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삼베짜는 베틀이 성성한 곳이 있었다. 보성군 문덕면 운곡리 장운마을에 사는 공인순씨(77세) 댁. 땀을 뻘뻘 흘리며 베틀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힘겨운 노동에는 으레 뒤따랐을 노래가 있었다. "편지왔네 편지와/ 뒷문에 가 펴보니/ 한양가신 우리 낭군/ 안부 편지만 오셨구나/ 동지섣달 긴긴 밤에/이 내 눈에 흐른 눈물/베개 넘어 강이 됐네/보고 싶은 나의 낭군/한달에 두세 번 편지를 말고/일년에 한번씩 다녀가오..."
*친정인 화순 한천면 동가리(허무정마을)에서 어렸을 적에 배웠단다. "잘 놀아라 잘 놀아라 15살이 넘어가면 말도 많고 숭(흉)도 많다"며 마을분이 큰애기적에 가르쳐준 노래. "요즘에는 얼싸덜싸 띵가띵가 하는 것이나 좋아하제 내 노래는 잘 못 알아들어! 이미(의미)가 짚으거든 내 노래는..." 그러신다.
*다음은 일제시대 시집살이가 까랄 때 어린 신랑과 결혼한 신부 이야기다. 시어머니가 아들은 서당에서 공부만 하게 하고 며느리를 못 만나게 했던 시절. 각시가 보고 싶었던 서당 신랑은 신발을 손에 들고 밤이슬 털며 신부방으로 향하는데, 속 모르는 개가 컹컹 짖어 시어머니에게 들켰다는 이야기. 신부 속으로는 서럽게 눈물나는 노래인데, 왜냐하면 개에게 짖지 마라고 맛난 먹거리까지 먹여놨기 때문이다.
*"주내(고기 이름) 하나 조구(조기) 하나/ 홍찹살(개이름)아 청찹살(개이름)아/ 먹기 싫어 너를 주느냐 배가 불러서 너를 주냐/ 밤중 밤중 야밤중에 우리 낭군이 오시거든/ 짖지 말라고 너를 준다/ 밤중 밤중 야밤중에 우리 낭군이 오시면서/ 대님 풀어서 손에다 들고 바짓가랑이 후여잡고/ 이슬 털털 떨어가면서 쉬며 살짝 오시다가/ 홍찹살 청찹살이 아지나 캉캉 짖는 소리/ 시금시금 시어머니 은대 놋대 화로를 놓고/ 관저 설대(담배를 일컫는 듯) 입에다 물고 대창문을 활짝 열어/ 거 누시가 오시냥께 오시다가 도로 가네/ 가네 가네 도로 가네/ 우리 낭군이 도로 가네/ 내가 죽어 다시 생겨 꽃이라도 어서 되어/ 서당 앞에다 심어를 놓고/ 보고 싶은 나의 낭군 들면 보고 날면 보아/ 날본 듯이 보아다오"
*촬영할 때는 무슨 노랫말인지 몰랐는데, 이렇게 가사를 펴놓고 다시 들어보니 참 노랫말을 구성지게도 지어놨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이야기를 이토록 지어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절절한 자기 속마음이 없고서 어떻게 이런 '서사시'가 나올까 궁금했다. "배고픈 시상에 태어나서 불쌍하게도 살았네. 내가 화순서 열닷살(15세)에 이리(보성 문덕면 운곡리 장운마을) 시집을 왔어. 그때는 일제 시상이라 일본 사람들이 공출을 보낼라고 하는 거여. 내가 시방은 늙어서 허리가 요렇게 오구라져 부렀지만 그때만 해도 숙성하니 컸거든. 우리 부모가 나 공출 안보낼라고 보타져부러. 그때 한동네 살던 시누(영감님 누이)가 바로 나를 채가부렀어. 그래 시집이라고 와본께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안계신디 홀시아버지에 막내아들 네 동서에 막내 며느리에 열이 넘는 식구가 오글오글합디다."
*말문을 튼 할머니의 이야기가 길어진다. "서방 복이 그렇게 없었으까. 금실이 안좋아. 놈(남) 보기는 이삐단디 나를 그렇게 밉게 봐. 부앵이(부엉이) 같은 년 나가라고 볶아대. 동네 어른들 말이 서방 보고 '못볼 것이 개랬구만. 점(占)에다가 손도 비벼볼 것인디' 그랬어. 그래도 그 세상에 집을 나가는 법이 어딨겄어. 나갔다 하면 가문 망한다고 큰일 나분 세상이제." 차차 남편의 괄시는 바뀌어 갔지만 결혼 초기에 견뎌야 했던 서러운 세월은 공인순 여사의 인고(忍苦)를 키우는 원동력이었다.
*할머니는 시집오기 전에(15살 이전에) 친정에서 노래를 많이 체득했다. 시집가기 전 일찍부터 집안의 노동력이 되었다. 어른들하고 품앗이로 밭일도 하고 길쌈을 하면서 노래를 배웠다. "또래에서도 숙성했던지 나만 일을 그렇게 많이 했어. 미영 잣고, 삼잣고, 노인들하고 똑같이 품앗이을 했당께. 그때는 흥글타령을 했어. 흥글~흥글 하면서 울면서 노래를 해." 공씨 집안에 소리 내력이 있었다. 할머니 두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공덕재)가 소리꾼이었다. 초성이 그렇게 좋아 동네의 상여소리를 도맡아 메겼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아버지의 목을 받았던 할머니는 10명이 넘게 우글거리는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차차 실력 자랑을 하게 된다. 새댁때는 영감 무서와서 노래 한자리도 못 꺼냈지만, 30세가 넘어가면서 동네에서 화전놀이(花煎; 부녀자들이 꽃잎을 따서 전부쳐 먹으며 놀던 봄놀이)를 하게 되면 가슴 속에 묻어둔 노래들을 꺼내곤 했다.
*"노인들이 좋아라해. 한자리 하고 나면 또 불러라 그래. 먼디서 듣는 사람들이 유성기 소린가 사람 소린가 분간을 못하겄다 그랬당께." 고초 당초같이 매웠던 시집살이 이야기에서 '예술'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자 할머니의 목소리에 아연 활기가 돈다. "한번은 어디서 나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가 보성군청에서 직원이 찾아왔어. <길쌈노래>를 해보자 그러데.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여. 그래서 <남도문화제>를 몇 번 나갔지. 서너 번 나갔는갑소. 3등도 나고 개인상도 타고 그랬어." 알고 보니 할머니는 보성군의 토속민요를 대표할 만한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까라운 영감 사이에서 아들 넷 딸 넷, 모두 8남매를 두었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쫓겨댕기고 숨어댕기며 사느라 자석들을 제대로 못 갈친 것이 한이라지만, 자식들 복은 있으시단다. "아그들이 용돈준께 살제 나는 10원 벌이도 안하요. 심심한께 아그들 풋고추라도 따서 보낼 양으로 고추밭 한나 벌면서 살제. 내 자석들은 모도 효자효녀여. 내 말끝에 '아니요'가 없어."
*자식농사는 잘 지었지만 보성의 토속민요 소리꾼으로서는 허전한 게 있다. 당신이 어렸을 때 배워놓은 <길쌈노래> <흥글타령> 등을 물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보성)군에서도 젊은 사람들 갈쳐내라고 난리여. 할머니 갈쳐놓고 돌아가셔야 돼 해싼디 내가 으짤 것이여. 시방 사람들은 궁둥이 훽 돌리고 띵가띵가 하는 것이나 좋아하제 요런 것은 배울라고를 안한디. 못 갈치고 죽게 생겼어. 여영 없어져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