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엔도
슈사쿠) - 하나님의 침묵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부의 신념]

"인간은 가장 경솔한 신념의 동물이며 반드시 뭔가를 믿어야만
한다.
신념에 대한 좋은 토대가 없을 때에는 나쁜 것이라도 일단 믿고 만족해 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인간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이도 있다. 영화
『헝거』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고,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드러낸다. 더욱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에게 신념의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그리스도의 침묵과 신자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종교 박해가
심한 17세기 일본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에 잠입한다. 종교적 박해가 극에 달했지만, 아직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발각되어 관리들에게 쫓기게 되고, 결국 배교자 기치지로에 의해 잡힌다. 하지만 더 절망적인 것은 그곳에서 배교한 페라이라 신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는 일본 이름을 부여받았다. 사와노 추우안. 그는 하나님의 침묵때문에 배교했다는 변명을
내뱉는다. 로드리고는 배교
신부의 변명이 패배자의 자기기만이라 단정
지었다(231쪽). 하지만, 결국 그도 자신 때문에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는 농민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성화를 밟는다. 배교 신부가 된 것이다.
저자의 서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설에 담긴 사상, 즉 배교에 대한 합리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이해의 결핍,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아래의 주관적인 의견을 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배교에 대한
합리화다.
신념은 행위로 드러난다. 배교를 강요하는 일본 관리들은 로드리고에게 성화를 밟는 그 자체가 형식적이라며
그를 회유한다. 형식적이라면 왜 그에게 성화를 강요하겠는가. 그는 성직자로서 마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가 배교하면
신부들이 전한
복음을 의지하고 따랐던 농민들은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신부가 전한 복음과 그 행위가 다르다... 아니 이면적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명확하고 그에 따른 행위는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다.
로드리고가 성화를 밟기 전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267쪽)" 문맥상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우리(신자)에게 밟히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배교하면서 겪는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이요, 신자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고난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침묵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야
55:9).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인생 가운데 밀접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도
있고, 금식할 수도 있으며,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주권자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신자라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잘 분별하길 바라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