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동지와 헤어지고, 새 동지와 만나고
오전 회의에서 한고할 두 곳 중에서 나와 순희 그리고 조 동지 세 사람이 이번에도 한 조가 되어 방동고개 마루에 배치 받아, 셋은 올라갔다. 이번에는 조 동지가 4.5구경권총을 받아 허리춤에 끼고 나왔다. 물론 초동면 지서에서 빼앗은 것인데 탄창에는 실탄이 꽉 찬 것이다. 나는 삽과 곡괭이를 메고 잘 드는 낫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나왔고, 순희는 이불을 울러 메고 나왔다. 어젯밤 잤던 곳으로 갔더니 구덕에 깔린 갈잎이 바닥에 다져있어 그것은 곡괭이와 낫으로 끌어내고 구덕에 주변 마른 흙을 긁어모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먼저 소나무 갈비를 두텁게 깐 다음 갈잎을 수북하게 구덕에 거의 차도록 채워 넣었다. 그 위에다 이불을 펴고 그 안에 들어갔더니 푹신한 게 오늘밤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나와 밀양읍 쪽으로 내려가는 좀 널찍한 길에서 구덕을 잘 보이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잘라 구덕 쪽을 가렸다.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고 구덕 속에 들어가 쉬었다. 날씨는 바람이 그치자 제법 햇살이 도타워져 푸근했다. 한 숨 쉬게 되자 내일 설날이 생각났다. 밀양 집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셔서 설 제사는 어떻게 지날 것인지, 아마 구지에서 아버지가 지내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지만. 순희는 집이 바로 산 밑이라서 내일 일찍이 내려가 제사 참사를 하겠다고 한다. 사실 농잠학교는 시위운동도 「학련」의 방해로 상당히 축소되고 말았기에 그 주동자라 해도 눈에 띠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훨씬 기울었다. 우리가 은신하고 있는 곳은 주능선의 동쪽이라서 해는 이미 능선에 가려졌다. 햇살이 없어지자 어째 어깨가 조금은 쌀쌀했다. 그래서 나는 좀 일찍 내려가 저녁식사를 하고 오자고 했다. 그러자 조 동지는 셋 다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특히 이 목은 아래 방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비울 수는 없는 곳이므로 무장한 자기가 남아 있겠다면서, 식사를 끝내고 올라올 때 자기 것을 가져다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나와 순희는 그렇게 하기로 동의하고 내려갔다. 방동 동네로 내려가 본부로 가서 한고 장소 작업을 끝내고 조 동지가 입초 중이고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조 동지 식사를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저녁식사를 알리는 징소리가 울렸다, 15, 6명의 동지들이 마당에 깔아놓은 덕석에 둘러앉았다. 부엌에서 밥통과 국통을 내와서 덕석 가운데 놓고, 주발과 대접 그리고 접시가 나오고 김치와 나물과 장아찌를 담은 큰 대접이 나왔다. 배식을 맡은 동지들이 각각 밥, 국, 그리고 찬을 담아 둘러앉은 동지들 앞에 갖다놓았다. 배식이 완료되자 누구의 구령도 없이 똑같은 소리로, “잘 먹겠습니다.” 마치 합창하는 것처럼 인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쯤에서 숭늉 통이 나왔고 거기에 담긴 쪽박으로 조금씩 빈 밥그릇에 부어 마시고는 그릇을 덕석 가 일정한 곳에 포개어 놓았다. 그리고서는,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나간다. 이러한 격식이 정말 자연스레 정해졌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이미 준비해놓은 죽세공으로 만든 도시락 곽에 담은 조 동지의 저녁식사를 받아 나왔다. 그리고 바로 가려다가 사랑방으로 들어가신 아제와 할배들 세 분에게 축담에서 인사를 드렸다. “할배 그리고 아재, 저 식사 마치고 방동재로 갑니다. 안녕히 주무시이소.” “오냐, 밤에 추울 텐데 조심하고.” 라고 죽서 할배가 대표로 인사를 받으셨다. 나와 순희는 주먹만 한 삶은 감자 세 개와 각가지 곡식을 빻아서 찐 떡 세 뭉치를 무명수건에 싼 것을 받아 쥐고 숭늉을 담은 주전자를 들고 조 동지가 기다리는 고갯마루로 올라갔다. 그날 밤은 바람이 없어서 추위는 한결 덜했다. 그래도 아침에 숭늉주전자가 얼어붙어서 기온은 여전히 영하이었다. 불침번을 서기로 했는데, 두 사람은 초저녁과 밤중을 맡고 나는 3시 이후를 맡았다. 초저녁을 맡은 순희와 귓속말로 소곤거렸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리고 좀 잤는지 곧 교대했다. 모두 시계가 없어 얼마를 잤는지 아무도 잘 모른다. 그저 잠을 깨면 교대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젯밤은 추위로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지 두 사람은 이불을 머리까지 푹 덮어쓰자 모두 푹 잤다. 대구 이모가 사준 털실 모자를 귀까지 푹 쓰고 자다가 이불 밖으로 나와 아직 어둠이 주인인 밤, 땅바닥에 다 한 줄기 깔기고 나니 기분 좋은 진저리가 났다. 나온 김에 능선에 올라 동녘을 바라보니 아직 새벽은 멀었다. 저 멀리 밀양읍내의 가로등 몇 곳이 깜박거릴 뿐이고 대체로 어둠의 바다이다. 두 사람은 세상모르게 자는데 나만 홀로 잠깨어선지 시간이 지독하게 지루했다. 처음은 동천이 희붐한지 어떤지 모르다가 어느 사이에 확실히 새벽이다, 라고 하는지 부염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1948년의 설날, 음력 설날이 밝아오는 것이다. 이때까지 설날마다 기다렸던 겨레의 해방, 그러나 하나의 나라를 기어이 반 동강내어 꼭두각시정부를 만들려는 미제의 손가락에 춤추려는 친일주구와, 친미사대의 새로운 꼭두각시까지 한데다 모아 판을 치는 세상으로 되려는 세월의 그 설날, 이런 설날은 우리가 결코 반길 수가 없는 설날이다. 이런 생각으로 모대기는 동안 점점 빛이 더하여 내 주위의 모습이 드러나고 하늘에는 어둠을 무찌르듯이 붉은 빛깔이 뻗치면서 동천이 청홍으로 퍼져 오른다. 그렇다. 신새벽의 어둠을 무찌르는 청홍의 빛처럼 우리는 해방된 조선의 빛으로 뻗쳐오르자! 나는 구덕에 들어가서 소리쳤다. “조 동지, 이제 새해 설날의 새벽입니다. 동천에 뻗친 청홍의 빛을 맞이합시다.” 두 동지는 일어나 구덕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름다운 조선의 새벽하늘을 보았다. 비록 아직 자주독립의 조선하늘은 아닐지라도 기어이 자주독립의 우리 하늘의 새벽으로 해야 할 조선의 청홍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자던 자리를 정리하고 이불을 묶어 짊어지고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어제 군당에서 하달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거기에 관해 토론한다고 했다. 토론은 면당의 당책이 주도하여 진행되었다. 먼저 군당에서 하달된 지시사항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2.7구국투쟁의 봉기로 수세에 몰리게 된 적들은 곧 반격을 가해올 것이다. 초동면과 청도면의 투쟁에 대한 반격을 획책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현재의 집결장소를 비워 역량을 보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 설날의 세배내왕을 이용하여 예정된 장소로 이동할 것이다. 따라서 종심이 없는 방동기지는 즉시 해체할 것이다. 3. 지명 수배되고 있는 동지, 노출된 동지는 군당에서 소환하여 임무를 부여할 것이다. 소환 장소는 개별적으로 통보할 것이다. 그밖에 동지는 귀가하여 그 지역의 소속대중단체 또는 당 세포에서 활동할 것이다. 4. 이 지시사항은 2월 10일 중으로 집행할 것이다.
이로써 나와 강성호는 3항의 개별적 소환대상이고, 박순희는 귀가하여 대중조직에 흡수되어 운동하게 된 것이다. 군당의 이러한 지시사항을 집행하기 위하여 세 사람의 지도원이 나와 있었다. 제일 먼저 초동 오방동 경찰지서 습격투쟁에 참가한 동지들 중 일부 4, 5명은 귀가했고, 7, 8명은 노획한 무기를 가지고 한 지도원의 인도로 종남산 능선을 북행하여 마흘리로 내려, 그날 저녁 어둠을 이용해서 대항리로 건너 화악산으로 들어가, 청도군의 산서지역 역량과 결합하여 화악산의 야산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초동면 당의 핵심인 계음아재와 두 할아버지는 군당에서 지정한 면당의 아지트로 이동했다. 이 세 분 중 한 사람은 방동 동네 상가 집에서 상복을 빌려 입고 설날의 시묘상주로 가장하여 군당에서 새로 마련한 아지트로 이동했다고 한다. 강성호는 키도 크고 인물도 훤출한 지도원을 따라 갔다. 나와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당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방동마을에서 헤어졌는데, 이것이 성호와의 영별이 되었다. 나중에 들은 소문인데 당시 남조선 혁명조직의 핵심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북 공화국에다 설립한 「강동정치학교」로 갔다고 한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학습을 마치고 월남하는 길목에서 이남 특무들에 의해 사살 당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실은 이북 공화국에서 종파분자를 처단할 때 그 재판기록에서 당에 침투한 첩자 백형복의 죄상에서 상세하게 나와 있다. 강성호도 그런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생각되어 정말 가슴 아프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 지도원을 따라 설날 오후에 삽개로 내려와 한 아지트에서 밤이 오기를 기다려 저녁밥을 먹고 어둠을 이용해서 출발했다. 제대리로 해서 감내다리를 건너 북으로 죽 올라가다가 북성로로 나와 추화산 북쪽 공동묘지 사이의 안부를 넘어 긴늪 다리를 건넜다. 다원 동네 앞들을 남으로 질러가면 단장천이 나오고 거기에는 구미동네로 가는 징검돌다리가 놓여 있다. 그 돌다리를 건너 산 쪽으로 난 수레길을 가면 언덕 위에 커다란 기와집이 있었다. 지도원은 그 집 대문간 채에 난 키 높이쯤 되는 창문에다 신호를 두드렸다. 창문이 열리자, 지도원 동지는 담배를 한 가치 물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자기 얼굴을 환히 보였다. 곧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고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이 30쯤 되어 보이는 농민이 나와 지도원과 악수를 하면서 “이처럼 어두운데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지도원은 나를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농민은 우리를 데리고 서너 간이나 되는 기다란 집에 맨 안 쪽의 방으로 인도했다. 방안에 들어가자 나는 주인이 앉기를 기다려 인사를 하려고 문 곁에 그냥 서있었더니 주인은 나에게 말을 했다. “동무, 인사하려고? 됐소. 우리 인사는 악수로 하는 겁니다. 통성명은 안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꼭 해야 할 때는 조직명, 말하자면 가명이지요. 동무, 가명이 있소?” “아직......” “우리는 서로 만나도 이름도 없고 나이도 없고, 그렇게 만나지만 내 모가지를 동무에게, 동무의 모가지를 나에게 서로 걸어놓고 살지요. 그 얼마나 가까운 사인가요! 모가지를 주는 것 이상 더 중한 것은 없다오.” 하고 나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정말 굳은 악수였다. 지도원 동지는 나에게 말했다. “동무,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내일은 더 산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말고 푹 잡시다.” 농민은 말했다. “아직 시간은 9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자려고? 잠깐 기다리시오. 그래도 오늘은 설날인데 우선 접구라도 해야지.” 그리고선 밖으로 나간다. 좀 있다가 떡국을 끓여왔다. 그 반에 여러 가지 제수음식과 과일로 차려놓았다. 지도원 동지와 겸상으로 나온 음식을 출출한 김에 맛있게 비웠다. 두 선배를 만나 이야기하는 동안 이게 동지라는 것이구나, 혁명동지로구나, 하고 이때껏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나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