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의 잠
티벳 북부 상그릴라에서는 어디를 딛어도 변방이다 수요일을 종일 걸어 수요일에 도착하는 히말라야 설산 아래, 기원을 알 수 없는 기침처럼 눈발 뿔뿔이 날린다 왜 하필 여기인가 무지의 끝은 무죄인가 정상은 언제나 조금씩 비껴 있다 높낮이가 따로 없는 곳에서는 정상이 어디냐고 묻기 어렵다 무한정 짐을 지겠다는 포터는 제 몸을 가장 무거워한다 마른 줄기 같은 다리를 씻어 바위 위에 널어 두고 피로한 발걸음을 말린다
바로 앞줄에서 낮이 끊기면 캄캄한 어둠을 이어 붙이고 걸어야 한다 한 발씩 걸으면 한 발씩 어두워지는 길, 앞서간 시간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혀를 대보면 사지로 뻗어오는 시큼한 별빛들이 이국의 밤을 맛있게 구워 놓는다 더는 갈 수 없을 때 거기가 정상이다 이불도 없이 누워 낱개 분양받은 한 평 하늘에 플러그드. 서울에서 잠들면 북안까지가 국경이고 네 옆에 누우면 너 이전이 국경이다 오늘 밤 나는 너 이후에서 잠든다
싸움의 기술
귀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덜커덩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들어오네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은 딱 질색이야
내 혐오는 너무 질긴 게 탈이지
예고도 없이 불이 나간 객차가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만 실컷 울어보자고
결심했어
그러나 불이 켜지고도 나는 줄곧 울고 있었지
계략이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
스스로 호랑이라고 믿는 날랜 살쾡이 어느새
손바닥에 이겨 붙었던 흙먼지 탈탈 털고
휘파람을 부네 먼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귓속에 장착해 둔
그러나 고작 너는 눈 꼬리 긴 살쾡이
나는 차라리 우아한 패배를 원하네
귓속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명백하고도 무거운 이 바퀴를 달고
그리 슬프지 않은 저녁에 당도하고 싶을 뿐이야
가도 가도 캄캄한 울음 속을
그 남자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결국 이 싸움의 패인은 울음이었으나
그렇다고 네가 이겼다는 증표는 아니야
어느 온순한 영화의 반전처럼
이 울음의 기차는 또다시 너라는 간이역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을 덮치게 될 것이므로
오래된 극장
다시 당신에게 가 봅니다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너무 깜깜한 당신 때문에
외로움을 물컹 만지고 말았어요
순해지는 감정이 순간 딱딱해지고 말았어요
허물어진 계단 앞에서 생각하니
내 생도 전반적으로 어두워요
고작 내가 가진 반경만 익숙해질 뿐
필름은 가끔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여주는데
나는 왜 비가 오지 않나요
고개를 드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앉아있나요
당신이 잘 열리지 않으니
닫히지 않는 것 당연해요
어두운 실내에서는 왜 소리죽여 울어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구보다 출구가 더 많다면
빛이 더 잘 새어들어 오는 것 당연해요
한 번도 상영된 적 없으니
종영되지 않는 것 당연해요
사과 씨를 삼키면 사과가 열릴까 걱정하는
밤이 길어집니다
오래된 극장을 삼켰으니 오늘 밤
늙고 외로운 극장이 가득 열릴 거에요
골목의 이유
그는 진정 후회하는 감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처음부터 절단된 골목을 집어 올렸던 거지
기호에 따라 나눌 때
우리가 가진 건
울음의 일부
설움의 외부라고 해도 좋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뜯겨져 나올 때마다
울음의 가치는 놀랄 만큼 증대되었다
나는 왜 아직도 구태의연한 의자처럼
아버지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계속 살아남아
파충류처럼 뒷다리 접는 자세를 연습한다면
유사시에는 어떤 경계도 펄쩍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토가 새로울 것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생을 모두 건너야 가능한 일이다
아침은 날마다 새롭게 재편되었으나
저녁의 방향으로 어깨를 기울이는 골목은
등(燈)을 놓치고 빛을 놓친
빛을 놓친 후 등을 놓친 가로등처럼 조용하다
나는 아직 골목에 있으며
아버지와 내가 굳이 소비한 감정은 치외법권의 일,
여기를 벗어나려면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유리창
그는 내가 있는 세계를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보여주었다
주로 평면이었으며
검은 그림자를 부욱 찢어 칼금을 보여주기도
반짝이는 이마에서 꺼낸 생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루 두 페이지씩 읽으면 날이 저물었다
나는 몽환적인 그의 둥근 달을 좋아해
노란 색을 띤 몽환은 점점 마르고 차차
부푸는 속성을 지녔다
까만 씨처럼 몰락했을 때
내 온전한 배를 찢고 핏덩이를 쏟아내던
그것은 허구처럼 생생했으며
나는 주로 그 안에서 사육되었다 하지만
나를 먹여 키운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안다
그의 차가운 심장을 문지를 때 나는 북아프리카 사막여우의
추위에 가 닿았다 별이 박힌
밤의 퀼트가 자주 내다 걸렸다 추위의 바깥
검은 장갑 낀 손이
클릭, 클릭할 때마다 생성되는 어둠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던 밤
나는 내가 다량의
위험한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안다
그는 깜깜한 먹지 같은 비린내를 풍기고 서 있었다
손톱이 길게 자란 아스팔트 위의 낙타처럼
그가 쳐놓은 오랜 장막을 찢으려 달겨들고
총성처럼 그가 고함을 쳤을 때
나는 곧 열넷과 아홉과 마흔 세 개로 분할되었다
납작해진 아홉이 바퀴처럼 혀를 굴리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세계로 이동했어요
우리의 감각은 깨졌거든요
검은 색 물감을 쭈우욱 눌러 짜놓은 허공은
총성 뒤에 따라오는 냄새로 붐빈다
두 개 세 개 그리고
여섯 개의 내가 다시 열리고 다시 닫힌다
깨진 창은 더 이상 깨지지 않을 것이다
유정이: 1963 천안출생, 1993 현대시학 등단
시집 : <내가 사랑한 도둑>, <선인장 꽃기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