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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학살의 역사
제주 4.3 - (1) 4.3의 시작과 끝
제주 4.3은 1947년 3월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이해 3월 1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도로 개최된 ‘3.1운동 기념 대회’에 3만 명 이상의 도민이 참가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선언하자 경찰은 집회의 해산을 시도했다. 남한에서 친미 성향의 정권 수립을 원했던 군정 당국으로서는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도민들의 집회가 가두시위로 발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치는 일이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군중이 거칠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총기를 발사해 여섯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격분한 도민들은 경찰의 공식 사과와 발포한 경찰의 파면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부당하자 도민들은 공동 투쟁 위원회를 결성한 뒤, 3월 10일에 총파업에 들어갔다.
기업체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학교, 심지어 경찰까지 가담하면서 파업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당황한 미군정은 사태 해결을 다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태 해결을 위해 3월 14일 제주를 방문한 경무부장 조병옥의 강경한 자세 때문에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졌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사과의 말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청을 방문해 파업 중이던 공무원들에게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기 때문에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내용의 발언까지 했다. 이보다 이틀 전에는 경무부 차장 최경진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띠고 있다”고 밝히고, 3.1사건과 이후 사태의 원인이 제주도민의 정치적 성향에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당시 미군정과 그 밑의 경찰 수뇌부는 모두가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섬’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경찰은 사태를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 여러 도에서 차출된 300명 이상의 경찰 병력과 그 이상의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제주에 증파했다. 곧이어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쳐 제주도민 2,000명 이상이 체포되고 200명이 구속되었으며, 이로써 제주도민과 미군정은 정면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사태는 해가 바뀌면서 더욱더 악화되었다. 1948년에 미군정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철회하고, 유엔의 주관하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전국에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섬 전체를 휩쓸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고문 치사 사건은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단체들에 대해 도민들이 품고 있던 악감정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3월 들어 미군정의 입장이 상당히 유화적으로 바뀌면서 사태는 진정의 기미를 보이는 듯했다. 이 시기에 미군정은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 지역 단독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주민과의 갈등과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 미군정은 정치범에 대한 특별 사면까지 단행했다. 그렇지만 사태는 미군정이 바라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남로당 지도부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남한만의 선거를 막고자 했다. 본격적인 무장 투쟁의 길이 준비된 것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의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이 주도하는 봉기가 시작되었다. 봉기에 가담한 무장 대원의 수는 500~1,500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대의 무기는 빈약한 편이었다. 무장대는 도내 24개의 경찰지서 가운데 11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 숙소, 우익 단체 간부들의 집도 습격했다. 이 때문에 도내의 행정과 치안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면사무소와 선거 사무소가 연달아 습격당하면서, 다가오는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섬 전체를 휩쓸었다.
심각한 사태에 직면한 미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에 비상경비사령부(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는 1948년 4월 5일에 무장대 토벌을 위해 제주 경찰 감찰청 내에 조직된 경찰 기구였다. 이후 1948년 10월 11일에 창설된 제주도 경비사령부는 김상겸 대령이 사령관직을 맡았던 군대 조직이었다. 여순사건으로 김상겸 대령이 해임된 뒤에는 제9연대장 송요찬이 사령관을 겸직했다.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는 국회의원 재선거를 무사히 마무리짓기 위해 1949년 3월 2일에 조직된 군대 기구였다.)를 설치하고,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육지의 여러 도에서 차출된 경찰 병력 1,700명을 제주도에 즉각 파견했고, 서북청년단도 대거 제주도로 향했다. 4.3 기간 동안 제주도에 들어온 서북청년단 단원은 적어도 800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20일에는 제5연대 소속 1개 대대가 제9연대에 투입되었다.
미군정의 관심은 봉기의 원인과 배경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였다. 어떻게든 ‘빨갱이 섬’ 제주도의 반란을 조속하게 평정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불씨를 신속하게 끄는 데 실패한다면, 단독 선거는 물론 그 이후의 한반도 전체의 사정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의 기대와 달리, 토벌군의 주축인 제9연대의 지휘관 김익렬 중령은 초토화 작전보다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군과 무장대는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불안한 휴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중요한 변수는 미군정의 입장이었다. 미군정의 태도는 군정장관 딘(W. Dean) 소장이 제주도를 직접 다녀간 뒤 강경 일변도로 치달았다. 단독 선거를 눈앞에 둔 5월 5일, 미군정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책 회의에서는 무장대와의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던 김익렬과 강경 진압을 요구하던 조병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뒤, 이튿날인 5월 6일 제9연대의 지휘관이 김익렬에서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면서, 곧바로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무장대는 5월 7일부터 선거 당일인 10일까지 선거 사무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을 납치하고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 결과 제주도의 전체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곳에서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는 큰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사태가 곧바로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는 한동안 소강 상태가 유지되었다. 8월에 와서 불안한 평형 상태는 깨져버렸다. 8월 초에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 지도자들이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 대표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를 떠나자, 미군정은 이때야말로 제주도를 완전히 고립시켜 남한 정국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미군정은 무장대의 투쟁과 제주도민의 항거가 북한과 연계된 체제 전복 음모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8월 중순에 와서 무장대는 토벌 군경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는 8월 25일 최대의 토벌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강력한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8월 15일에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끝나고 남한 단독 정부가 출범하는 순간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다. 새롭게 출범한 정권은 제주도 지역 전체를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다. 10월 5일, 중앙 정부는 그동안 온건한 정책을 고집하던 제주도 출신의 제주 경찰청장을 정권의 구미에 맞는 강성 인물로 교체했다. 1월 11일에는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로부터 다시 6일 뒤에는 제9연대장 명의로,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과 산악 지역을 허가 없이 통행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총살에 처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나붙었다. 곧이어 10월 18일에는 해안이 봉쇄되었다.
토벌대의 조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 유일의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체포되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제주도에 주재 기자를 두고 있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총살되었다. 이제 언론마저 토벌군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는 제9연대 장병 100여 명이 군사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처형된 군인들은 대부분 제주도 출신이었다.
11월 1일에는 제주도 경찰 당국이 경찰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제주 읍내에 거주하던 도청 공무원, 교육계와 언론계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지식인이 제9연대 본부로 끌려가 감금당했고, 이 과정에 제주중학교 교장과 제주도청 총무국장,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 직원들이 살해되었다. 제주 지검 검사를 포함해 법조계 인사들까지 죽음을 당했다. 이제 정부가 어떤 조치를 단행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걸림돌은 완전히 제거된 셈이었다.
바로 이 즈음에 제주도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육지에서 일어났다. 제주도 무장대 토벌의 임무를 띠고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10월 19일에 일어난 이른바 여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위기 의식을 심어주었다. 처음에 크게 당황했던 이승만 정권은 차츰 이 위기를 오히려 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통일 운동 때문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데다,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 이후 최소한의지지 기반마저 붕괴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처한 이승만 정권에게 여순 사건은 잘만 활용하면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숙군(肅軍) 작업을 추진하면서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고, 12월 1일에는 위기 상황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공포했다. 친일파 처단과 통일을 요구하는 세력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있던 이승만은 정국을 일거에 반공 정국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반격을 시도하면서 정권을 강화해나갔다. 바로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1948년 11월 중순에 제주 지역 초토화 작전이 결정된 것이다. 이승만의 전략은 미국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역시 12월로 예정된 미군 철수 전에 제주도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 한반도의 상황을 안정시키고자 했으므로 초토화 작전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초토화 작전은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5개월간 계속되었다. 1948년 11월 1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 가운데 하나인 조천면 교래리를 포위하면서 시작된 작전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낳았다. 작전 지역 내에 있던 169개 마을 가운데 130개가 불에 타버렸고, 3만 명 이상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식량과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이런 가정은 토벌대가 무장대에게 기습당할 경우 확신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토벌대는 마을 주민을 남녀노소, 무장 여부를 막론하고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무차별 학살을 피해 추운 겨울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굶어 죽거나 무장대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살해당했다. 토벌대의 소개 명령에 따라 해변 마을로 내려온 사람들도 학살의 위협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져 있는 경우에는, 특히 젊은이가 빠져 있는 경우에는 ‘도피자 가족’이라고 확신해서 그 가족 모두를 처형했기 때문이다.
학살에는 뚜렷한 원칙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토벌대의 명령과 요구에 응해야 했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꼭 살아남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제주도에서 전개된 초토화 작전은 책임 의식과 규율이 없는 집단에게 총과 권력이 주어졌을 경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규율이 결여된 군경과 복수심에 찬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절대 권력’을 공사의 구분 없이 행사하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켰다. 여성에 대한 강간, 유희적인 살인, 무자비한 참수 같은, 인도에 반하는 행위 가운데서도 특히 극악한 유형의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무장대 일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나 산속으로 도주한 사람을 체포하지 못할 경우에 그 가족을 대신 살해하는 경우도 곳곳에서 저질러졌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범죄는 따로 예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초토화 작전 기간 중에서 학살이 정점을 이루었던 시기는 1948년 12월 중순부터 열흘간이었다. 경비사령부의 지휘부가 1948년 말까지 제주도 주둔 토벌대를 기존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에 성공한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확정한 이후, 제9연대 지휘관들이 부대 교체에 앞서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마지막 토벌 작전에 혼신의 힘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12월 29일에 제9연대와 임무를 교대한 제2연대는 잠시 준비 기간을 가진 뒤 다음 해 1월 4일부터 토벌 작전을 시작했고, 2월 4일에는 육해공군이 모두 동원된 합동 작전이 펼쳐졌다. 이미 한겨울이 닥친데다 중산간 마을이 토벌군에 의해 거의 모두 불타버려서 무장대는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무장대는 제2연대가 아직 제주도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상태임을 노려 대대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무장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제2연대는, 무장대가 퇴각한 후에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대규모의 보복 학살을 저질렀다. 1월 17일에는 해안 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400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는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1949년 3월 2일에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가 설치되어 마지막 토벌 작전이 이루어졌다. 때 맞춰 이범석 총리가 제주도를 방문해 정부의 선무공작 방침을 밝히면서, 무장대와 대피해 있던 주민들에게 귀순을 권유했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장대는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무장대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덕구가 살해되면서 무장 투쟁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물론 제주도의 비극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음 해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살의 악몽이 다시 제주도를 엄습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과 ‘통비(通匪) 가족’으로 낙인찍혀 있던 사람들이 예비 검속되어 학살당햇던 것이다. 4.3과 관련되어 육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도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라산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무장대는 전쟁 중에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와 유격전 특수 부대인 무지개 부대의 소탕 작전으로 궤멸되고 말았다. 한국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제주도에서의 토벌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었고, 1957년에 마지막 무장대원인 오원권이 체포됨으로써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던 저항과 진압, 그리고 학살은 모두 끝이 났다.
제주 4.3 - (2) 해석의 쟁점 : 1. 가해자
가해자 문제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면서도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에 개입했는지 여부와, 개입했다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제주에서 진행된 일련의 사태가 이승만 정권의 초미의 관심사였음에 틀림없다. 여순 사건 이후에는 아마도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을 것이다.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 사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했는지를 노회한 정치가의 말과 공문서를 통해 완전하게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언론과 대중을 상대로 한 발언이나 공식 명령 계통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문서와 함께, 그가 가까운 인사들과 나누었던 대화, 그의 수족과도 같았던 인사들의 움직임, 군경을 비롯한 국가 기구의 동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에 따르면, 이승만은 학살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에 사태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초대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전에도 미군정과 더불어 제주 4.3에 대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제주 4.3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과 문제 해결의 방향은 1948년 12월 10일에 서울시 공관에서 열린 서북청년회 총회에서 그가 한 연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그의 지위와 시국의 전체 상황 속에서 볼 때 단순히 개인 차원의 격려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준 군사 단체를 동원해서라도 하루빨리 사태를 종식시키겠다는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으며, 서북청년회가 전개할 모든 활동에 대한 확고한 지지의 표명이었다. “제주도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라는 그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준 군사 단체 대원들을 상대로 한 이승만의 발언은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국가 상황 전반을 바라보는 일관된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스스로의 취약한 기반을 잘 인식하고 있던 이승만 정권은 공식 국가 기구인 군경 이외에 사적인 무력 집단까지 투입해서라도 국내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38선 이북으로부터의 위협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안정적인 반공적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이미 큰 문제가 된 ‘빨갱이 섬’ 제주도는 희생양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를 외치면서 남한 전역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선거구에서 선거의 무효화를 가져온 제주를, 이승만은 자기 지도력의 위엄과 정치적 생존 여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권의 요직에 있던 인사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권이 수립되기 전에 미군정하에서 경무부장을 맡아 4.3 발발 직후부터 문제 해결 과정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던 조병옥도 제주를 문제 많은 ‘빨갱이 섬’으로 간주했다. 이런 인식은 미군정과 경무부 요직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8월의 정권 출범 후에는 이승만의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미군의 철수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인사들은 철군 이전에 제주의 봉기와 저항을 초토화함으로써 불안정한 권력을 공고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제주 4.3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동기에서 일어난 정치적 학살이었다. 이 학살의 성격을 좀더 자세하게 규정하자면, 4.3은 억압적 성격의 정치적 학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한 사람과 학살의 집행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의 행위 동기는 동일한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상이한 면이 발견된다. 토벌대를 이끈 군과 경찰 지휘관의 경우, 대부분이 ‘제주도민=빨갱이’이기 때문에 국민이기 이전에 적이라고 간주했다. 토벌대 지휘부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서,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경험한 야만적 토벌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보고 배운 대로 제주에서도 집을 태우고 가축과 사람을 죽이는 삼광(三光)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사람의 목을 베는 행위도 여전히 군인 정신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그 밑에서 학살에 가담한 군경과 서북청년회 단원 일부에게서는 재산 갈취나 개인적 복수가 학살의 동기가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유희적 측면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마지못해 학살에 가담하고 나서 죄의식에 시달리던 민보단(民保團, 민보단은 가장 중요한 경찰 외곽 조직으로서, 그 전신은 향보단이었다. 1948년 4월 16일 딘 군정장관의 발표를 계기로 향토 방위를 명분으로 조직된 향보단은 만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모든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지역 주민들의 의연금으로 충당되었다. 애초에 5.10 선거를 위해 조직되었던 향보단은 총선이 끝난 뒤 해체되었다가, 1948년 10월 말경에 민보단이라는 이름으로 부활되었다.) 단원들과는 대조적인 면이었다. 군경 조직 특유의 명령과 복종의 논리도 학살이 이어지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지만, 이것은 학살의 동기라기보다는 주저하는 대원들이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명분 정도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학살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봉기가 일어난 초기에는 김익렬 중령이 이끄는 제9연대의 경우처럼 토벌보다 설득을 앞세우는 목소리가 상당하게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딘 군정장관이 문제 해결의 방향을 토벌 쪽으로 잡아 제9연대장을 경질하고 제9연대 내에서 토벌을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에는 가해자 내부의 마찰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 수립 이후에 시작된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서는 군이 주도하고 경찰이 돕고 서북청년회가 보조하는 식의 역할 분담과 공조 활동이 잘 이루어졌다. 이렇게 토벌 작전이 제주도 내의 특정 지역이 아니라 섬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작전 계획의 수립과 집행에 중앙 정부가 깊숙이 개입했음을 입증한다. 전술적인 면은 현지 토벌대를 이끌던 군 지휘관이 상당 부분을 담당했겠지만, 전략적,정치적 결정은 군 수뇌부와 정치 권력의 핵심부가 담당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학살의 결정과 계획, 집행과 감독이 정권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단서는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된 계엄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의로 도 전역에 발동된 계엄령은 마구잡이 학살의 길을 열어주었다. 학살의 집행인들은 이 계엄령을 사람을 마구 죽여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법의 원리와 규정을 내면화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상황에서 토벌대는 ‘사람 죽이는 게 계엄령’이라고 큰소리를 쳤고,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계엄령은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동안 감내해야 할 규제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무차별 살인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되어 있던 마지막 장애물의 제거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계엄령은 집행 과정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탈법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계엄법이 계엄령이 발동된 지 1년여 후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엄령이 처음부터 자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학살 현장에 있었던 집행인이나 그 현장에서 학살을 간신히 모면한 생존자의 눈에는 사태의 진행 방향 전체를 결정지었던 중앙의 결정이 잘 보일 리 없었다. 학살의 전체적인 윤곽은 직접적인 명령 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감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1948년과 1949년에 사건의 배후에서 작용했던 미국의 힘을 확인하려 할 때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막후에서 분주하게 움직인 미군정은 중앙 정부보다도 더 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제주의 학살과 무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4.3 발발 직후에 이미 미국의 군정장관 딘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제주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는 방법은 초토화 작전뿐이라는 의사를 자신의 정치 고문을 통해 제주 지역 책임자들에게 수시로 전달했다. 제주 지역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미 제20연대장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도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밝혀, 4.3의 방향이 유혈 진압으로 갈 것임을 명백하게 예고했다. 경찰과 경비대를 돕기 위해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대규모로 제주도에 파견시키는 데도 미군 장교들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정 관계자들이 “제주도는 전체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에 동조하거나 관련되어 있는 좌익 분자들의 거점”이라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역할은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정권이 수립된 지 9일 만인 8월 24일에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사이에 체결된 ‘한미 군사 안전 잠정 협정’을 통해 미군은 1949년 6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작전 통제권은 문서상의 권리로 끝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1948년 9월 28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 고문관을 통과해야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고 밝히면서, 작전통제권의 주체와 그 영향력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범석은 같은 해 10월 28일 국회보고를 통해 미군의 존재를 거론하면서, 국방장관인 자신조차도 군의 작전 지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될 당시 제주에는 임시군사고문단(PMAG)과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제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제주 해안에 괴선박이 출현했다는 허위 첩보를 유포해서 이승만 정부의 강경 진압을 부추기기도 했다. 남한을 반공의 전초 기지로 상정한 냉전 시기의 미국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미국 측의 문서를 통해 드러난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학살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도덕적인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도 아니었다.
제주 4.3 - (3) 해석의 쟁점 : 2. 희생자
4.3은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따르더라도 2만 5,000명 내지 3만 명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다. 민간 학자들은 대부분 희생자의 수를 3만 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셈이다. 그러나 만약 이 정도의 희생자 수가 20세기 학살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유태인 학살이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비해 약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주의 학살이 명실상부한 내전이나 국가 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모르는 두 개의 무장 정치 집단이 각각의 확고한 근거지를 바탕으로 격전을 치르는 내전 상황이라면 ‘상당함’의 기준도 어느 정도 상향 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4.3 봉기를 주도한 세력이 좌익인 남로당이었고, 그 세력의 중핵이 무장을 했다고 해도, 무장대의 수나 무장 수준으로 볼 때 내전을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은 최초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무장대에 참여한 인원이 1,500명을 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적게 보는 경우는, 그 당시 토벌대 측의 자료를 토대로 5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물론 토벌군이었던 제9연대 병사 가운데 일부가 무장대에 합류하고, 토벌 기간 동안 약간의 주민이 무장대 대열에 가세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측의 G-2 보고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무장대와 토벌대의 사망자 비율이 150대 1에 이르렀고, 무장대가 노획한 무기가 매우 적었다는 사실은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대치를 교전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19세기 초반 식민지 개척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과 영국인들이 충돌했을 때도 희생자 비율이 10대 1정도였던 점을 생각하면, 제주의 경우는 교전 상황이었다기보다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희생자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가운데는 어떤 이유로도 그들에 대한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는, 10세 이하와 61세 이상의 주민이 10% 이상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의 참사가 대부분의 다른 학살들과 달리 동일한 민족 구성원을 대상으로 벌어졌다는 점, 그리고 집단을 파괴하는 방법 면에서 원거리 강제 이주 같은 방법이 아니라 직접적인 학살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 이 희생자 비율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주 4.3의 본질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집단 학살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토벌대와 무장대 모두 가해자였지만,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가해자의 84%는 토벌대, 11.1%는 무장대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대부분의 학살은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와 더불어,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다. 이 점 역시 봉기로서의 4.3이 아닌 학살로서의 4.3은 이승만 정권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도모한 국내 평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한 의도된 희생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어떤 사건을 두고 학살에 해당하는지를 판별할 때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기준은 희생자 집단의 구심점인 엘리트에 대한 제거 기도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희생의 정도는 미미하지만 지도층에 대한 주도면밀한 절멸이 시도된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 또한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48년 가을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제주농업학교에는 “이곳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 인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법조, 행정, 교육, 언론계 인사들이 끌려와 감금돼 있었다. 확인된 명단만 보더라도 법조계에서는 제주 지법 법원장(최원순), 독립유공자인 제주 지법 서기장(송두현), 제주 지법 검사(김방순), 교육계에서는 초대 제주중학교 교장(현경호)과 현직 교사인 그의 아들(현두황), 제주도 학무과 장학사(채세병), 제주남초등학교 교장(김원중), 언론계에서는 <제주신보> 사장(박경훈), <서울신문> 제주 지사장(이상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고, 그중 상당수는 살해되었다.
토벌대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여론 지도층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대중에게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저항의 소지를 제거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당시의 제주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을 지도층으로 볼 것이며, 그 가운데 얼마가 죽었는지를 완벽한 자료를 가지고 말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학살이 끝난 후 제주도민들 사이에 “몰명(어리석고 우둔하다는 뜻)한 우리만 살아남았다”, “똑똑한 사람 다 죽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엘리트 제거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 - (4) 해석의 쟁점 : 3. 이데올로기
대규모 집단 학살에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개재된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학살의 동기를 제공하고, 학살을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마비시키거나 위안을 줌으로써 학살에 가담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가 학살의 절대적인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데올로기 없이 벌어지는 학살은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효과 가운데 학살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 4.3에서 가해자를 사로잡고 희생자를 공포에 떨게 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빨갱이 논리였다. 이 논리는 대한민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익의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익을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의식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속에는, 혐의만 가지고 특정인과 특정 집단을 좌익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그것이 범죄로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애국적인 행위로 용인될 가능성이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빨갱이 논리는 학살의 집행자들을 법적,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빨갱이라는 주술적인 단어로 집약되는 신념 체계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이나 인종 간의 학살 현장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빨갱이 논리는 일종의 유사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종주의는 인종의 차이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을 인종으로 구분하는 편견 어린 시선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종주의를 바라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편견의 시선을 가지고 특정 집단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실천 기제다. 그러므로 인종적 차이가 없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특정 대상을 증오하고 비인간화하는 유사 인종주의가 횡행할 수 있는데, 제주에서는 그것이 빨갱이 논리로 나타났다.
과거의 공식적 담론에서 제주 4.3은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대립에서 비롯된 참사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초토화 작전 시기에 학살당한 제주도민 가운데 대다수는 좌익 사상을 품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수립을 원한 사람들이 아니라, 해방 후에 가중된 미군정의 억압에 맞서 자주적으로 통일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은 일부를 빼고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심지어 그보다 폭이 더 넓은 좌익 범주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민족과 국민의 범주에서 배제되고, 죽여도 상관없는 인간 이하의 종자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4.3 당시 제주에서 빨갱이는 처음에는 공산주의 이념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산간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토벌대가 장악하고 있는 해안 마을 주민들까지도 아우르는 말로 쓰였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누가 빨갱이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중앙이요, 권력을 장악한 우익이었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지칭했고, 서북청년회 제주 지부장 김재능은 제주도를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이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학살 집행인들 역시 제주를 증오의 대상으로, 초토화 대상으로 받아들였음은 물론이다.
빨갱이 논리는 감정적인 애국주의와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 그 경우에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제주에서 활동했던 서북청년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서북청년회원들은 북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공산주의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과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가운데 원숙하게 다루기 가장 어려운 것이 적개심과 증오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북청년회원들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공유하고 있었던 이런 감정은 빨갱이 논리를 통해서 표현되고 애국심에 의해 포장될 때 엄청난 상승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에 빨갱이로 지목된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큰 위험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과 이해 관계나 의견이 상충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4.3의 해결을 위해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주재로 열린 대책 회의에서 무장대와의 타협을 주장하던 온건론자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공산주의자라고 공격받은 뒤에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일어났는데, 이는 극단적 반공주의의 위세와 빨갱이 혐의가 초래할 수 있는 가공할 결과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일화다.
의학자 황상익의 말처럼, 4.3이 일어났을 당시 빨갱이는 문둥이와도 같은 존재였다. 빨갱이는 특정 인간을 ‘죽어야 할 자’,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여야 할 자’로 지목하는 저주의 말이었다. 일단 빨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에게는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용납되었다.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모와 사위가 성교하게 만들고 살해하는 것도 그들이 빨갱이인 경우에는 가능했다. 제주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빨갱이라는 말이 무서웠던 것은 그 말의 실체가 모호해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치스에게 박해받던 유태인들에게 포피 잘린 음경이 죽음의 표지였다면, 4.3 당시 제주의 주민들에게는 빨갱이임을 지목하는 이웃의 검지가 죽음의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