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 흔적 찾아간 부안 기행 자연서 이상향 꿈꾸고 숨막히는 현실서 신음 내뱉은 그는 지조를 꺾지 않았다
- 세상에는 단순히 - '목가시인' '전원시인' - 알려져 있지만 - 일제 창씨개명 거부하고 - 해방 후 공안기관 고초 - 시대의 아픔 껴안아
- '청구원'이라는 초가집서 - 많은 작품을 창작하며 - '고고한 인간상' 흔적 - 고향 땅에 영원히 남겨
신석정(辛夕汀·1907~1974) 시인.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부안보통학교 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도 않은 그가 1930년 상경했을 때 서울의 기성 시인들은 그를 첫눈에 알아봤다.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김기림 등 소위 시문학파로 불리던 시인들은 '소적' 이라는 필명으로 열일곱 살 때이던 1924년 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라는 만만치 않은 시를 쓴 당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후 '시문학'지에 시 '선물'을 발표하고 고향 부안으로 낙향하자 자연스럽게 '시문학 동인'이 된 시인들은 수시로 부안의 신석정을 찾아가 나라 잃은 비애와 울분을 삭였다.
낙향 후에도 꾸준히 발표한 시를 모은 첫 시집 '촛불'이 1939년 발간되자 김기림 시인은 "시문학사에 휘황한 횃불을 밝혀든 목가시인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일부 문학 관련인을 제외한 독자 대부분은 여전히 '신석정=목가시인 또는 전원시인'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시문학의 '큰 별'로 꼽히는 그가 과연 일제강점기와 분단, 6·25전쟁기, 민주주의 유린기, 군사쿠테타시기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가시인' '전원시인'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 30여 명의 7월 문학기행 참가자들은 지난 27일 버스로 4시간을 가야 닿는 서해안의 변산반도를 낀 전북 부안 땅으로 달려갔다. 그림과 서예, 한시 번역 등에도 능통했고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우수 짙은 눈빛까지 겸비해 장년기 이후에는 수많은 여류 시인과 지망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오는 신석정 시인의 참모습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그는 지조의 시인이었다"
|  | | 신석정 시인이 1933년부터 1952년까지 살았던 '청구원'을 둘러보고 있는 문학기행 참가자들. 시인은 이 집에 살면서 제1시집 '촛불'과 제2시집 '슬픈 목가'를 펴냈다. |
첫 방문지인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석정문학관. 2011년 10월에 개관한 2층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다. 이날 현지 설명을 맡은 박태건(원광대 교수) 시인이 문학관 곳곳을 찬찬히 안내하던 도중에 한마디를 툭 던진다. "이곳에 전시된 많은 시를 직접 보면 알겠지만, 신석정 시인을 단순히 '목가시인' '전원시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분명한 오해다.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았지만,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시인이다." 그는 이서 "일제의 강요와 협박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차라리 붓을 꺽겠다'며 도피생활을 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시인은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시 전반에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암울했던 현실 비판과 조국 해방을 향한 염원이 염주처럼 박혀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 신석정의 시 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연의 세계에서 이상향을 꿈꾸는가 하면, 삶의 현장에서 신음을 뱉어내기도 했다. 첫 시집 '촛불'에서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라고 울부짖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상상해 보자.
박 시인은 "굳이 규정하자면 생활과 시를 하나로 보았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에서 시를 찾았고, 시에서 생활을 찾았다. 생활에서 시를 찾을 때 친자연적인 목가시인이 되고, 시에서 생활을 찾을 때 시대의 참여시인이 된다. 이 두 성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정반합을 통해 진보 발전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시 세계는 초기에 잠깐 친자연적 경향을 보이지만, 곧바로 숨 막히는 현실과 늘 함께 호흡하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광복 직후 쓴 것으로 알려진 '꽃덤불'이나 제3시집인 '빙하'에 수록돼 6·25전쟁 종전 후 쓴 것으로 보이는 '대춘부(待春賦·봄을 기다리는 마음)' 등은 이런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 자신 일제강점기 때도 겪지 않았던 공안기관의 감시와 체포, 고문 등을 해방 이후 수차례 겪었지만 절대 지조를 꺾지 않았다.
문학관 내에는 서정주 강은교 김영랑 등 수많은 문필가로부터 받은 편지를 비롯해 '가난 속에서 흙에 살다 흙에 묻힌 고고함의 인간상'인 신석정을 말해주는 5000여 점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 정문 맞은편에는 시인이 1931년 낙향한 지 2년 뒤 직접 짓고 '청구원 (靑丘園)'이라 이름 붙인 고택이 있다. 전형적인 시골의 가난한 초가집이다. 이곳에서 시인은 제1시집 '촛불'과 제2시집 '슬픈 목가'에 실린 작품 대부분을 썼다. 1952년 전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그의 삶 터 겸 집필실이었다. 이제 사는 이 없는 이 작은 초가집에서 시인은 안방 벽에 걸린 사진으로 남아 탐방객들을 반기고 있다.
■절경과 문향에 취하다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 부안은 신석정, 남쪽 고창은 서정주의 고장이다. 신석정보다 여덟 살 아래인 서정주는 문학청년 시절부터 신석정을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부안에는 신석정 외에도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가 탄생했고 더 많은 시와 소설의 배경이 된 명소도 즐비하다.
답사팀이 석정문학관과 청구원을 거쳐 내딛는 발끝마다 문학의 향기가 짙게 묻어났다. 매창공원. 이 작은 언덕은 부안의 관기로서,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조선 중기의 기생 시인 이매창의 시비와 무덤이 있는 공원이다. 1573년 태어나 1610년에 세상을 떠난 이매창은 우리 전통 시가 중 최고의 사랑시로 평가받는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를 비롯해 58수의 시를 남겼다. 그녀를 연모했던 유희경과 허균, 후세의 시인인 가람 이병기, 송수권 등이 매창을 기리며 쓴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다.
부안은 국내 제1호 노동자시인으로 통하는 박영근이 나고 자란 땅이기도 하다. 민중가요로 잘 알려진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가사가 박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채석강이 있는 격포를 지나 모항에 이르는 길의 그 아찔함을 안도현 시인이 시 '모항 가는 길'로 노래했고, 천하 명찰 내소사에서는 조선 시대 김시습에서부터 현대소설가 윤흥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이 머물렀다. 특히 소설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을 쓴 윤흥길은 1960년대 후반 내소사의 향기에 반해 일부러 전근을 신청, 사찰 앞 초등학교로 직장을 옮기고 아예 절에서 먹고 자면서 습작을 했다. 방학 때조차 지척에 있는 정읍 고향집에도 가지 않고 습작을 한 끝에 그는 1968년 중앙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등단했다.
답사팀이 마지막으로 들른 곰소항과 곰소염전은 인근 정읍 출신인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부터 올봄 출간된 박범신의 소설 '소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설과 시 영화에 등장하는 곳이다.
■신석정 시인은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군 동중리 출생
▷1918년 부안보통학교 입학(6학년 때 가혹한 일본 교사에 대한 항의시위 주도)
▷1924년 4월 19일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시 '기우는 해' 발표
▷1931년 '시문학' 동인 참여, 시 '선물' 발표
▷1939년 첫 시집 '촛불'(인문평론사) 간행
▷1943년 창씨개명 거부, 일경을 피해 피신
▷1945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참여
▷1949년 부안중 교사로 재직
▷1954년 전주고 교사
▷1955년 전북대에서 시론 강의
▷1961년 김제고 교사
▷1962년 '5·16'을 비판한 시 '무명에의 항변' '영구차의 역사' 발표
▷1963년 전주상고 교사(1972년 정년 퇴직)
▷1974년 7월 6일 작고, 전북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에 영면(2000년 부안군 행안면 서옥마을 선영으로 이장)
▷수상 경력=전주시 문화장(1965), 한국문학상(1968), 문화포장(1972), 대한민국예술문화상(1973)
▷시집 및 저서=시집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 등 5권. '명시조 감상'(이병기 공저·1958), '매창시집'(대역). 유고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1974년 7월),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비·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