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 장군은 한국군 장군 중 군 경력이 가장 화려하면서도 육군총장이 되지 못했다. 그는 14년간의 군생활 중 사단장(3번)·군단장(3번)·교육사령관·참모차장(4번)·군사령관·합참의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이런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장과 육군총장에 오르지 못했다.
그와 경쟁상대인 백선엽·정일권·이형근은 모두 대장(大將)으로 진급해 육군총장과 합참의장을 역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의 인품·능력·경력이 결코 이들보다 뒤지지 않음에도 대장과 육군총장을 지내지 못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 졸업(군번 3번) 후 대위로 임관, 조선경비대총사령부 보급관(군수국장)으로 보직돼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여단 참모장을 거쳐 여단장과 사단장(6·2·7사단장)·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을 거치며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진급했다(28세). 6·25 때 그는 7사단장·1군단 부군단장·2군단장(2번)·참모차장(3번)·3군단장으로 개전 초기부터 낙동강선 방어작전, 북진·청천강 전투, 1·4후퇴, 유엔군의 재북진, 고지쟁탈전을 거쳐 휴전 때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전투지휘관’이었다. 그는 개전 초기 적의 주공이 지향된 의정부~ 포천 축선의 수도권 방위를 책임진 7사단장으로 전차·자주포를 동반한 적 정예 2개 사단(3·4사단)과 맞서 의정부 ~ 창동~ 미아리 전선에서 7사단장 겸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으로 전력투구하다 역부족으로 한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국군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적의 주공이 지향된 동작동 ~ 대방동의 방어책임을 맡은 혼성 7사단장으로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 미군이 증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1950년 7월 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필두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증원돼 한미 간에 지연전략이 채택되고, 이에 책임구역이 경부가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미군, 동쪽은 한국군이 전담하면서 산악지역에서의 작전지휘의 효율성을 위해 1군단을 창설했다.
이때 유재흥 준장은 부군단장에 보직돼 김홍일 군단장을 보좌했다. 그는 7월 중순 새로 창설된 2군단장에 보직돼 낙동강 방어선에서 1·6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북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그는 미국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소장으로 진급했다(29세). 북진 작전 시 그는 2군단장으로 3개 사단(6·7·8사단)을 지휘, 미군보다 먼저 압록강에 진출했다.
그렇지만 운명의 신은 그에게 행운만을 주지 않았다. 중공군이 1·2차 공세에서 화력이 빈약한 2군단을 집중 타격해 그 여파로 군단이 해체되자 참모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4후퇴 직후 다시 중동부 전선을 맡은 3군단장에 보직돼 유엔군의 재진격 시 크게 활약하던 중 중공군이 4월 공세의 실패(서울 점령)를 만회하고 한국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목적으로 3군단(3사단·9사단)에 주력을 지향하고 기습공격했다.
이때 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해체됐다. 이후 그는 중장(31세)에 진급했고, 1952년 7월 백선엽 장군(2군단장)이 총장으로 영전되자, 다시 군단장에 보직돼 금성돌출부 형성에 기여했다. 1953년 초 군단장을 정일권 중장에게 물려준 그는 참모차장에 복귀해 휴전을 맞이했다.
37개월 동안 그는 야전지휘관·참모차장으로 전장을 누비고 전쟁을 지원하며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한 참군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그를 국방장관에 임명하면서 “장관께서는 4성이 못 되시고 군을 떠나셨는데 이제 장관 밑에 4성 장군이 넷이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유재흥 장군은 한국군 장군 중 군 경력이 가장 화려하면서도 육군총장이 되지 못했다. 그는 14년간의 군생활 중 사단장(3번)·군단장(3번)·교육사령관·참모차장(4번)·군사령관·합참의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이런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장과 육군총장에 오르지 못했다.
그와 경쟁상대인 백선엽·정일권·이형근은 모두 대장(大將)으로 진급해 육군총장과 합참의장을 역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의 인품·능력·경력이 결코 이들보다 뒤지지 않음에도 대장과 육군총장을 지내지 못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 졸업(군번 3번) 후 대위로 임관, 조선경비대총사령부 보급관(군수국장)으로 보직돼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여단 참모장을 거쳐 여단장과 사단장(6·2·7사단장)·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을 거치며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진급했다(28세). 6·25 때 그는 7사단장·1군단 부군단장·2군단장(2번)·참모차장(3번)·3군단장으로 개전 초기부터 낙동강선 방어작전, 북진·청천강 전투, 1·4후퇴, 유엔군의 재북진, 고지쟁탈전을 거쳐 휴전 때까지 한 번도 전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전투지휘관’이었다. 그는 개전 초기 적의 주공이 지향된 의정부~ 포천 축선의 수도권 방위를 책임진 7사단장으로 전차·자주포를 동반한 적 정예 2개 사단(3·4사단)과 맞서 의정부 ~ 창동~ 미아리 전선에서 7사단장 겸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으로 전력투구하다 역부족으로 한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국군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적의 주공이 지향된 동작동 ~ 대방동의 방어책임을 맡은 혼성 7사단장으로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 미군이 증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1950년 7월 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필두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증원돼 한미 간에 지연전략이 채택되고, 이에 책임구역이 경부가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미군, 동쪽은 한국군이 전담하면서 산악지역에서의 작전지휘의 효율성을 위해 1군단을 창설했다.
이때 유재흥 준장은 부군단장에 보직돼 김홍일 군단장을 보좌했다. 그는 7월 중순 새로 창설된 2군단장에 보직돼 낙동강 방어선에서 1·6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북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그는 미국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소장으로 진급했다(29세). 북진 작전 시 그는 2군단장으로 3개 사단(6·7·8사단)을 지휘, 미군보다 먼저 압록강에 진출했다.
그렇지만 운명의 신은 그에게 행운만을 주지 않았다. 중공군이 1·2차 공세에서 화력이 빈약한 2군단을 집중 타격해 그 여파로 군단이 해체되자 참모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4후퇴 직후 다시 중동부 전선을 맡은 3군단장에 보직돼 유엔군의 재진격 시 크게 활약하던 중 중공군이 4월 공세의 실패(서울 점령)를 만회하고 한국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목적으로 3군단(3사단·9사단)에 주력을 지향하고 기습공격했다.
이때 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해체됐다. 이후 그는 중장(31세)에 진급했고, 1952년 7월 백선엽 장군(2군단장)이 총장으로 영전되자, 다시 군단장에 보직돼 금성돌출부 형성에 기여했다. 1953년 초 군단장을 정일권 중장에게 물려준 그는 참모차장에 복귀해 휴전을 맞이했다.
37개월 동안 그는 야전지휘관·참모차장으로 전장을 누비고 전쟁을 지원하며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한 참군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그를 국방장관에 임명하면서 “장관께서는 4성이 못 되시고 군을 떠나셨는데 이제 장관 밑에 4성 장군이 넷이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