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 06. 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1.3 (4세):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
1914. (7세): 천자문을 외우고 동몽선습 학습
1918.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수업
1921 (14세):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
1922. (15세): 성주 배(裵)씨 용순(用順) 여사와 결혼
1923 (16세):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5 (18세): 시집 「오추(嗚推)」「옥수(玉睡)」「임추(壬椎)」등 발간
1926.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매헌(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시작
1927. (20세): 「농민독본」(3권) 저술
1928. (21세): 부흥원 설립기념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월례강연회 개최
「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심,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및 수암 체육회 조직
1930.3.6(23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를 남기시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1930. 10 :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중국 청도에 도착
(처음 어머님께 편지를 송부)
1931. 5. 8 :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1931. : 한인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 및 노동운동
1931. (24세) : 김구, 이유필,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 안공근등과
독립 운동
1932.4.26(25세): 대한민국 14년에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선생과 기념촬영
1932. 04. 29 : 11시40분(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의거,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
1932. 5. 25 :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932. 11.18 :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932. 12.18 :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
1932. 12.19 : 아침 7시40분(25세):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첫댓글 이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윤봉길 의사님 지금 살아계시면96세 시네요 반민족 잔재의 더러운 뿌리가 아직도 있답니다. 교묘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아직도 득세를 하고 있으니 넘 가슴아픔니다.요번 4월15일에 꼭 썩은 뿌리를 응징하겠습니다
미친일본개쓰레기들...25살이면 젊은 나이인데..ㅜㅜ
증말 이런 사진보니 친일파 놈들 찧어죽이고 싶내요 내한몸 가루되더라도 국립묘지 에 이승만과 박정히 그떨거지들을 빨리 화장시켜 일본 현애탄으로 뿌려버리고 싶내요 그내들의 정신적우상인 일본왕 곁에서 죽어서도 충성하라구요
ㅜㅜ 아 슬퍼라..................
대한 독립 만세..ㅠㅠ
씨발 악 받치네.독립유공자들 전부 거지비스무리 하고 잘해야 개인택시 몬다고 하던데.
아 떡잎부터 알아 본다고 12세에 결심.
저...다행히아버지가국가유공자라..대기업다닙니다....하지만...씨발놈들보면...혈압이오르죠.... 난 일본보다 더미운건 친일을한자들.....증오합니다
(_,._) (-,.-)
처절한 모습에 머리숙입니다 당신은 한몸이었으나 진정 한몸이 아니었겠지요?
예수처럼 우리의죄를 사하여죽으것처럼 우리도 우리나라위인을 존경하고 예수도존경하겠습니다ㅠㅠ
윤봉길 선생님께서 약관의 나이에 삶은 마감한게 과연 누구 때문인가... 그 짧은 생이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를 인간이 아닌 하나의 도구로서의 삶을 강요한자들은 없는가
난 과연 그나이에 뭘하고 있었을까나 다시한번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ㅠㅠ
친일파들을 모조리 응징하겠습니다.........(묵념)
아 이런 개같은 일본놈들 천벌 밭아라 윤봉길의사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나라가 독립햇나이다
윤봉길의사같은 정신을 지금 발휘해 독도를 사수해야 합니다..
윤봉길 선생께선 일찌기 어린 나이에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여 배움이 얼마나 중요함을 깨닫고 열심히 학문을 닦고 스스로 깨달아 주변의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여러 단체를 만들어 지도했으며 큰 장부의 기개가 바로 큰 뜻을 품는것은 당연하니 유언으로 작성한 명언을 남기고 홀로 어렵게 어렵게 김구선생을 찾아가니 큰 인물은 큰 인물이 알아보고 , 큰 일을 맡기시니 바로 몇억 중국인들이 우러러 보고 수천만의 일본인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홍구 공원의 쾌거를 보여주신 분으로 그 정신은 영원히 빛을 발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