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만남이 있는 2003 송년음악회
나는 앞으로도 될 수 있으면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며 살고 싶다. 가능하다면 일상생활 말고 특별한 시간을 가지며 감동을 하고 싶다. 무언가 나를 위해 준비된 시간을 기다리노라면 차디찬 식혜 위 살얼음을 마시는 것처럼 설레 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이벤트를 즐기고 품위 있는 만남을 재촉하기도 한다.
KBS 공주방송국과 공주시가 공동 주최한 <2003 송년음악회> 초대권과 팸플릿을 받아들고 며칠 몇 날을 보고 싶고 듣고 싶었던 가슴 벅참에 부푼 기대로 머릿속이 빙글빙글 돈다.
평소 보고 싶었던 <장사익>이 그랬고,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과 88올림픽을 뜨겁게 달구어 한겨레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열창하던 <코리아나 홍화자>가 그랬다. 깊어가는 겨울밤 화려한 무대를 수놓으며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만하지 않은가.
공주 백제체육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50분쯤 되었을 거다. 좀 더 여유롭게 출발하여 숨을 고르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입장하고 보니 객석에 사람들로 꽉 차 있어 그 날의 분위기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1층과 2층, 3층까지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운 좋게도 공주시장인 오영희 언니와 악수를 하고 맨 앞줄 VIP석에 앉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오프닝연주로 공주시 충남교향악단의 '쇼스타코비치, 서곡 축전 작품 96번을 감상한 후 내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보고팠던 <장사익>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역시 우리나라 전통의 얼을 살리고 넋을 기리는 한복 의상을 단정하게 입고 나온다. 가슴을 파고드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의 목소리는 애절한 '찔레꽃' 못지않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사로잡았는데 그야말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가수 장사익은 1993년 전주 대사습놀이 태평소로 장원을 한 저력이 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서도 태평소를 연주하여 멋들어진 하모니를 보여주기도 했다. 토속적이며 지극히 한국적인 감성으로 수많은 팬을 확보한 그가 트로트인 '대전블루스'를 불러줄 때는 익살스러움과 재치 있는 위트가 섞여 관중들이 열광의 박수를 받음과 동시에 '앙코르'를 외치게 하는 매력을 보여 주었다.
일부러 웃기려 하지 않아도 웃음이 배어 나오는 그런 사람. 유치한 말투와 속된 몸짓을 하여도 천박하거나 저질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 커다란 움직임이 없어도 큰 나무같이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장사익>이었다. 그의 노래가 끝나고 충남국악관현악단의 연주 'Frontier! ~Voices from the East/양방언 곡'을 들었다. 이 곡은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공식 음악으로 선정되어 많은 한국 팬들의 사랑을 받은 곡으로 유명하다.
국악과 관현악의 만남이 주는 또 다른 색깔은 평소 쌀밥만 먹다가 영양밥 같은 특식을 먹는 느낌으로 잔잔한 반란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보다 더 먹고 싶은 것은 정말 특별하고도 신선한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외식이다.
나에게 그 특별한 외식이 바로 <유진박>의 화려한 무대였다고 하면 사치일까? TV 방송 매체에서 또는 비디오로 접해본 것이 다였던 내게 온몸으로 던지는 자유스러움과 열정이 묻어나는 땀 냄새를 맡게 해 주는 찰라다. 올해 26세의 젊은 청년이 8살 그 어린 나이에 바이올린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야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다 알고 있으리라.
지난 '96년도 힙합바지에 껄렁껄렁한 모습으로 이상하게 생긴 바이올린 하나 가지고 홀연히 나타난 남자. 전자 바이올린이 주는 음색에 길들여지기는 '바네사메이'가 먼저였으리라. 비교적 점잖은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검은색 정장을 입긴 하였지만 역시 반짝거리는 다림질 표시가 나는 자유로움과 정열적인 몸짓이 동반된 음악에 도취한다.
유진박이 가지고 다니는 바이올린은 특이하다. 보통 바이올린에 첼로와 비올라 가닥을 하나씩 더 단 괴상한 악기다. 전자 바이올린이 내는 굉음이 가슴속 잔 찌꺼기들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고 인간의 감성이 가진 그 이상의 감성과 또 다른 무엇을 품어내는 마력을 내보였다. 내 영혼까지 빨려 들어가는 '어쩔 수 없음'을 여기에서 또 한 번 느끼게 된 것이다. 홍동기 님의 곡 '고구려의 혼'을 듣고 있노라니 말발굽 소리와 힘찬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신시사이저와 타악기가 웅장한 스케일를 갖고 어우러짐으로써 그야말로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을 실감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힘이 솟아오르게 한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은 차가운 이웃들에게 따스함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영양제가 된다. 코리아나의 홍화자가 불러주는 The Victory에 맞춰 연주하는 유진박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효녀 가수 '현숙'의 발랄함과 성의 있는 공연자세는 즐겁고 신나는 시간을, 속옷 CF 주제곡을 부른 가수로 너무 잘 알려진 'JK 김동욱'은 잔잔한 음색으로 매력 포인트를, 젊음과 패기가 넘치는 인기가수 '코요테'의 화려한 무대는 청소년들의 환호성으로 그 열기를 더해갔다.
환상적인 레이저쇼와 물방울쇼, 불꽃 폭죽이 터지면 어김없이 흥분을 하는 그네들을 보며 '역시 젊음은 다 때가 있는 거야'라며 나 혼자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음악회 중반을 넘어서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촛불 전달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나둘 불을 밝혀 따스한 사랑을 나누는 뜻깊은 자리였기에 마음마저 숙연해진다.
사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누는 진정한 사랑을 배우자. 작은 불씨 하나가 체육관 전체를 환하게 비추이니 따스한 온정의 손길이 멀리 퍼지리라. 추운 계절 겨울이 아니라, 겨울도 따뜻한 계절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매년 이쯤 되면 누구나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올해는 유난히 어려운 이웃들도 많이 눈에 띄고 각박한 세상 분위기 탓인지 가까운 지인들끼리도 가슴이 메말라가고 있는 모습이다. 부디 저물어 가는 한 해의 간이역에 머물러 특별한 만남이 있는 곳을 찾아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자리 하나 마련해 보길 바란다.
작성일: 200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