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귀
매화 꽃잎은 천천히 허공을 여네. 말귀는 열어 두고, 찻잔 속에 향을 머금네.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이 구르네. 말은 오므라 드네, 아니, 벌어지네. 그래, 그래, 조여 지는 말의 체위. 달빛은 바람의 샅을 핥고 있네.
구름은 또, 허공의 귓등 새로 말이 흐르네.
색의 자음들이 올라타네. 홍紅, 홍紅, 홍紅, 베갯머리에선 색 쓰는 소리가 깊네. 노랑 말귀를 알아 듣는 노란 단풍. 산이 풀리고 노을이 닫히고, 사이사이 말귀가 트이네. 겨울 눈 내리고 봄꽃 피고, 돌아보니, 문득, 말들이 사라지고 없네.
환상곡
우리는 푸른 바람에 손을 넣고 있었네
그는 시간을 잡는다고 했네
어디로 간 걸까, 그 얼굴들은
감쪽같이 어둠에 스며들었네
트럼펫을 불어라!
노을 지는 서쪽 바다에 서서
남자여, 미쳐버려라!
춤추고, 노래하고, 취하라, 여자여!
물 위에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네
피아노에 칸나가 핀다고 했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네
그 저녁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었네
칸나
거울 속 꽃은 지는데,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돌아보면 부서져버릴 사랑
칸나, 칸나, 칸나
불이 붙어 다 타버려라지, 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빨강, 미쳐버려라지, 뭐
칸나, 칸나, 칸나
붉은 라인은 왜 그리 외로운 거야
꽃대에 젖어 빗물은 흐르는데,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시검詩劍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이 시인 놈아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
하霞
복사꽃은 다 지는데,
뭐 하능교 아지매
간당간당 양산 쓰고
구름 지짐 두어 판
낮술 서너 병,
볼또그리 죽인다
한 만년 저 꽃밭에서
우리 뒹굴고 나오면,
이봄 몸에
꽃필 랑가 나비 될 랑가
이불속 몸뚱어리
문드러지는 것도 모르고
하이고,
뭐 하능교 아지매 !
모란
스님 예?
눕는 게 좋아 예
서는 게 좋아 예
미친년!
스님 예?
물 관리는 어떻게 하여요
옮긴다!
어디로 예?
업業에서 심心으로 옮긴다
호 호 호, 홋 홋
나는 구름에서 꽃 샅으로
번지어요
황진이
진이,
그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게
나는 그대의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치겠네
노을로 번진 눈물을 치겠네
흔들리는 그 바람의 무늬를 치겠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피어 노는
저 비슬산 꽃의 한 생生 다 떨어지기 전,
진이,
그대는 침향무를 뜯게
나는 엉망진창 술에 취해
대견봉 그 둥근 달빛에 붓을 적셔
그대 치마폭 위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겠네
대담 사회 / 김상환 시인
질문 → 01. 고전 시화를 보게 되면 詩魔를 비롯하여 詩鬼와 鬼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詩魔가 지속적으로 시인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라면, 詩鬼는 일회적으로 시인의 입을 빌어 대신 노래하게 하거나, 자신이 홀연히 나타나 시를 읊조리는 귀신을 일컫는다. 詩魔와 詩鬼는 이번 시집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월광 소나타/환상곡/환幻/귀면鬼面/월검月劍/미완성] 등의 시(제)와 연관지어 한 말씀 부탁드린다.
대답 → 제가 이번 시집 『빠스각 빠스스각』에서 집요하게 파고든 경계는, ‘환의 세계, 소리의 세계, 화경의 세계’입니다. 시인은 시신詩神과 접하거나, 시마詩魔에 들리어 귀신도 반할 귀시鬼詩를 짓거나 귀경鬼景을 펼쳐 보입니다.
하여, 저는 시,「환상곡」에서 시의 경계를 생사生死의 그림자놀이로 보았습니다. 시는 언어 이전도 아니요, 언어 이후도 아닙니다. 제게 시란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석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계 지점입니다. 시인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품은 사람입니다. ‘언어’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더러운 ‘색色과 공空’의 욕망을 대신 닦아 주는 존재입니다.
하여, 시인은 사물의기미幾微들과 세계의 기척들을 통해‘지금 여기’를 자각한 자입니다.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공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한다는 진실을 아는 자가, 詩魔에 들린 시인입니다. 이런 시인이야말로 귀신도 반할 귀시鬼詩를만날 수 있습니다.
질문 → 02. “노을은 천개의 손가락”(「하몽하몽」), “천년을 지나서 그녀에게 가네”(「바람과 바람 사이 그녀가 서 있었네」), “천년을 돌아서”(「월검月劍」), “천하를 갖고 싶으냐”(「시검詩劍」) “한 만 년 저 꽃밭에서”(「하霞」) 등에 나타난 ‘천’의 기호가 갖는 내포적 의미는?
대답 →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병病을 통해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간의 몸속에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병을 통해 직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제 시속에서 해와 달을 심복으로 삼습니다. 땅, 물, 불, 바람은 제 심복의 부하들입니다. 하여, 시집 『빠스각 빠스스각』에서 시 행간의 시간과 공간을 천년 혹은 만년으로 잡았습니다. 백년의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는, 『빠스각 빠스스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어와 시어 사이가 너무 비약이 심해서, 도통 무슨 말인지 짐작도 안 갈 겁니다.
「시검詩劍」을 예로 들면, 아예 우주를 시의 원고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와 달을 심복으로 내보내, 허공 위에서 한바탕 시의 검무를 추게 하였죠. 밤낮없이 시의 검을 들고, 베고 베도 베이지 않는 시작詩作의 고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시의 칼을 쳐들고 아무리 행간 속에서 발버둥 쳐도, 결국 시는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질문 → 03. 古今과 書畫는 물론, 대담한 생략과 여백, 흑백의 대비와 음양의 조화가 두드러져 있는 이번 시집에서 通變-法古昌新의 방법론은 매우 주효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대시의 새로운 리듬과 새로운 서정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시 [칸나/월검月劍]와 관련해 말씀해 주시지요.
대답 → 언제나 제게 서정시는 ‘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의 시학’이자 꿈꾸기입니다. 저는 법고의 뼈와 살을 발라 먹고 창신의 새 길을 엽니다. 만물의 음양을 받아들여 시의 형과 상을 빚습니다. 전통의 불신과 전복이 아니라 계승과 성찰을 통해, 시의 요체를 뀁니다.
현실 공간인 몸과 시의 공간을 하나로 보는 것이죠. 격물을 궁구하여 치지로 나아갑니다. 직유를 통해 사물의 극을 치받고, 은유를 통해 물아일체가 됩니다. 하여 밤낮없이 소리를 쫓다 언어를 잃었고, 언어를 쫓다 시를 들었습니다.
시는 무작정 옛것을 본뜨면 형식에 매달리고, 새것만 추구하다 보면 내용이 기괴해집니다. 전통의 무맹목적 답습도 멀리해야 하지만, 무턱대고 새것만 추구하다 보면 언어가 기괴망측해집니다. 하여, 옛것을 토대로 삼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시, 「월검」은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서정시에 질문’한 언어 실험의 시입니다. 제가「월검」에서 시도한 것은 전통 가락의 계승입니다. 저는 줄곧 현대시 속에서 7,5조 3음보의 기본 율격과 민요조의 그 아름다운 리듬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다 쓸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월검」은 전통적 한의 정서를 현대적 비극 이미지로 변주한 시입니다. 몸속에 각인된 기존 서정 언어의 습濕을 잘랐으며, 행간 속에 참신한 신서정의 이미지를 세우는 작업을 해 보았습니다. 그 작업은 골수를 바꾸는 일보다 어려웠습니다.
질문 → 04.“김수영의 ‘온몸의 시학’과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학’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모두 추상표현주의 미학, 혹은 반反미학을 매개로 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 실재, 움직임, 행위를 강조하는 동양미학에 닿아 있으며, 그것은 움직임 자체가 움직이는 세계를 말한다.”(이승훈,「김춘수의 무의미시에 대하여」)
이와 관련해 시천의 시를 잠정적으로‘接和와 空無의 시학’이라 명명한다면, 그 근간에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노장의 무위 사상과도 통해 보인다. 이 점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대답 →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이번 시집『빠스각 빠스스각』을 관통하고 있는 사유는, 주역의 음양론, 불교의 색공론과 노자의 유무상생론과 양자역학입니다. 특히 노자의 ‘이름이 없는 천지의 처음, 무명無名’과 ‘이름이 있는 만물의 어미, 유명有名’(도덕경 1장) 사이를 헤맸습니다.
말이 있어 천하가 열립니다. 하늘이란 말이 있어 하늘이 있게 되고, 땅이라는 말이 있어 땅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말이 있어 세상이 열리고 존재하는 것이 생겨나(드러나) 우리 앞에 마주 섭니다. ‘유명有名’의 세계를 통해 있고 없음(무명無名)의 유·무가 생겨나고, 고하 · 장단이 있게 되고, 전후 · 좌우가 있게 됩니다. 아름다운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어렵고 쉬운 것이 있는가 하면, 음音과 성聲의 리듬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것은 말이 있어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곧 말입니다. 이 세계는 말, 곧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송항룡)
하여, 장자의 말처럼 시는,‘천하에 천하를 감추는 작업 ’(약부장천하어천하若夫藏天下於天下(장자)’임을 알았습니다. 하늘은 감추고 시인은 끊임없이 들춥니다. 그것이야말로 시의 비밀입니다.
질문 → 05. 표제시 [빠스각 빠스스각]에 나타난 소리의 상상력, 시집 전반에 미만해 있는 색채 이미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대답 → [빠스각 빠스스각]이란 시집 제목은 시조 시인 ‘조운’ 선생의 시귀에서 따왔습니다. 언 얼음을 밟으면 나는 소리가 ‘빠스각 빠스스각’이죠. 저는 음악은 하늘에서 흘러나와 사람의 몸에 붙은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바닷물 속에서 붉은 현을 켜며 올라오는 해는 그 자체가 악기이죠. 한밤중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달은 얼마나 신비로운 선율입니까.
하여, 제겐 천지 만물이 모두 소리의 악기통입니다. 하늘과 땅은 음양의 리듬으로, 오행은 행간의 악보로 드러난 것이죠. 겨울의 흰 눈은 봄의 들꽃 피는 소리에 숨고, 물의 음악은 초록의 여름 나뭇가지를 타고 허공의 생각을 만집니다. 온갖 색채가 가을 단풍 속에 제소리를 숨기고, 낙엽은 늙은 몸을 끌고 땅 속 뿌리에 스며 은유의 소리로 부활합니다.
강물은 스스로가 물의 연주자요, 바다는 강물들의 교향곡입니다. 바람은 천지를 한바탕 무위로 드러내지요. 하여, 자연은 화산 폭발과 번개의 리듬으로 불의 음악을 펼치기도 하고, 때론 해일과 폭우로 물의 음악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삼라만상은 상징의 율을 통해 이미지로 드러나고, 구상과 추상의 악기를 바꾸어가며, 색과 공의 법칙으로 우주를 탄주합니다.
하여 우주는, 지구의 지수화풍토地水火風土란 경이로운 음계를 버무려 일월의 조화음을 만듭니다. 그 사이 인간은 희로애락의 고저장단에 사주팔자의 추임새를 얹어, 한바탕 각자의 시공의 방식으로 몸을 통해 놀다 가는 악기인 셈이죠.
다음 6시집은 ‘바다’를 주제로 써볼까 합니다. 환갑을 맞이하고 보니, 어릴 때 놀던 고향 동해 생각이 간절합니다. 항구의 풍경, 어부들의 삶의 이야기, 어머니 손을 잡고 바라본 아침 해, 이런 등등의 이야기를 엮어 볼 생각입니다. 물론 남해, 서해, 제주도, 울릉도를 돌며 여행 시도 함께 채워 넣을 생각입니다. 직접 체험한 것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바다 풍경과 정경’들을 시와 산문의 무늬로 그려낼까 합니다.
끝으로, 대담을 맡아주신 김상환 시인님, 이번 무대에 저를 초대해주신 대구시낭송예술협회 이지희 회장님, 아름다운 선율로 무대를 꾸며준 손방원 팬플릇 연주자님, 멋진 가곡과 사진을 찍어준 박종천 시인님, 그리고 이 무대를 위해 애를 많이 쓴 대구시낭송예술협회 시낭송가님들께 큰 고마움을 표합니다. 무엇보다 귀한 시간을 내어 발걸음 해주신, 오늘 여기에 오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