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진국사(鎭國寺)의 유지를 이으며 노적봉의 품에 포근히 안긴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주요 기점의 하나인 구파발(舊把撥) 북 한산성입구에서 15분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이 등산객을 마중한다. 문을 들어서 15분 가량 가면 산성 안에 터를 닦은 오래된 마을,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른다. 이곳은 산성 축성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등산객을 상대로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동동주 등의 먹거리를 파 는 주막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북한산성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에 말끔히 철거되어 주민 들이 버린 집 일부만 남아 있다.
마을에서 태고사 방면으로 가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5분 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모습을 드러 낸다. 중성문과 중성은 북한산성의 최대 취약점인 북서쪽을 보완하고자 만든 것으로 이로 인해 산성의 수비력은 업그레이드되었다. 중성문을 지나 10분을 오르면 계곡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운 하교(雲河橋)란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가 노적사의 입구로 구름의 강이란 아름다운 뜻을 지닌 운하교를 건너 10분 정도 오르면 노적봉과 노적사가 진하게 그 모습을 비춘다.
노적봉(露積峰)을 든든한 뒷배경으로 그 아래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 속으로 1712년 승려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하였다. 성능은 18세기에 활약했 던 승려로 숙종(肅宗) 시절에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북한산성 보 수공사에 참여했으며, 산성에 자리한 중흥사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지금의 상운사)와 서 암사(西巖寺) 등 10개의 사찰을 세워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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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적사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地藏菩薩)과 10왕의 거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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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며 북 한산성과 북한산에 있는 사찰, 옛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 한지(北漢誌)'를 저술하였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은 전해오지 않 으며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터만 남은 것(아 마도 부근 중흥사, 국녕사와 비슷한 19세기 후 반에 없어졌을 듯)을 1960년 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세우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
1977년 승려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 장시켜 삼성각, 나한전(羅漢殿), 종각, 요사 등 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새롭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 어 전통사찰 20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 6월 에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었으나 2006년에 다시 세웠다. 또한 그해 4월 주지 종후가 네팔 팔탄타쉬 지하 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으며, 2009년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 으로 이름을 갈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 한전, 삼보당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 의 떼는 모조리 증발하여 소장문화재는 없는 실 정이다. |
▲ 2층 건물의 노적사 삼보당(三寶堂) 아래 층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다. (현재 대웅전으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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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는 노적사란 절이 따로 있었는데 19세 기 초반에 상운사(祥雲寺, 원효봉 밑에 있음)로 이름을 갈았다.
절 뒤로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 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태고사와 마찬가지로 조촐한 규모로 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 하다. 북한산의 청정한 기운이 서려 속세에 오 염된 번뇌와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여, 풍 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기 에는 딱 그만인 곳이다. |
▲ 나한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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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노적사 찾아가기 (2011년 8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3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1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북한동 마을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서암사터 → 북한동마을 → 중성문 → 운하교 → 노적사 (약 4km, 1시간 10~20분) * 점심시간에는 절을 찾은 누구에게나 점심공양을 제공한다. 오후에도 먹을 수 있으며, 맛이 좋 다고 하니 먹고 가자. 북한산에서 거의 유일하게 일반인에게도 공양을 제공하는 착한 절이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2 (☎ 02-353-5016) |
▲ 노적사 범종각(梵鍾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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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범종각이 중생을 맞는다. 2002년에 불에 탄 것을 2006년에 다시 세 운 것으로 아침과 저녁 6시가 되면 고요에 잠긴 북한산을 살며시 깨우며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메세지를 은은하게 전한다. |
▲ 노적사 극락전(極樂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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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을 지나면 왼쪽으로 2층 규모의 삼보당이 있고 정면으로 높다란 계단 위에 노적사의 법당 (法堂)인 극락전이 아래를 굽어본다.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2007년부터 극락전 으로 현판을 갈았다. <현재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쓰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 락하여 1986년에 증축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었다. 내부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갖춘 금동아미타3존불을 봉 안했으며, 그들의 금빛찬란한 모습은 건물 실내를 훤히 밝혀준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지장탱, 신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
▲ 작고 단정한 맵시가 인상적인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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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제자인 나한(羅漢) 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 다. 그런 삼성각을 2000년에 철거하고 나한전을 새롭게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 콸 쏟아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흔쾌히 해결해준다. (우측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좌측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
▲ 나한전 아랫도리에 자리한 2개의 샘터
▲ 석조미륵불(石造彌勒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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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좌측에는 석조미륵불이 각각 자리를 지킨다. 미륵불(彌勒 佛)은 56.7억년 후에 나타나 부처를 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로 그 유구한 시간 은 과연 언제를 기준으로 삼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세대에는 보기 힘들 것 같다. 부처가 사라진 이후, 이 땅에는 미륵을 칭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나타났으나 모두 가짜였다. 언제나 진 짜 미륵이 나타나 누란의 위기에 처한 이 세상을 구할 것인가..?
그의 왼손에는 동그란 모양의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구라고 한 다. 그것을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 좌우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 있으며, 보주 중 간에 한반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잡아맨다. 오른손은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 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석불 앞에 는 노천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밋밋한 석등 2기가 미륵불을 비춘다. |
▲ 특이하게 천막으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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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뒤로는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 가 쉽다.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쪽은 아무 것 도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로 가면 그 뒤로 내부를 가린 넓은 천막이 나온다. 겉으로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닐까 싶어 돌아서기 쉽지만 이곳 역시 엄연한 불전(佛殿)으로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을 모신 삼성각이다.
불전 치고 특이하게 천막으로 이루어진 삼성각은 원래 나한전 자리에 있었다.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전과 비슷한 규모를 지녔으나 2000년에 새롭게 나한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물러난 것이다. 나한전 건립으로 재정이 많이 어려웠던지 기와집으로 만들지 못하고 임 시방편으로 돌을 쌓고 불단을 만들어 천막을 올린 것이다. |
▲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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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 내부는 천막으로 초라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공간 가운데에 난로 가 있어 추운 겨울에도 온기가 감돈다. 불단에는 칠성(치성광여래)을 비롯하여 독성(나반존자) 과 산신이 자리한다. 그들 뒤로는 탱화(幀畵) 대신 커다란 돌이 후광(後光)으로 자리하며 좌우 로 중생의 소망을 담은 초들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
▲ 노적사 삼보당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자락 용출봉과 의상봉 사이 산자락에 1713년 성능이 세운 북한산 10개의 사찰 중 하나인 국녕사(國寧寺)가 바라보인다. 국녕사는 오랫동안 폐허로 있다가 1998년 힘겹게 법등(法燈)을 밝힌 절로 거대한 청동환희불(靑銅歡喜佛)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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