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르고 두들겨맞아
증언자 : 김재희(남)/이현희(모)
생년월일 : 1955. 11. 7(당시 나이 25세)
직 업 : 대학생(현재 건설회사 근무)
조사일시 : 1988.10
개 요
5월 18일 결혼식에 갔다가 오는 길에 뒤에서 내리치는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머리를 다쳤다. 김재희 씨의 어머니가 남원에 있는 아들을 대신해서 증언하고 있다.
평온한 가정
40여 년 동안 교직생활로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내 남편은 부정이나 남을 속이는 일은 한번도 하지 않은,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원칙적이고 완고한 사람이다.
강진군 옹천면 기자리에서 농사를 짓던 농사꾼의 8남매 중 맏아들이라는 위치가 남편을 남들 표현처럼 고지식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성실하고, 또 어떻게 보면 소심하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정년을 얼마 안 남긴 남편은 국민학교 평교사로 올해 환갑을 맞았다.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결혼초부터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라 아이들 출생지도 제각기 다르다. 이렇게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7명이나 되는 시동생들 뒤치다꺼리에 지치지도 않았는지 우린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지금은 교사들의 대우가 많이 좋아졌지만 1950년대, 60년대만 해도 교사들은 3, 4만원밖에 안 되는 박봉에 시달리면서 보너스도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 달 월급 3, 4만 원은 시동생들 뒤치다꺼리와 우리 식구 생계유지에는 형편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이렇다 할 기술도 갖지 못한 나는 그래도 옷감이나 기타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 등을 보따리에 이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그렇지만 생활조건이 좋아졌다거나 풍요로워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겨우 식구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남편의 근무지에 따라 자꾸만 바뀐 환경 탓으로 우리 애들은 소극적이고 소심한 아이들로 자라났다. 옛 속담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지만, 우리 6남매는 나쁜 길로 빠지거나 사고쳐서 부모를 속상하게 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애들이 커감에 따라 교육문제로 1969년 남편을 제외한 전식구가 광주로 올라왔다. 남편은 5년 전인 1983년도에야 광주로 전근을 왔으니 거의 14년 동안 혼자서 자취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편하다는 말 한 번 하지 않고 식구들을 위하여 묵묵히 살았다.
이러한 남편의 성격이나 기질을 닮았는지 6남매가 모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내 딴에는 알뜰하게 절약하면서 산다고 하는데도 우린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광주에서의 생활은 애들 가르치고 키우느라 허리띠 졸라매고 정신 없이 살았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가끔 산다는 것이 복잡하고 답답해질 때면 20여 년 넘게 써온 일기장을 꺼내 보기도 한다. 이처럼 평범하기만 하던 우리 가정에 1980년 새로운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나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만 해도 아주 슬퍼했다. 그래서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는 마땅히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희의 부상
그해부터 세상이 시끄러워지더니 1980년 봄에는 전국이 꽤나 시끄러웠다. 우리 재희는 그때 성인 경상전문대학 무역학과 2학년이었다. 재희는 남편이 영암군 장암국민학교에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원래 말이 없고 묵직한 아이라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몸도 건강하여 벼 한 섬 정도는 거뜬히 들어올렸다.
1980년 5월에는 다른 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8일 시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주월동 집에서 가톨릭센터 7층에서 결혼하는 친구 형의 결혼식에 가봐야 한다면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오후4시경에 느닷없이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재희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시내가 살벌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매캐한 냄새로 눈이 아프고 목도 따끔거렸다. 병원에 어렵사리 도착해서 보니 재희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데다 머리는 12바늘이나 꿰매져 있었다. 의사 말이 군인들이 청년들만 보면 무조건 개패듯이 두들겨 패니까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듯 싶다면서 일주일 후에 실을 빼라고 하였다. 병원에서는 치료비도 받지 않고 조심해서 가라고 염려해 주었다. 재희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결혼식에 참석한 후 고등학교 동창인 김봉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금남로를 따라 유동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나서 봉주랑 같이 뛰어갔어요. 갑자기 뒤쪽에서 쫓아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동시에 쇠파이프 같은 것으로 머리 후두부를 얻어맞고는 실신 해버렸어요. 그것만 생각나요."
공수부대들은 실신한 재희를 수차례나 더 내리치고 가버렸다고 했다. 같이 가던 친구 봉주는 다행히 아무 일 없어 쓰러진 재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반병신이 되어
그렇게 내 아들 재희는 영문도 모른 채 반병신이 되어버렸다. 그날 이후로 재희는 계속 머리의 통증을 호소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날마다 들려오는 소문은 살벌한 말뿐이었다. 집집마다 뒤져서 청년들을 모조리 잡아간다는 둥, 임산부를 어떻게 했다는 둥 별의별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재희를 저렇게 두들겨 팰 정도면 능히 사람들을 죽이고도 남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날은 21일로 석가탄신일이었다. 차가 다니지 않았지만 걸어서라도 절에 가자고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약간의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설마 나이먹은 나를 어쩌겠느냐 싶어 동원사로 가기 위해 백운동 로터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 죽은 것을 보았다. 트럭에 죽은 사람을 두었는데, 내 눈에는 흡사 죽여서 널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던지 우리 재희가 그나마라도 다행이라 싶었다.
재희는 자꾸만 말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무서움증 때문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충격 때문에 뇌에 이상이 생겨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8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가 쑤시고 몽롱할 뿐 아니라 말문이 막혀 말을 더듬는다. 당시 전남여고 3학년이었던 다섯째 딸 경희가 시위 차량(트럭)을 타고 다니다가 떨어져서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경희는 학교 펜싱 선수였는데 그때 다쳐서 운동도 그만두었다.
딸 혼사길 막힐까봐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일이다. 무엇보다 지난 8년을 재희 때문에 마음 고생한 일을 생각하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가슴이 미어진다.
재희는 그래도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대학에 편입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원대학을 졸업한 후에 취직을 하기 위해 이곳저곳 30여 군데에 취직시험을 치렀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딱히 할일 도 없고 나이는 찼지만 능력없는 재희한테 시집오겠다고 나서는 아가씨가 없어 몇 해를 집에서 있다가 작년 8월에야 중매로 간신히 결혼했다. 결혼 후에 친척의 알선으로 남원에 있는 건설회사에 임시직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는 대로 그만두어야 할 판이라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매우 걱정이 된다.
지난 6월에 5·18 부상자 신고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차례에 걸쳐 동사무소, 시청에 신고를 했는데 증거가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어오라고 했는데,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 병원이 어느 병원인지 확실히 잘 모른다. 광주천변 옆에 있었다는 기억만 어렴풋하게 날 뿐이다. 그래서 정우섭신경외과가 아닌가 하여 찾아갔더니 그때 당시 있었던 의사는 그랜드호텔 옆의 조외과에 있다고 그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조외과로 찾아가 그 의사를 찾으 니 8년이나 지났는데 무슨 기록이 남아 있겠느냐며 모르겠다고 했다. 어찌나 답답하던지 그때 재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김봉주라는 친구를 수소문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서 주소를 찾아 추적한 지 한 달 만에야 경기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나러 갔다. 그런데 봉주마저도 너무 무서운 상황이었던지라 어느 병원인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별 수 없이 인우보증서만 받아가지고 와서 신고를 했는데 어떻게 판결이 날지 모르겠다.
주모자는 처벌되어야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멀쩡한 남의 자식 병신 만들어놓고는 이제 와서 증거가 없다고 오리발 내미는 것이다.
재희는 올해로 서른네 살의 남자로 그 나이면 한참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건만 늘상 비실비실거리는 걸 보면 가슴이 떨리고 울화통이 치밀어오른다.
그래도 우리 부부가 살아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낫겠지만 우리가 죽은 뒤에는 누가 얼마나 신경을 써줄 것인가. 나는 재희 일로 시청에 여러 번 쫓아다니다 부상자가 엄청나게 많음을 알고 무척 놀랐다. 신고하는 절차가 복잡해서 그렇지 실제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전남대학교 해양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막내아들 용희는 저의 형이 5·18 때 부상당해서 그런지 대학생들이 데모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난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혹시라도 아들에게 피해 있을까봐 걱정이다.
내 자식만 생각하는 얌체는 아니지만 재희를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다. 한편으로 학생들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됐다고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그때 허리를 다쳤던 경희는 지금 스물일곱 살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씩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젠 다 나은 편이다.
나는 불교신자로서 부처님의 자비를 항상 생각한다. 하지만 1980년 5월에 정권을 잡으려고 광주시민의 씨를 말리려 했던 사람을 진상만 밝히면 용서하고 화해하겠다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 생각한다. 5·18의 주모자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교훈을 남겨야 한다.
1980년 5월에 벽에 '전두환을 죽이자'고 써 있길래 나는 대체 전두환이가 누군가 했었다. 그런데 그자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어놓은 살인자였다. 너무 억울해서 그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오고 머리가 벌어지려고 한다.
일전에 무등일보 기자가 방문을 한다기에 못 오게 했다. 신문에 난다고 해서, 그것도 한 개인만 난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겠냐 싶었고 또 애들 이야기만 하려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떨려서 이야기 꺼내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5·18 진상규명과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부상자들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 혜택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그때 다친 상처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현실적인 문제는 뒷전으로 밀고 말싸움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후유증으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뭔가 생활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우리들의 이러한 요구사항이 관철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