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본문
크리스챤과 성실이 계속 함께 길을 가다가 한쪽을 보았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수다쟁이라는 자가 그들 옆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수다쟁이는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멀리서 보는 것이 훨씬 잘생겨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길은 그들 모두가 걸어갈 만한 충분히 넓은 길이어서 성실은 수다쟁이에게 당신도 천성의 고장으로 가고 있다면 우리와 함께 동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수다쟁이는 기꺼이 친구로 동행하겠다고 하면서 가는 길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성실에게 했다. 그는 성실에게 자신은 하늘에 관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 도덕에 관한 이야기, 복음에 대한 이야기, 거룩한 것, 세속적인 것, 과거와 미래, 외국과 여러 나라에 대한 것, 본질적이거나 부수적인 것 등 어떤 이야기든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고 성실에게 말했다. 수다쟁이의 말을 듣고 난 성실은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크리스찬에게 다가가 수다쟁이가 사람이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훌륭한 동행자가 생겼다고 조용히 이야기 했다. 그러자 크리스챤은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성실이 그토록 감탄하고 있는 수다쟁이의 정체가 스무겹이나 되는 혀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속이는 자라고 말해주었다. 성실이 어떻게 크리스챤이 수다쟁이를 알게 되었느냐고 묻자 크리스챤은 수다쟁이가 자신의 동네에 살던 사람으로, 말 많은 동네의 달변의 아들로 말 재주는 좋지만 알고 보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답해주었다. 성실이 자신에게는 수다쟁이가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말하자 크리스챤은 원래 수다쟁이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추잡한 사람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에게도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지 마구 지껄여대는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단지 혀끝으로만 이야기하지 사실상 신앙이라는 것은 그의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사람들이 그를 ‘타향에서는 성자요, 고향에서는 악마’라고 부르며, 그 때문에 종교자체가 비난을 받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크리스챤의 설명을 들은 성실은 말과 실제 믿음의 행동은 별개의 문제임을 깨닫게 되고(마23:3) 한층 주의를 기울여 이러한 것들을 구별해야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자 크리스챤은 수다쟁이이게 진지한 토론을 제안해서 그에게 참된 종교의 능력이 그의 마음이나 가정이나 대화 속에 명백히 있는지를 확실하게 물어보라고 가르쳐주었다. 이에 성실이 수다쟁이에게 성도의 삶에 은혜의 작용과 표지가 되는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거룩한 삶에 대한 실제적인 목마름과 순종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와 같은 것들을 체험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수다쟁이는 그런 말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그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돌아서 갔다.
2.생각할 것과 해설
1)본문에 등장하는 수다쟁이는 무엇을 교훈하는 인물인가?
진정한 구원의 은혜 없이 성경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떠벌이는 자이다. 겉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을 믿음이 있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존 번연은 수다쟁이를 등장시켜서 진정한 믿음에는 은혜의 표지들을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요일4:5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고 한 것처럼 이들은 세상에 속한 자이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는 늘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 때문에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핍박과 환난의 시기에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은혜가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한 환란이 있을 때 교회를 버리고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본문이 묘사하는 것처럼 넓은 길의 시절에 교회에 차고 넘치는 것이다. (예/325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이때 수다쟁이 같은 많은 교인들이 양산되었다.)
2)처음에 성실이 수다쟁이에게 경탄한 것과 수다쟁이가 성실에게 자랑한 것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지식이다. 거듭남의 필요성, 은혜, 인간능력의 부족,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언약에 관한 이야기들이 유익한 것들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했다. 심지어 어떤 주제의 내용이라도 자신은 다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자신의 지식과 의로움을 자랑했다. 이런 수다쟁이의 말에는 그 어디에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은혜의 증거인 자기부정을 찾아볼 수 없다. 사도요한은 이와 같은 사람을 “으뜸 되기를 좋아하며 악한 말로 망령되이 폄론하는 디오드레베”같은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존 번연은 이와 같은 자들을 스무 겹이나 되는 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는 어리석은 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3)크리스챤이 수다쟁이의 정체를 성실에게 말해주는 것은 비방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근거없이 남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의 지체가 헛된 말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수다쟁이는 멀리서 보면 멋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추잡하고 흉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이며 믿음의 열매와 행함은 조금도 없는 자이다.(약2:14) 또한 이런 사람은 복음을 남용하는 자로서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그 심령에는 복음으로 인한 변화가 조금도 없는 자이다. 변화가 아니라 변장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유사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성실에게 수다쟁이의 정체를 밝힌 것은 비방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을 키워 가는데 필요한 분별력을 가르쳐주는 올바른 양육이며 교훈인 것이다.
4)크리스챤의 말을 듣고 성실이 수다쟁이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점검하는 은혜의 표지로 물어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성실은 몇 가지의 대화를 통해 수다쟁이의 믿음과 그의 말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했다. 우선 그의 심령과 가정에 나타난 변화의 열매를 점검했다. 이웃과 거래하는 것, 자녀양육에 관한 열매, 사람들 앞에서는 도덕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자기 자녀에게는 악하고 더러운 양심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 말과 행위에 일관성이 없고 스스로 모순되는 것이 거짓 믿음의 표시이다. 진정한 구원의 은혜는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의 변화가 있고, 복음에 대한 지식정도가 아니라 그 지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갈망, 그리고 거룩을 향한 추구가 동반되어야 함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마음과 거룩한 가정과 거룩한 행실로 세상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수다쟁이에게는 이런 은혜의 증거가 없었다. 그는 구원을 갈망하면서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나아가본적이 없었고, 자신의 죄에 대해 세리와 같이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통해본적도 없었다. 그래서 수다쟁이의 말과 행동에는 겸손함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구원의 은혜가 심령 속에 들어왔을 때 어떤 체험들을 했는가?하는 성실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다쟁이는 떠났고 성실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지식과 말하는 것만으로 구원의 은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중요한 교훈을 배웠던 것이다. 존 번연은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열매로 증거 되어야 함을 수다쟁이를 통하여 드러내면서 교회는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수다쟁이 같은 위선자들이 회개하고 신실한 믿음을 갖게 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영적 부담감을 가지고 떠나게 하든지 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첫댓글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열매로 증거 되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