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이는 1500년 전,
더 정확히 말하면 서기 420년부터 560년 사이에
지금의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아니면 교동 혹은 술정리에 살던
16살쯤 된 여자아이의 이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송현이가 모시던 주인이 죽자
죽임을 당해 주인과 함께 차가운 땅속에 묻힌 순디이
(순둥이의 경상도 사투리)같은 소녀였다.
키는 작지만 다부지고 가는 허리에 길고 또렷한
이목구비로, 한마디로 ‘8등신 처녀’였다.
그녀는 영양결핍과 충치를 앓고 있었지만
아직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없는, 그때까지 오직
주인집을 위해 반복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베짜기였는지 곡식의 껍데기를 까는 일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힘든 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경상남도 문화재위원회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미 2004~2005년 사이에 송현동 6․7호 고분을 발굴하여
일본과의 교류사실을 증명하는, 한반도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녹나무로 만든 배 모양의 목관(木棺)과 함께 280여점의
토기와 장신구, 마구, 무구(武具), 농공구 등을 발굴한데 이어,
2006년 말 송현이가 누워 있던 15호분을 조사 발굴했다.
15호분은 지름 22.4m, 둘레 64.7m, 봉분 높이가 4.37m의
원형봉토분이었고 석실 규모는 길이 8.56m, 너비1.70m,
높이 2.25m, 면적 14.5㎡로서 남북방향을 중심축으로
단면은 사다리꼴, 평면은 장방향으로
남북방향과 동서방향의 비율은 5:1이었다.
발굴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여서 무덤 안이 어지러웠지만
다행이랄까 송현이가 누운 자리는 흙먼지가 덥혀 있고 덜 훼손된 상태였다.
무덤 맨 안쪽에 주장자(주인)가 시상(屍床) 위에 있었으나
거의 훼손되었고, 그 앞쪽에 송현이가, 무덤 입구 쪽으로
남자, 여자, 남자 이렇게 4명의 순장자가 누워 있었는데
이들은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남자들의 DNA는 동일한
것으로 같은 모계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형제 아니면 이종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송현이를 포함한 이들은 쌀과 보리, 콩과 견과류 등
식물류를 주로 섭취했는데 앞쪽의 남자들은 고기도 먹었으며
특히 송현이는 다른 3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 기장 등 식물성을
많이 먹어서인지 영양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면 여기서 송현이가 왜 ‘8등신’인지 살펴보자.
“송현이는 키가 작고(153.5㎝) 얼굴이 편평하며 팔이 짧아서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볼품없는 소녀다. 하지만
신체 측정치를 보면 180도 달라진다. 우선 그녀는 머리의
수직 길이가 19.3㎝로서 키를 머리의 수직 길이로 나누는
등신의 개념으로 보면 7.94등신이다.
현대의 만16세의 평균 등신이 8.27인데 이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8등신이라는 거다.”
또 송현이는 현대 여성들의 로망인 ‘개미허리’를 지녔다.
그녀의 허리둘레는 21.5인치(54.5㎝)로 이것은 현대 만16세
여성의 평균허리 26.2인치 보다 5인치 가량 가늘다.
연구팀은 이 8등신의 몸매를 가진 소녀에게 ‘송현’이라고 이름 지었다.
처음에는 송현동 고분이 비화가야에 속해 있다는 점을 들어
‘비화’라는 이름도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신라냐 가야냐’라는
논란이 거세지자 ‘송현’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꽃다운 나이에 금 귀걸이까지 한 송현이가
주인이 죽었다는 이유로 자기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죽임을 당해
순장(殉葬)되었다는데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물론 아무리 분노하고 태질한다고 해도 역사를 되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영생의 꿈을 충족시키려고 어린 송현이를
희생시킨 무덤의 주인공이 원망스럽다.
그토록 영원한 삶을 꾀했던 주인공이었지만
정작 무덤을 파보자 도굴꾼들로 인해 육신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던가? 도리어 속절없이 희생된 송현이의 육신은
후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복원되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송현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순장제도의 폐해와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순장은 인생(人牲-사람을 제물로 지내는 풍습)과 함께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풍습 가운데 하나로 폄훼되는 장례풍습이다.
특히 사람을 제물로 제사지내는 이른바 인신공희(人身供犧)는
당대 사회의 종교적 또는 신화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936년 발굴된 중국 은(상)나라 유적인 인쉬(殷墟)에서는
무정왕(기원전 1250~1192)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M101 무덤이 발견됐는데, 이때 무려 225명의 순장자와
목이 잘린 청장년층의 인간재물들이 확인됐다. 뿐만 아니라
1997년에 발굴된 191기의 제사갱에서는 1,178인분의 인간재물이
확인됐고 인쉬에서 출토된 복사(卜辭)에서는 사람을 제사로
쓴 예가 1만 4,197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문제는 은(상)나라가 “신을 존중하고 귀신(조상)을 섬기며
국가의 큰일 때 제사를 지내고 군사를 내어 징벌한다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그 은(상)나라가 우리민족의 시류인 동이(東夷)의 일파라는 점이다.
인생제도는 훗날 잔인한 풍습이라 해서 폄훼됐지만
노예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신권사회가
여전히 극성을 이루고 있던 당대의 풍습이었던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위해서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순장제도가 언제 없어졌을까?
중국에서는 주나라 제후국인 진(秦)나라 헌공 원년(기원전 385)에
금지되었다. 하지만 내세의 영원한 삶을 유지하려는 절대 권력자의
욕망에 따라 부활과 폐지를 반복하는데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胡亥, 기원전 229~207년까지 재위)가
시황릉을 만든 뒤 능의 소재가 알려지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작업에 동원된 인부 등 1만명을 생매장했다.
이후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 사라졌다가
명나라 때 부활했는데 성조(永樂帝, 1402~1424년까지 재위)가
죽은 뒤 모두 3천명의 비빈이 순장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순장제도는 신라 지증왕 3년(502)에 폐지되었는데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왕조’에는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했으나 이를 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유전. 이기환 공저 '한국사 기행'을 참고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