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사람의 심리(心理)
삼천리 반도 곳곳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 후미진 곳, 은밀한 곳에 차고 넘쳐나는 쓰레기들을 보면서,
이 강산은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 질펀하게 놀고 간 자리에 어김없이 남는 쓰레기들,
그것은 우리의 황폐한 정신세계를 단면으로 보여주는 산 증좌이다.
경제의 논리를 철두철미하게 적용시키는 영악한 잔머리의 실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물은 빨아 먹되, 쓴물은 철저히 뱉어버리는 거기에, 좋은 것은 내가 취하고,
궂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전가하는 거기에 못 말리는 우리 인생의 딜레마, 더러운 성정(性情)이 있다.
물론 개중에는 말끔하게 뒷정리를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이나 훈육으로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나마 쓰레기 강산을 면하고 있다.
물론 환경미화원들이 대개 수거를 하고 치운다.
한쪽에서는 질펀하게 어지르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치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는 즉, 직업 창출의 한 방편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다면 어안이 벙벙하지만 (?)
여하튼 우리 인생은 영양가는 내가, 맛없는 것은 자네가 하는 식의 의식이 팽배해 있다.
물론 교양 있는 사람들, 질서와 규범이 체질화된 사람들이야 자기 앞가림을 어느 정도 하지만,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무질서의 극을 달린다.
자기의 유익과 이익을 좇아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로 치닫기 때문에 이런 자들이 버글거리는 곳에는
늘 시끄러움과 함께 왁자한 고함이 끊이질 않는다.
왜 그런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와 떼를 쓰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지와 만용으로 가끔은 교묘한 술책과 꾀로
불법과 탈법과 편법 등 온갖 동원할 수 있는 가용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장삼이사와 갑남을녀의 보통으로 사는 방식이다.
공의와 정의에 입각하여 정직과 성실을 식물로 하여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정직하게 참되게 살면 무엇인가 손해 보는 것 같고,
잔머리와 잔꾀로 용을 쓰고 살면 무엇인가 잘 될 것 같은 자가당착 내지 자기기만으로 일관하는 그런 부류인 것이다.
무엇으로 이 병든 마음을 고칠 수가 있단 말인가?
인력으로는 불가항력적인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이 상실한 마음, 박토에서 나는 질려(疾癘)와 같은 마음을 무엇으로 고칠 수가 있단 말인가?
도덕과 윤리, 철학과 규범으로 치료할 수 없는 거기에 온갖 사람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지만 별무신통하다더라.
신령한 빛의 쪼임을 받아야 위로부터 나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혈과 육에 속한 육정(肉情)을 이겨내고, 참아내고,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힘써도 안 되고 수양과 도통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
수많은 도덕군자들, 곧 지자(智者)와 현자(賢者)들이 온갖 방법과 그 수단을 강구해보지만
실패했다는 것이 정설이니 참으로 낭패인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얼추 대강 덮어본 것 같으나 그게 다 동족방뇨(凍足放尿)요
‘게 등짝에 소금 흩기’라 우선 보기에는 된 것 같으나 그 뿌리와 깊이는
도통 변할 줄을 모르니 헛수고로 해도 이만 저만 헛수고가 아닌 것이라.
사람들의 장탄식(長歎息)이 이어지고 오매불망(寤寐不忘)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으니
이게 다 ‘빙산의 일각’의 놀음이라. 인생은 근본부터가 한마디로 싹수가 노란 것이라.
도리 없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다 각개전투에 골몰하더라.
이게 바로 군대 전술 용어로 ‘각개 격파’라. 재수 없이 옴이 오른 사람은 이 구석에서 깨어지고
저 귀퉁이에서 쥐어 박히니 힘없고 맥없고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참 그 신세가 처량하더라.
예로부터 민초(民草)들은 설움을 많이 받았으니, 원래 체질은 공통으로 물려받았지만
인간 세상사 드라마 펼쳐지는 것은 사람 보기에 영 그게 아닌 것이라.
심사가 뒤틀리고 배알이 아파도 한참들 다 아팠으니 이게 다 이란격석(以卵擊石)이라
할 수 없이 그냥 된통 당했지만, 지금은 시절이 좋아서 한 그물에 쌓이지만 여전히 쓰레기는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더라. gae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