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천 관련 고문헌
요즘 평택에서 안성천 하류 평택 부분을 ‘평택강’이라고 한다는 뉴스에 안성에서는 상당히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안성천의 내용을 묻는 문의가 있어 한번 찾아보았다.
삼죽면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안성 시내를 가로질러 평택에서 서해로 흐르는 안성천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682년 동여비고에는 남천(南川) 으로 표기되어 있다. 남천은 안성읍의 남쪽에 있는 하천이라는 뜻이다.
1871년 안성군읍지급읍사례책(安城郡邑誌及邑事例冊), 1872년 안성지방지도, 1898년 안성군읍지에는 영봉천(影鳳川)이라고 되어 있다. 영봉천이라는 말은 안성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뜻이다.
1647년 백주집, 1904년 경부철도 관련 일본경찰의 출장복명서, 1907년 8월 황성신문과 1907년 10월 대한매일신보에는 안성천(安城川)으로 되어 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지금의 평택시 안궁 3리 부근이다. 이때 이곳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은 ‘건너기 쉬운 안성도(渡ルニ易ギ安城渡)’라는 문구를 넣고 군가를 지어 퍼트렸다. 따라서 일본에서 안성도라고 한 것은 당시 지명이 안성천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안성천을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지명으로 일제의 흔적으로 생각하나. 이는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1647년 문헌에도 보이는 아주 오래된 지명이며, 일제가 우리나라의 지명에는 아직 관여하기 전인 1904년 및 1907년 문서에도 안성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안성천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남천, 영봉천, 안성천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으나 1900년 이후부터는 안성천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 백주집(白洲集)
三月十六日。行茶禮後。出宿一隱家。是日行卅里。十七曉發。早飯振威川北。中火于陽城懸內。經肅羽家。弔其墓。吳翮,崔逸皆在。吳翮送 至安城川上。是夕。宿安城郡內粉月家。太守李敬仁來。是日行九十里。十八曉發。早飯竹山。
3월 16일. 다례를 행한 후 가서 일은 댁에서 묵다. 하루 삼십리를 가다. 17일 새벽에 출발하다. 진위천 북쪽에서 아침밥을 먹다. 점심을 양성현내에서 먹다. 숙우 댁을 지나 묘에 조문하다. 오핵 최일 모두 다 있다. 오핵을 보내다. 안성천상류에 이르니 저녁이 되다. 안성군내 분월 댁에 숙박하는데 태수 이경인이 왔다. 하루에 90리를 가다. 18일 새벽에 출발하다. 아침을 죽산에서 먹다
조선중기 문신 이명한의 문집 1647년 간행
○ 立田警部復命書進達ノ件 1904년 07월 16일
北線中永登浦ヨリ水原迄約八里間ノ工事ハ旣ニ完成シテ今ヤ營業列車ハ一日ニ二回ツゝ同地間ヲ往復シ相應ノ乘客アリ水原ヨリ烏山·振威·平澤·成歡·天安等ヲ經テ全義迄約十八里間ハ永登浦ヨリ水原ニ至ル線路ト同樣ナル平坦線ニシテ差シタル難工事ナク僅カノ切取リ工事ト數ケ所ノ架橋工事アルノミニテ他ハ築堤工事ナレハ悉皆完成シテ唯烏山川·安城川·天安川等二三ケ所ノ架橋工事未タ完成ニ至ラサルヲ以テ不完成ノ場所ニ限リ本線ノ側ニ沿ヒ假線ヲ設ケテ軌道ノ布設ヲナシ全義迄ハ目下一日一回ツゝ建築列車ヲ往復シテ多量ノ鐵道用材ヲ運搬シツゝアリ
○立田(다츠다) 경부 복명서 진달의 건 1904년 07월 16일
북선 중 영등포에서 수원까지 약 80里 간의 공사는 이미 완성하여 지금은 영업열차가 하루에 2회씩 그곳 사이를 왕복하여 상당한 승객이 있다. 수원에서부터 오산·진위·평택·성환·천안 등을 거쳐 전의까지 약 180里 사이는 영등포에서부터 수원에 이르는 선로와 마찬가지로 平坦線으로서 이렇다 할 난공사도 없고 약간의 절취 공사와 몇 군데 架橋 공사가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築堤 공사이므로 거의 완성하였다. 다만 오산천·안성천·천안천 등 2, 3곳의 가교공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되지 않은 장소에 한하여 본선 측에 따라 假線을 설치하여 궤도를 포설하였고, 전의까지는 목하 1일 1회씩 건축열차를 왕복하여 다량의 철도용재를 운반하고 있다.
●船價請求
內部에셔 度支部에 照會되 警務顧問通知를 據야 安城川及錦江 漢江에 年年히 河水汎濫야 人命被害가 不尠 즉 河舟 二十隻을 購入排置야 臨時救渡이 事係急務이니 該船價額 一千五百十一圜六十錢을 筭外支出라 얏더라
●선가청구
정부에서 도지부에 조회하되 경무고문 통지를 근거로 하여 안성천 및 금강, 한강에 매년 강이 범람하여 인명피해가 적지 아니하므로 즉시 선박 20척을 구입 배치하여 임시로 다닐 수 있게 함이 급선무이니 선박값 1511환 60전을 예산외 지출하라 하였더라
황성신문 1907년 8월 6일
○ 地方消息(지방소식)
▲二十六日발鳥致院電을 據則昨日午前二時頃에 義兵約一百六十名이 平澤郡衙을 來襲대 外三門及分派所門을 破傷며 郡吏을 毆打고 水原方面으로 走向얏고 再昨日夜에 安城川高湖對岸에 義兵에 潛伏을 疑訝야 成歎驛日守備隊에셔 日兵과 巡査를 派送얏다고
▲ 26일발 조치원에서 전한바 어제 오전 2시경에 의병 약 160명이 평택군청을 습격하였는데 외삼문 및 분파소문을 부수고 군직원을 구타하고 수원방면으로 도망하였고 그저께 밤에 안성천 고호대안에 의병이 잠복함을 의아하게 여겨 성환역 일본 수비대에서 일병과 순사를 파견하였다하고
大韓每日申報 1907년10월29일
첫댓글 홍원의 학예사님 페북 내용을 공유합니다.
평택천도 아니고 평택강이라니...
<할많하않>입니다.
이웃이고 뭐고 없네요. 근데<할많하않> 이 어느세대 언어입니까. 뭐라 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