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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인들 사이에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 울주군 상북면 호랑이 굴 원경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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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호랑이와 범을 동일개념으로 부르고 있으며, 호랑이는 무섭다는 의미로 범은 산신의 의미로 신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호랑이와 범은 엄연히 다르다. 범은 표범이며 호랑이와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호랑이는 신성한 것, 무서운 존재, 값진 것 등의 의미로 인식되어 있다. ‘무섭다’라는 인식은 가축과 인명을 해치는 면과 정치적인 면에 부합하고 ‘영물이다’라고 하는 것은 민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호랑이 담배 필 적’은 아득한 옛날, 즉 불합리한 것도 이루어지던 때를 말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호랑이 굴에 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들은 매우 값진 것, 값진 것은 위험 없이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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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호랑이지도 |
꿈 해석도 ‘호랑이가 크게 울면 벼슬을 얻는다’ ‘호랑이를 타면 악한 일이 없으며, 집 가운데 들어오면 벼슬이 무거워진다’고 하여 권세나 관직과 결부시키기도 했다. 또한 풍수에 있어서는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중시되고 있으며 호랑이의 용맹성은 군대를 상징하며, 흔히 군 포진이나 깃발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산 것은 대략 3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호랑이가 인간의 문화에 도입된 최초의 표현은 울산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 암벽의 바위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각화에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돼 있다.
반면, 최초의 호랑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로 정착생활의 곰 토템족에 대응해 유목으로 이동생활을 하는 호랑이 토템 족을 상징하고 있다. 그 후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신라 진덕왕 때 알천공이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 후백제의 견훤은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의하면 ‘기우제에 호랑이 머리를 사용했다’ ‘호환(虎患)이 있었다’ 등의 호랑이에 대한 기록이 총 600~700여 회 정도 나온다. 호랑이는 그 어떤 동물보다도 민첩하고 힘이 있다. 배가 고픈 호랑이는 수시로 사람이 사는 마을로 출몰하여 때론 재산상의 피해를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축뿐 만아니라 사람까지 잡아먹었다. 실제로 호랑이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해서 과거에는 일상생활에 끼치는 피해도 막심하였다.
그러므로 호환의 퇴치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호환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적으로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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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호랑이 무덤. |
조선초기에는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군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양성 운영하는가 하면,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호랑이를 사냥한 상황에 따라 포상을 달리하는 법규를 만드는 등 체계적·구체적인 정책을 통하여 호환의 퇴치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전국적으로 계속된 호환은 국가적으로도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숙종 25년(1699)에 이르면 호랑이 사냥과 관련된 포상기준과 호환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지방 수령 등에 대한 상벌에 대한 법규인 ‘착호절목(捉虎節目)’이 제정된다. 이러한 ‘착호절목’은 국가차원에서 호환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현실적인 정책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전국의 각 목장은 국마(國馬)를 사육하는 곳이므로 호랑이의 피해를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경국대전 병전 구마조(經國大典 兵典 廐馬條)’에 의하면 호랑이 사냥은 감목관의 중요 업무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이러한 이유로 각 목장에서는 말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한 조직을 갖추고 산행장을 파견하여 호환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도 했다. 산행장은 ‘사냥꾼’ 또는 ‘사냥꾼의 우두머리’의 직책이다.
이들은 호랑이의 출몰을 항상 감시하고 발자국을 추적하여 호랑이 사냥을 선두 지휘하여 호랑이 사냥을 주 업무로 하는 직책이었다. 목장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군사조직으로는 조선전기에는 활과 창, 함정이라는 도구에서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총과 창을 바탕으로 했다.
울산은 과거 호랑이와 인연이 많은 도시이다. 호랑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반구대 암각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언양 상북면의 호랑이 무덤도 있다. 울산 곳곳에 전하는 수많은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 등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숙종 27년(1701)에 ‘울산의 김정택이 사람이 호환을 당했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영조 2년(1726)에는 김만철(金萬哲) 등 13명이 호환을 당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진원적(陳元迪) 등 16명이 남사하였다’는 것 등의 기록이 있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기록은 빙상의 일각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는 가지산 신불산 등 높은 산이 있는 지형적인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한편, <울산목장목지>에 의하면 울산 목장은 남목과 북목을 합하여 목장 내의 맹수 사냥과 관련하여 88명의 인원이 배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울산 목장이 다른 어떤 곳보다 호환이 심했다는 반증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