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요점 강설(金剛經 要點講說)
제18장 만물은 한 뿌리[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 만물은 한 뿌리[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②
일체동관(一體同觀)이라는 진리에 입각해서 살아간다면 더 이상 현상경계에 미혹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ㆍ현재ㆍ미래 어디에도 걸림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본 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여기에서 과거ㆍ현재ㆍ미래 어디에도 마음이 없다는 것은 본래 청정심이란 일체상이 없는지라 시간과 공간에 의하지 않았기에 어디에서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대사(六祖大師)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말했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얻을 수 없지만 만일 중생 습성이 소멸되어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이 세 가지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체달하게 되고 이것을 부처라
이름 하느니라."
이 말은 아ㆍ인사상이 끊어지면 저절로 무심을 증득하는데 이 때 과거ㆍ현재ㆍ미래 어떤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을 통달하므로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이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이라는 말이 가장 핵심이 되는 법문입니다.
여기 덕산화상(德山和尙)과 노파가 나눈 유명한 대화가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노파가 "과거ㆍ현재ㆍ미래 어디에도 마음을 얻을 수 없는데 화상은 어디에 마음을 두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웬만한 도인도 돌파하기 어려운 화두수준의 법 문답입니다. 여기에 대해 천하의 덕산화상도 꼼짝도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산승 또한 여기에 대해 어떤 말도 붙일 수 없지만 굳이 사족을 붙인다면 덕산화상은 문수의 화신으로 대지혜를 가진 능수능란한 노파의 적수가 도저히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해야 노파가 던진 한마디를 넘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에 삼세(三細) 육추(六麤)의 망념이 끊어진 무심의 경계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노파가 던진 한마디 말의 의미를 돌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금강경》 가운데 가장 난해한 이 문제에 대해 당대 최고라는 도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먼저 미륵보살 후신이라는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을 보겠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한 생각이여!
이 모두가 허망하게 이루어지나니
여기 온갖 사견이 만들어지고
갖가지 외도가 어지럽게 나타나리라.
과거는 없기에 소멸할 것 없고
미래는 생겨나도 나온 것 아니니
항상 이와 같이 통찰한다면
참과 거짓이 툭 트여 평등하리라.
依他一念起 俱爲妄所行 便分六十二 九百亂縱橫
의타일념기 구위망소행 변분육심이 구백란종횡
過去滅無滅 當來生不生 常能作此觀 眞妄坦然平
과거멸무멸 당래생불생 상능작차관 진망탄연평
상기 부대사 게송이 난해하여 산승이 가능한 의역했습니다. 삼세가 공한 이치를 절묘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격외 선기가 뻔쩍이는 야부대사(冶父大師)는 어떻게 보았을까요?
과거ㆍ현재ㆍ미래 어디에서도
마음을 구해도 볼 수가 없어
예전처럼 두 눈 부릅뜨고
서로 마주하고 보네.
강물 위에 칼을 잃고서
배 난간에 표시하지 말지니
하얀 눈 속의 달빛이여!
바람결 꽃향기 속에
그대 얼굴 언제나 보네.
三際求心心不見 兩眼依前對兩眼 不須遺劍刻舟尋 雪月風花常見面
삼제구심심불견 양안의전대량안 불수유검각주심 설월풍화상견면
격외시이지만 산승은 시적 아름다움을 자아내기 위해 많이 의역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야부대사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를 통해서 얻을 바 없는 그 마음을 잘 드러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종경화상(宗鏡和尙)도 게송을 읊었습니다.
마음의 눈이 통하여 법계에 두루하니
무궁한 작용 속에 자취 없도다.
물안개 걷힌 강이여! 높은 하늘이여!
밝은 달과 갈대꽃은 가을하늘에 닿았구나.
心眼俱通法界周 恒沙妙用沒踪由 雲收江湛天空闊 明月蘆花一樣秋
심안구통법계주 항사묘용몰종유 운수강담천공활 명월노화일양추
종경화상 역시 진공묘유 도리를 낭만적인 시에 담아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세상사람 수준에 맞추어 본다면 과거ㆍ현재ㆍ미래라는 시간적 개념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공간에 의해서 분별되므로 공간을 인식하지 않는 순간 시간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공간은 시간에 의해 분별되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만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간은 시간을 통해서 느끼고 시간은 공간에 의해 느낄 수밖에 없으므로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인식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태어나서 한 살 두 살 흘러가다 7, 80살이 되면, 그 흐름을 인식하겠지만 만일 사람이 없다면 텅 빈 허공이 되는데 거기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이란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처럼 사람이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시간이 공간에 의해 인식된다면 시간은 공간에 의해 존재하고 공간이 시간에 의해 존재한다면 시간과 공간은 실재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일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만물과 만법은 일체가 됩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서 왜 일체동관(一體同觀)인지 이렇게 추리하여 깨우칠 수 있습니다.
승조법사(僧肇法師)와 금강정신
지금 우리가 보는 《금강경》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본인데 구마라습의 제자 가운데 승조법사(僧肇法師)라는 출중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승조법사는 《물불천론(物不遷論》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거기에 "만물은 한 뿌리다.[萬物同根]" 라고 했습니다. 바로 금강경에 일체동관(一體同觀)이라는 본 장의 뜻과 일체하는 것입니다.
《물불천론(物不遷論》이란 만물은 옮겨가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말은 만물의 근원은 둘이 아니기에 뿌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조법사의 《물불천론》뿐만 아니라 법사의 근본정신은 《금강경》의 정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승조법사가 워낙 출중한 도인이다 보니 당시 황제가 재상을 시키려고 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황제가 대노하여 죽이라고 했습니다. 형장에서 죽기 전에 마지막 한마디 말을 하라고 하니 게송 한편을 읊고 눈을 감았습니다.
사대육신에는 본래 주인이 없고
오온 또한 텅 빈 물건이로다.
장차 흰 칼로 이 목숨 베려고 하나
마치 봄바람 베는 것과 다름없구나.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刃 猶似斬春風
사대원무주 오음본래공 장두임백인 유사참춘풍
승조법사(僧肇法師) 역시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금강경》을 번역할 때 글을 받아 적었으니 《금강경》의 이치를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일체동관(一體同觀)의 이치를 만물동근(萬物同根), 즉 만물의 근원은 같다는 것을 설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승조법사는 가실 때까지 《금강경》 정신에 부합되는 게송을 읊고 갔으니 이 때문에 승조법사야말로 《금강경》의 정신에 가장 투철한 삶을 살아가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장에서는 무아ㆍ무인ㆍ무중생ㆍ무수자 이 가운데에서는 과거ㆍ현재ㆍ미래와 만물 만법이 공했기에 한 법도 따로 얻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일체 만법은 오직 한 마음뿐이라는 도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가 만일 이러한 법에 의지하면 결코 세상과 다투지 않고 세상 속에서 초월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시비분별하는 것은 모두 나와 남을 둘로 보기 때문에 이기심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다르지 않고 만물이 한 뿌리라면 저절로 마음은 적정에 들어가게 되므로 현실적 삶에 있어서는 단지 연기론적 세계관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계에서는 이 세상 무엇과도 다투지 않고 온갖 갈등과 모순을 보아도 거기에 초연하고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성불하십시오. _()_ _(())_
출처 : 큰 마음 카페 원인 스님 강설 <금강경 요점 강설>
|
첫댓글 원인스님의 귀한 금강경 강의에 수희찬탄 드립니다.
나무금강반야바라밀 나무금강반야바라밀 나무금강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