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신문에 실린 동기생들의 수필(3)
'다시 만난 5인의 해병' 은
현충일날 국립현충원에서 월남전에서 전사한 동기생 이수장 묘소에서 윤재화 해병을 만난것이 계기가 되어 송대장과 연결이 되었다.
귀국한 송대장과 송대장이 월남전에서 중대장을 할때 대원인 윤재화 외에 같은 중대원을 만나는 장면을 장수근 동지가 동행 취재한 글이다.
윤재화(해병 181기) 해병은 소대장이었던 이수장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수십년간 매년 현충원을 찾았다는 것이다.
송대장은 35기 카페에 들어와서 윤해병과 현충원에서 35기들과 만나는 사연을 보고 미국에서 국제전화로 한국의 윤해병을 찾았다.
송대장이 국제 통화를 하며 원남전에서 산화한 중대원들을 생각하며 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청앞 광장에서 65주년 서울 수복 기념 행사에 모두 참여하여 공정식 사령관과 같이 식사도 하며 동기생인 전도봉 사령관도 만나고 송대장은 월남전 대원과 회포를 풀었다는 것이다.
스케너가 작아 신문을 반으로 스켄을 하였기 때문에 2매를 합처서 보아야 한다.
'67년 추라이 전투' 는
김광길 동기가 쾅나이시 추라이에서 소대장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전투기다.
청룡3대대가 적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병력의 손실을 입어 급히 보충병력을 보내줄것을 해병대 사령부에 요청했다.
한국에 있는 해병대 사령부는 급히 150 여명의 장사병을 비행기로 월남에 급파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병력수송선인 업쇼호도 아니고 여객기로 병력을 한국에서부터 월남까지 급파했을까...
이 급파한 장교 4명중 동기생이 3명으로 김광길 은희목 이수현이다.
노룡 작전에 투입된 김광길 소대장은 6중대와 7중대가 교체공격으로도 실패한 공격을 5중대가 야간 이동으로 익일 적을 공습하여 대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때 중대장은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고 김 소대장이 중대를 지휘하여 고지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장면을 호주의 종군기자가 취재하여 호주의 방송에서 방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호주 방송이 나가고 난후에 호주에서 김광길 소대장에게 위문편지가 수백통이 날라들어 고생끝에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단다.
'해병대는 살아서 말한다' 는
김광깅 동기가 북한의 연평도 포격때 불붙은 철모를 쓰고 적에게 대응사격을 하는 용감한 후배 해병을 칭찬하는 글이다.
해병전우보의 천자봉의 메아리에 실렸다.
' 서울 현충원에서' 는
매년 현충일에 국립현충원을 찾는 김광길 동기가 월남전에서 같이 전투를 하다 전사한 대원들과 선후배 장교들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해병전우보의 해병춘추란에 게제되었다.
'소위와 3성장군' 은
장군묘역이 아닌 사병묘역에 잠드신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TV 대담에서 청룡부대의 김광길 소대장의 전투상황을 언급하였단다.
사령관이 소대장의 전투상황을 이야기 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신화적인 짜빈동 작전이 있기전에 적은 양동작전으로 짜빈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변 21고지에 있는 김광길 소대의 전면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밤 10시경 적의 총탄이 날라오고 아군의 대응사격이 소나기 처럼 퍼부어 대고 105 미리 포가 조명탄과 포탄을 작열하는 가운데 적을 퇴치한 전투다.
적은 시신도 버리고 도주한 치열한 전투였으나 월남전 사상 짜빈동 전투의 엄청난 결과때문에 적의 양동작전을 과감히 격퇴시킨 김광길 소위의 전투는 뭍혀버리고 말았다.
이 '소위와 3성장군'은 해병대신문에 기고를 하였는데 나는 원본을 갖고있지 않다.
이번에 올린 해병신문에 기재된 수필집은 나의 컴퓨터가 자동저장이 않되고 에라가 나는 바람에 3번이나 실패를 하였다.
한번에 4시간씩 3일을 소비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정상 작동이 되어 올리게 되었다.
권오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