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에세이]
詩 心
권혁수(시인)
누구에게나 詩心이 있으리라. 그래서 詩를 읽고, 감상하고, 쉬지 않고 쓰는 것이 아닐까. 山의 높낮이가 다르고 물의 맑음과 깊이 정도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시에 대한 성품과 성향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시심이 있어 우리는 뭇 짐승과 달리 이성적이고 아름답지 않나 싶다.
언젠가, 내가 시를 쓴다니까 “요즘엔 교도소 사람들도 다 시를 쓴다네.” 하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 그 분의 말뜻은 아마 ‘개나 소나 다 시인이네’ 하는 조금은 냉소적인 표현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날 필자가 “전 국민이 다 詩를 사랑하는 詩人이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멋쩍게 웃으며 항변을 했던 기억이 난다.
詩의 위기니, 시가 안 팔리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문뜩 작금의 교육정책이 생각난다. 마치 시인 집단이 국민들이 찬성하지도 않는 당황스러운 정책을 고집스럽게 소고삐 끌 듯 끌고 가는 교육당국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시인들은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데 왜 시민들은 시와 시인을 인정하고 반기지 않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그래도 한국 시인들은 외국 특히 선진국의 시인들에 비해 대접을 받고 있는 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어쨌든 상당수 시인들의 푸념만큼 매스컴의 발달과 함께 과거에 비해 인기가 많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한 일단의 분위기에 대해 필자는 시인들이 시민과 호흡을 나누는데 다소 소극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민과의 호흡은 인터넷 같은 첨단 미디어를 이용한 참여활동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시민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끄집어내어 말하고 싶다. 일테면 사회복지 시설 등에 가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데, 어느 시인은 멀리 인도라는 나라의 오지에까지 가서 곤궁한 원주민들의 생존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는 미담을 듣기도 하지만 여느 시인들의 활약상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자원 봉사 활동 붐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1990년대 이후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면서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청소년들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으며 기업과 지역사회 참여활동은 물론 연예인들의 활동 모습도 다채롭게 보도되고 있는데 반해, 보도 어느 한 구석에도 시인들이 사회봉사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포착되지 않는다. 물론 봉사란 특정한 행위만 갖고 논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실천하는 것이라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囊中之錐라 적어도 한두 가지 정도는 슬그머니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 길에는 시인들이 지나간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들도 사회활동에 동참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드시 팔을 걷어붙이고 불우한 노인이나 지체 부자유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 공간에 함께 살고 있다는 공감을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낭만적인 고도와 청림에 머물러 있거나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등 뒤에서 어깨 너머로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여건에 맞춰 자기가 걷는 시장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꽃길을 가꾸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詩人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시민들과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동질의 존재임을 그래서 모두가 같은 모습, 같은 마음이라는 공감을 서로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한 그런 행위를 형상화하여 시로, 노래로 만들어 들려준다면 매우 보람되고 즐겁지 않을까 싶다.
우리 자손과 민족의 건전한 미래를 위해, 병적이고 무기력하고 낭만적으로 표현되었던 과거 암울하고 빈한했던 시절의 詩人의 모습을 새로이 건강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시점이 지금이 아닐까 감히 두서없이 제언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