 정립천하의 무리와 천상천화가 이끄는 세력이 지금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지만 강대한 웅랑천교의 용사들이 남하하면 손을 잡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대종도는 도처에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막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보아도 지금은 물러나는 것이 나았지만 웅량흘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는 성품하고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일촉즉발(一觸卽發). 숨 막히는 대치가 계속 이어지자 무거운 살기는 계속 장내를 짓눌렀다.
‘참, 답답하네. 저러니 곰이 미련하다는 소릴 듣지, 쓸데없는 고집으로 대세를 그르치려 하다니…. 하긴 우리 백록파의 입장에선 웅랑교와 여인천궁이 반목하는 것이 이익이지만….”
‘장로님, 이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녜요?’
‘아서라, 웅랑교하고 본 파하고 원수질 일 있냐? 그리고 저 고집탱이 늙은 곰도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시비가 붙으면 저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예?’
간판만 남은 북지 무림맹이지만 그 이름을 짊어진 존재가 여인천궁이 되어 무림맹에 속한 무림 문파 중 가장 세력이 온전한 백록파는 여인천궁과 더불어 무림맹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품었다. 비록 가주가 비명에 가는 바람에 북지박가와 무산초가가 빠졌지만 백록파와 여인천궁이 손을 잡으면 무림맹을 다시 꾸미는 일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게다가 천상천화에게 구명된 무림 고수들이 은혜를 갚고 협행(俠行)을 하는 차원에서 천상천화를 도와 장동의 피난민들을 북지성에 창궐하는 산적이나 화적들에게서 보호해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장동에 무림맹이 만들어졌을 때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듯이 조정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들어 움직이지 않던 기인이사와 무림 명숙들이 대거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니 무림맹의 주축이 바뀌었을 뿐 그 명맥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북지 무림맹주나 다름없는 천상천화가 속한 여인천궁에 백록파의 장로 오진자(晤進子)와 만인객잔의 천축대협(天軸大俠)이란 별호를 얻은 금동보(金銅寶)가 금남(禁男)의 장소인 여인천궁 궁내에 머물 수 있었다.
‘에휴~! 어설픈 고수에게 말을 하지 말아야지. 본래 음유한 공력과 양강한 공력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 형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그 어설픈 고수라는 말은 좀 빼고 하면 안 됩니까? 그리고 내가 그걸 물은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나서면 웅랑교하고 백록파가 원수가 되는지 물은 건데, 웬 동문서답이에요. 혹시 그거 노망의 전조 아닙니까?’
‘아예 어르신 수염을 뜯어라, 뜯어!’
‘뽑을 수염이나 있나?’
‘이놈이….’
오진자는 자신을 백록산에 묶어두려는 백록파 장문인 오중자(晤重子)에게 여인천궁과 손을 잡고 북지 무림맹을 복원하자고 설득하여 백록산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또다시 여인천궁이 있는 무산곡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맹주의 지위는 여인천궁이 가져가겠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직책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 만드는 무림맹에 여인천궁과 더불어 또 하나의 축인 백록파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선 중량감 있는 인물이 필요했고, 그 임무를 오중자는 오진자에게 떠넘긴 것이다. 무림맹은 여러 세력들이 힘을 모아 공동의 일을 처리하고 조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진자는 백록파를 대표해서 여인천궁과 직접 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기에 여인천궁이 있는 무산곡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역마살 때문에 백록파를 뛰쳐나온 오진자가 여인들만 우글거리는 곳에 있으려니 좀이 쑤셨고, 해서 만만한 금동보에게 심술 아닌 심술을 부린 것이다. 처음엔 존장인 오진자의 심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금동보 또한 녹록잖은 한 성질이어서 이내 만인객잔에서 점소이로 굴러먹던 성질을 드러내니 그렇게 항상 티격태격했다. 그러나 백록파를 나선 뒤 계속 붙어 있던 두 걸물은 나이를 초월해서 친분이 두터워졌기에 오진자의 듬성듬성 자란 수염을 뽑네 마네 하는 농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에잉,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내가 참아야지….’
‘수십, 아니지 수백 살 차이나는 나이를 왜 한두 살로 확 줄여요? 저는 장로 어르신을 형님이라고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요.’
‘이놈이… 갈(喝)!’
―흐억!
“….”
“….”
조용하던 여인천궁의 정청에서 전음(傳音)으로 오진자와 대화를 나누던 금동보는 오진자의 내공이 깃든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천둥 벼락 같은 음공에 당해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그 소리는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서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정청의 모든 주의를 쏠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시에 대부분 여인인 장내 사람들의 시선을 본의 아니게 모으게 된 금동보는 얼굴을 붉힐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총각인 금동보로서는 아름다운 여인천궁 미녀들의 시선을 받아넘길 담이 부족했다.
‘이놈아! 어린 놈이 어른에게 대들면 매 아니면 망신이다.’
오진자는 굳어버린 금동보에게 속을 통째로 뒤집는 위력을 지닌 전음을 날리며 앞으로 나섰다.
“험험험, 본도는 백록산의 오진이라 하오.”
“….”
“본래 이 일은 제3자인 본도가 나설 일은 아니나 일이 더 진행되면 여인천궁과 웅랑교가 원수지간이 되어 여인천궁과 같은 일을 도모하려는 본파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본교의 일을 방해할 셈인가?”
오진자는 불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뻣뻣한 웅량흘의 말투를 귓가로 흘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좀전에 웅 장로께서 말하길, 강호는 힘이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고하를 나누는 데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묘올산성의 군사들은 본시 장동의 위병들이고, 그들은 원래 장동에 자리잡고 있던 북지 무림맹의 손에 키워진 군사들이지요.”
“그래서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가?”
“북지성엔 무림맹이 있다는 말이오.”
“….”
오진자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했다. 부맹주의 신분을 가진 천상천화가 맹주에게 무림맹을 부탁받았다는 소문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상천화에게 구명을 받아 천상천화를 따르는 묘올산성의 1만 군사들은 오진자의 말처럼 북지 무림맹이 총괄하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무림맹을 이뤘을 때 맹을 이루는 세력이 서로 어려움이나 위협에 대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 오진자는 웅랑교 장로 웅량흘에게 여인천궁을 적대하는 것은 전(全) 북지 무림을 적대하는 것과 같다는 경고를 한 것이었다.
“해서 본도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하오.”
“….”
“웅랑교와 무림맹 양쪽에서 세 명씩 나와 겨루는 것이오.”
“그럼 진 쪽은 이긴 쪽의 뜻에 따른다는 것인가?”
“허허허허, 이 제안은 웅랑교에 과연 힘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오. 이대로 서로 충돌하면 피를 보게 될 것이고, 그럼 그 순간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 테니 그것만은 막아보자는 것이오.”
오진자의 말은 물러가라는 완곡한 다른 표현이었지만, 그것은 고집 센 웅량흘에게 일종의 명분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세의 불리함을 느낀 웅량흘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좋다. 웅보(熊甫), 네가 먼저 나서거라!”
“예, 사부님!”
웅랑교 쪽에서 먼저 진을 풀고 한 웅인이 나서자 오진자는 상석에 앉아 있는 궁주 상유란에게 양해를 구했다.
“궁주, 함부로 나선 본도를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제 뜻도 피를 흘리기보다 그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묘연아, 네가 먼저 나서거라!”
“예, 궁주님!”
궁주의 허락이 떨어지고 상유란이 물러서라는 손짓을 하자 이십팔로옥녀검진을 짠 검녀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궁주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 가까이 있던 검선자 주묘연이 상승신법을 펼쳐 앞으로 나선 웅인의 앞에 섰다.
“웅랑교의 웅보요!”
“여인천궁의 외당주 주묘연이에요. 제가 무기를 들었으니 선수를 양보하겠어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크앙!”
지난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서로 비무를 하는 무인의 예를 나눈 뒤 웅량흘의 제자 웅보의 선공으로 비무가 시작되었다. 웅보는 자신의 커다란 덩치로 상대를 위압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양손을 포효와 함께 내리쳤다. 언뜻 양팔을 벌려 가슴이 노출되면서 허점이 보였지만 가슴은 갈비뼈로 보호되는 곳이라 정확하게 찔러야 하는 곳이었고 만일 찌르는 힘이 모자라거나 실패하면 찌른 자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포효하는 위세는 사람을 움찔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있었고 고수인 웅보는 가슴을 보호하는 호심경이나 외문 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기에 주묘연은 일단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웅보가 사용하는 웅권의 묘용이었다. 당연하지만 웅랑교 기본 무예는 웅권(熊拳)과 낭권(狼拳)이었다. 곰과 늑대의 형상을 흉내내어 만든 권법을 바탕으로 웅랑교가 창시되자 웅인들과 낭인들이 두 권법을 자신에 맡게 다시 창안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두 권법 모두 양강(陽强)한 무공 초식이었고 저돌적인 공격력이 위력적인 무공이기도 했다. 거웅압산(巨熊壓山)의 초식으로 기세를 잡은 웅보는 저돌적으로 여인천궁의 외당주라는 여고수를 밀어붙였고, 선기를 잃은 주묘연은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낭패를 면치 못했다.
―찌익~!
웅보의 발톱에 소맷자락이 찢겨나갔지만 주묘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저돌적이지만 단순한 공격 일변도의 수법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웅권은 사실 널리 알려진 무술이기에 주묘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곰 인간이 펼치는 웅권은 더욱 위력적이어서 주묘연은 이렇다 할 돌파를 찾지 못하고 방어에 치중했다.
“햐~! 주 낭자 정말 대단하네요.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공수를 나누네요?”
“동보, 너는 저렇게 못하지?”
“저는 저렇게 나오기 전에 끝냈죠.”
“사실 그렇다만 그래서 너는 어설픈 고수야!”
“아니, 왜 자꾸 어설픈 고수라는 거예요? 그 어설픈 고수에게 이기지도 못하면서?”
“나는 너랑 대련이나 비무 안 해. 비무하면 나는 네게 이길 수 없지만 결투를 하면 동보 너는 ‘어!’ 하는 사이에 염라대왕하고 상견례하고 있을 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인들의 겨루기는 대련(對鍊), 비무(比武), 그리고 결투(決鬪)를 한다. 대련은 상대를 연습 상대 삼아 무술을 연마하는 것을 말하고, 비무는 말 그대로 서로의 무공 실력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무는 서로를 상하게 하는 극단의 무공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목숨을 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비무을 할 때 대부분 본 실력의 3푼이나 크게는 3할 정도까지 숨긴 채 무공을 겨루었고, 그렇지 않더라고 최후의 한 수는 끝까지 남겨두는 법이었다. 그래서 승패가 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결투는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다. 즉 완전히 끝장을 보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살기가 짙은 무공 초식이나 단 한 번에 전력을 다해 서로 겨루기 때문에 일합(一合)에서 승부가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선공을 펼쳐 네가 천방지축신공을 사용하기 전에 승부를 끝낼 거다.”
“제가 호구예요? 단 한 번에 당하게….”
“너 호구 맞아!”
“그게 무슨….”
“어? 이제 승부를 내려는 모양이다.”
경지에 든 고수들의 입장에서 지리한(?) 초식 싸움을 끝낸 두 비무자는 각자 비기를 준비하는 짧은, 절정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기를 가지고 서로 내공력을 사용한 초식을 선보였다.
“옥봉일취(玉鳳壹嘴)!”
“패웅붕진(覇熊崩震)!”
―우르릉~! 찌치직… 까강!
옥봉황의 날카로운 부리와 거대한 곰의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가 충돌하자 진기가 상충되며 두 비무자들을 밀어냈다.
“어? 주 낭자!”
금동보는 주묘연이 충격으로 밀려나 휘청이며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 핏물을 토해내자 자신도 모르게 달려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금 대협! 염려해주셔서 고마워요.”
“예? 예.”
금동보는 지금 주 낭자를 안고 있는 지금 상황에 스스로도 놀라며 이해하지 못했다. 오진자가 천상천화에겐 이미 임자가 있으니 주묘연을 노려보라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흘려들으며 그녀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단지 주묘연이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자 몸이 멋대로 움직여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금 대협, 저는 괜찮으니 팔 좀….”
“예? 예. 제, 제가 그만 실례를….”
오진자는 평소 여인천궁의 여인들과 격의 없이 지내던 넉살 좋은 금동보가 얼어붙어 순둥이 흉내를 내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쯧쯧쯧, 그렇게 넉살 좋은 놈이 마음에 있는 여인에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니 참!”
오진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서로 다쳤으므로 첫 번째 비무를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비무는 여기서 그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부는….”
“제 패배를 시인하오.”
“….”
오진자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주묘연과 겨룬 웅보였다.
“손속에 사정을 둔 것에 감사하오.”
“별말씀을….”
사실 이 자리에 있던 고수들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웅보의 심장을 노리던 검선자 주묘연의 검 끝이 검로(劍路)를 바꾸어 어깨를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웅보의 패웅붕진은 그 위력이 약간만 손상이 되었을 뿐 그대로 시전되어 주묘연을 상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묘연은 웅보의 필살기를 맞고도 조금 다친 정도에서 끝났기에 무공의 고하는 확실했다. 전력을 다한 자와 손속의 사정을 둔 자가 동패구상(同敗毆傷)했다면 어느 쪽이 위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장로님, 이번엔 제가 나가겠습니다.”
“네가? 뭐 좋겠지.”
웅량흘은 아직 미숙해 초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웅보가 웅권을 보였으므로 낭권을 수련한 낭신(狼辛)의 청을 수락했다. 자신의 제자인 웅보가 비록 지기는 했지만 웅보가 상대한 것은 여인천궁의 주요 인사였다. 거기에 비해 웅보는 두각을 나타내는 준재이기는 하나 500 웅기의 한 명일 뿐이었다.
“웅랑교의 낭신이오. 어느 고수 분이 저를 상대해주시겠소?”
“궁주님, 제가 나서겠습니다.”
“석심이 네가?”
웅랑교 쪽에서 낭인(狼人) 고수(高手)가 나서자 교석심이 앞으로 나서며 허락을 구했다.
“궁주, 이 일은 여인천궁과 웅랑교만의 일이 아니라 무림맹의 일입니다. 그러니 같은 북지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저희가 한 팔 거들게 해주십시오.”
“오진자 장로가 나서시려는 겁니까?”
“제가 다 늙은 몸을 이끌고 힘이 넘치는 후학과 어찌 손속을 겨루겠습니까. 제가 아니라 여기 천축대협입니다.”
“금 대협이오?”
상유란은 세상 편해 보이는 인상의 금동보의 맹한 모습이 왠지 못미더웠지만 교석심을 내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교석심의 성정을 잘 아는 상유란은 그녀를 내보내게 되면 독한 손속을 사용할 것이라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비무이고 백록파를 대표하는 고인(高人)인 오진자가 추천했으니 쉽게 당하거나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럼 부탁합니다, 금 대협!”
“네.”
“궁주님! 하지만….”
“총사, 오진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하자꾸나.”
냉심소수 교석심은 말 몇 마디로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궁주의 세력인 장동의 군사들을 무림맹의 세력으로 만든 오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여인천궁에 2만이나 되는 군사들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은 하지 않았다. 금동보는 앞으로 나서며 상승전음(上昇傳音)으로 입술을 달싹이지도 않고 내가공력만으로 등 뒤쪽에 있는 오진자에게 따졌다.
‘왜 날 물고 늘어져요?’
‘이놈아, 네놈 본마음은 이미 주 낭자에게 향하고 있는데, 지금쯤 멋진 대협의 풍모를 보여야 할 거 아니냐?’
오진자는 금동보가 보이지 않는 등 뒤쪽에 있는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자 은근히 감탄했다. 초식과 외공은 미숙하기 그지없으나 내력 운용을 하는 것은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누, 누가 누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라. 다른 계집애들이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덕거리면서 정작 주 낭자 앞에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지 않느냐?’
‘그거야! 장로님이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스스로 천축대협이란 거창한 별호까지 만들었으면 그만한 실력을 보여야지.’
천축대협(天軸大俠)은 별호는 금동보 스스로 반장난으로 지은 별호였다. 대협(大俠)이나 영웅(英雄)은 존칭으로, 별호에 그것을 넣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무림의 호협을 높이는 말을 별호에 붙였으니 자화자찬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웅랑교 낭신이오.”
“에! 백록파, 아니 만인…문의 금동보요.”
“만인문?”
“그냥 백록파에서 파생된 분파라고 생각하면 되오.”
“그럼 먼저 시작하겠소. 컹!”
“흐헉~!”
금동보는 눈앞에서 사람이 늑대의 형상으로 변하여 허연 삼백안을 치켜뜬 늑대가 덮쳐오자 깜짝 놀라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른바 뇌려타곤(惱驢惰困)이었다. 풀어 말하면 지랄병이 든 당나귀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을 마구 뒹군다는 뜻인데, 이러한 이름의 신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상대방의 공격을 아무래도 피할 방법이 없을 때 땅바닥을 마구 뒹굴어서 간신히 몸을 피하는 모습을 일컬었다. 그 모양이 너무 참담하고 부끄러우므로 고수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시전하고 싶어하지 않는 수치스러운 신법이라 죽으면 죽었지 사용하지 않는다 했다. 다른 말로 게으른 당나귀가 뒹군다는 나려타곤(懶驢惰困)이라고도 했다. 그런 금동보의 모습에 가장 황당해한 것은 다름 아닌 그와 비무하는 낭신이었다. 먼저 손을 써서 선기를 잡았지만 너무도 ‘당당하게’ 그것도 생사투가 아닌 실력을 겨루는 비무에서 뇌려타곤을 시전하는 상대가 너무나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후아! 놀라라! 죽는 줄 알았네.”
늑대 인간 낭신이 공격을 멈추자 멀찍이 굴러간 금동보는 혀를 내두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넓은 정청을 꽉 메운 여인천궁의 여인들과 웅랑교의 인물들도 천연덕스러운 금도보의 태도에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금동보는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을 시전해 낭신의 공간을 장악했다.
“그럼 이번엔 내 차례요. 천방유성각(天方流星脚)!”
이름은 거창했지만 실상은 엉거주춤한 옆으로 날아 차기였다. 다년간(?) 무술을 수련한 금동보의 발차기는 고수들이 즐비한 이곳에선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몸부림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킥!”
“풋!”
낭신은 발차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런 자와 싸워야 하는 것이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나….
“…!”
―퍽!
엉성한 금동보의 발차기는 멍하게 서 있는 낭신의 명치에 정확히 틀어박혔고, 아무런 방비를 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슴을 내준 낭신은 그 충격에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꿀럭, 꿀럭, 꿀럭!
“크릉~!”
“어?”
―퍽!
이번에는 야수의 흉성을 드러내며 날카로운 예기의 낭아권(狼牙拳)을 시전하여 상대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어이없게 금동보가 그냥 어깨에서 수평으로 휘두른 팔꿈치에 턱을 맞고 되튕겨 나가떨어졌다. 여인천궁의 여인들을 비롯한 중인들은 금동보의 너무도 어이없는 신위(?)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낭신은 얼얼한 턱을 쓰다듬고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으르렁대는 입 사이로 침까지 흘렸다. 그리고 금동보가 심상치 않은 수법을 쓴다는 것을 간파한 웅량흘 장로는 미간을 좁히며 계속 비무를 주시했다.
“크르르르르르르… 컹!”
낭신은 풍랑신공(風狼神功)의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노한 늑대가 호랑이를 찢는다는 노랑시호(怒狼嘶虎)의 초식을 시전했다.
―훙훙훙훙훙훙….
“천축승천파(天竺昇天破)!”
실내인 여인천궁의 정청에서 난데없는 폭풍을 만들어낸 신위를 보인 낭신이었다. 그러나 천축승천파라 이름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단순히 주먹을 올려치는 것에 불과한 초식에 상승기공인 풍랑신공을 운용하며 웬만한 고수의 시야엔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낭신은 그 주먹질에 아래턱을 정확하게 내주고 말았다.
―퍽!
―덥석~!
비무는 금동보의 내력이 깃든 주먹이 정확하게 낭신의 아래턱에 작렬해 허연 거품을 물고 쓰러짐으로써 끝이 났다.
“우리가 졌네. 미안하지만 자네 이름을 다시 말해줄 수 없겠나?”
“금동보요.”
“천축대협 금동보라… 강호에 새로운 신성이 나타났구먼. 내 자네 이름을 기억해두지.”
금동보는 웅랑교 장로라는 사람이 아까 잠깐 오진자의 언급한 천축대협이라는 별호를 이름 앞에 붙여 기억한다고 하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두 번의 비무를 연이어 패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웅량흘은 마지막 비무에는 직접 나섰다.
“마지막 비무는 본인이 직접 나서겠소. 누가 나와 손속을 겨룰 것이오?”
말로는 누가 상대해줄 것이냐 물었지만 웅량흘의 눈은 여인천궁주 상유란을 직시했다.
“호호호, 웅 장로가 나서신다면 본궁은 여중제일고수를 내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조금 기다리시지요.”
“클클클클, 여중제일고수라 누군지 궁금하구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차를 반쯤 비울 시간인 반 다경이 지나자, 여인천궁의 정청에 붉은 홍의궁장의 미녀가 들어섰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본궁의 소궁주입니다.”
“천, 천상천화!”
명불허전(名不虛傳), 웅량흘은 천상천화가 천하제일미라 하지만 계집이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천상천화가 대청으로 나온 순간, 이곳의 공기는 변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후광처럼 감싼 기품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었다. 천하, 아니 지금 이 넓은 대청에도 세상에 나가면 아름답다고 할 미인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천상천화가 나타난 순간, 그 여인들은 한낱 미인도(美人圖)의 배경으로 전락했다.
설화는 주묘연이 비무를 할 때쯤 궁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궁주이자 사부인 상유란의 명으로 난데없이 부랴부랴 꽃단장을 해야 했다. 그리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대청으로 나선 것이다.
“여인천궁의 소궁주 설화가 인사드립니다.”
“웅랑교 장로 웅량흘이네. 내 3초를 양보할 테니 먼저 손을 쓰시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옥녀투사(玉女套梭)!”
―촤라라라….
설화는 가느다란 손목에 감겨 있던 호접검(蝴蝶劍)을 뽑아들고 옥녀소심검(玉女素心劍)의 옥녀투사 초식을 허공에 수놓았다. 그리고 연이어 비단에 그림을 그리니 꽃이 피어나는 듯한 금필생화(錦筆生花)와 연못 옆에서 학과 논다는 지변조학(池邊調鶴)의 초식을 펼쳐냈다. 하나같이 옥녀무(玉女舞)를 기본으로 하는 검법 초식이라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춤과 다름없었다. 무림에서 배분이 높은 선배 되는 자가 자기보다 배분이 낮은 후배 되는 자에게 3초식을 양보하면 후배는 허공에 헛칼질을 하여 예를 갖추는 것이 있었다. 설화가 이렇게 허공에 초식을 시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허허허허, 좋구나! 노부와 같이 어울려보자!”
웅량흘은 약속한 3초식이 지나고 4초식 때 공격을 해오는 설화의 공격을 받으며 말했다. 그리고 웅량흘은 망망대해(茫茫大海) 한가운데의,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위섬에 서 있는 기분이 되었다.
‘헉, 이럴 수가.’
그냥 볼 때는 그저 미인의 아름다운 춤사위 같은 검법이 겨루는 입장이 되자 막막한 하늘을 가르겠다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의 신세가 된 것이다.
‘호오~! 그간 설화가 장동성의 사람들을 돕네, 항구를 만드네 하면서 무공 수련을 소홀히 한 줄 알았더니 그새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구나. 과연 기재 중 기재로다.’
상유란은 자신이 상대해도 자신이 없는 웅랑교의 장로를 완전히 압도하는 설화의 옥녀소심검을 보고 감탄했다.
‘동보야, 너는 저렇게 못하지? 하려면 저렇게 해야지 너는….’
‘됐네요. 결과가 같으면 됐지, 멋은….’
‘호오~ 그래도 느껴지는 것이 있나 보지? 하긴 무인으로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나려타곤 신공을 펼치고도 생각이 없으면 짐 싸들고 산으로 들어가 평생 나오지 말아야지. 이거 원 창피해서.’
솔직히 금동보는 뇌려타곤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오진자의 쿠사리를 들어가며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낯이 뜨거워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천방지축신공을 수련한 자 특유의 민감하기 그지없는 기감에 천상천화가 진기를 실처럼 뽑아내 웅랑교의 장로를 옭아매는 것을 보고 은근히 감탄했다. 그건 공간을 지배하는 바로 이전의 단계였다.
‘천상천화가 공간을 지배하는 오의를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 길을 찾은 것인가?’
금동보는 웅랑교의 장로가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 이상의 존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금동보의 짐작대로 설화는 웅량흘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설화는 대나무들이 연못을 둘러싸듯 하는 죽렴임지(竹簾臨池) 초식으로 웅량흘을 꼼짝 못하게 묶어두고 화룡점정(畵龍點睛) 용을 그린 그림을 눈을 찍어 완성하듯이 아름다운 색으로 눈썹을 그려 미인도를 완성하는 채필화미(彩筆畵眉) 초식으로 웅량흘의 미간(眉間)을 검첨(劍尖)으로 점했다.
“….”
“….”
웅량흘은 비무를 시작한 이래 아무런 손을 써보지 못하고 두 눈썹 사이에 놓인 진기(眞氣)를 머금은 천상천화의 얄팍한 검에서 전해오는 아릿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연 여중제일고수요. 내 오늘 유(柔)함의 극의(極意)를 보았으니 그것에 만족하고 돌아가겠소. 그러나 다음에 다시 찾아왔을 때는 달리 생각하리라 믿소. 다음에는 강호도의를 따지지 않을 것이니….”
웅량흘은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고 무산곡을 떠났다.
“쳇! 패자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입이 있어도 할 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판판이 깨진 주제에….”
“쯔쯔쯔쯔,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일종의 경고다. 자기는 웅랑교에 매인 몸이니까 다음에 올 때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것이니 각오하라는….”
“그게 뭔 소리예요?”
“말 그대로다. 오늘은 무림의 방식을 따랐지만 이미 거병한 이상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병가(兵家)가 그런 것처럼 대군을 들이대고 강요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이곳에 대군을 뭐 하러 어떻게 끌고 온단 말이에요?”
“동보야, 너 어깨 위에 있는 것들은 그냥 남들 보기에 징그럽지 않게 그냥 얹고 다니는 거 맞지? 곰하고 늑대는 원래 산을 잘 타는 짐승이다. 그리고 그들의 무공 실력을 봤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그 정도 고수 한 백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협박하면 충분하잖아!”
“오진자 할아버지, 그렇다고 해도 무서울 것 없어요.”
티격태격하는 두 노소 사이에 끼어든 천상천화 설화는 그렇게 말했다. 설화가 자신의 편을 드는 듯하자 금동보는 코를 세우며 말했다.
“그렇다잖아요!”
“에잉, 내가 무식한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니.”
오진자는 기고만장(氣高萬丈)한 금동보에게 핀잔을 주고 정색을 하며 천상천화에게 물었다.
“소궁주, 그게 무슨 뜻이오?”
“제 서방님은 천하에서 제일 강하신 분이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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