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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2011.12. 31. 21:02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어떻게 우리에게 어떠한 것에 대해 더 바르게 깨닫게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언어의 발생과 언어 형성 과정, 그리고 그것이 내함하고 있는 의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언어는 정의만 가지고 돌아다니는 게 아닙니다. 언어는 어떤 개념만을 구체적으로 간단한 부호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른바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을 하는 것인데, 설명하는 그것이 개념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캐취한 전부를 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제 맘대로 언어를 만들었다고 가정할지라도 자기가 표현하는 바 그 내용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람이란 뭐냐?’고 하면 ‘내가 느끼고 보고 경험하고 한 이것이 사람이다.’ 하고 한 일면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면 사람이라는 걸 한번 정의해 봐라.’ 하면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해도 사람은 이런 것이겠다, 저런 것이겠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댈 뿐이지 정확하게, 깊게 전부를 다 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이 무엇인지 압니다. 누가 사람이 뭐라고 설명해서 아는 게 아니라 경험해서 알고 감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영혼의 작용이 있고 정신 작용이 있는 까닭에 결국 모른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걸 다 설명한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란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열 길 물속보다도 더 깊고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가르치는가를 알아야 비로소 바르고 심오한 개념을 거기서 터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죽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를 가리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것을 죽음으라고 하면 제일 간단하면서도 가장 요령 있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들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죽음을 참으로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데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그게 죽음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빚어내느냐, 거기에 어떤 독특성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하나님과 정당하게 가져야 할 생명의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양식을 먹고서 삶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정당하게 늘 먹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살았다는 사람의 중요한 증좌(證左)인데, 그것이 전연 없는 사람이라면 그건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놓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하시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놓으시기 위해서는 생명을 그에게 주셔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다음에는 생명의 양식을 계속 그에게 공급해 주시고, 그러면 그는 계속 잘 먹고 탈 없이 자라 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죽은 사람이 살게 됐다는 상태는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함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하는 사실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 여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죽은 사람에게 씨를 뿌려 가지고 살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게 한다는 것에서는 그 사람 마음 상태가 여하히 진행한다는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의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미친 사람이라도 살려 놓으시고, 폐질(廢疾) 환자도 살려 놓으시고, 정신 나가고 등신과 같은 이도 살려 놓으시고, 한 살이나 두 살 먹은 어린 아기도 살려 놓으십니다. 우리가 일일이 그 심리를 여기에 있는 돌밭이라든지, 혹은 가시덤불 밭이라든지, 길가라든지, 옥토라는 말로 표현 못하는 것입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돌밭이든지, 길가든지, 가시덤불 밭이라든지, 옥토든지 각각 그 마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어떤 의식적인 작용을 해서 거기에 대한 반응을 일으켰다는 것을 지금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 검사도 할 수 없는 한 살 먹은 어린아이 속 같은 경우 중생의 사실이나, 혹은 완전히 그런 이성적 작용(reasoning)을 잃어버려 정신을 마비당한 사람의 중생 사실이나, 혹은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순간에서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는 사람의 중생 사실 같은 것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복음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혹은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건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내려온 중생의 큰 도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중생은 사람의 의사 여하에 관계없이, 사람의 상태 여하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독단의 대권을 가지고 만세 전에 선택하신 그 사람을 적시에 불러내시는 사실입니다. 중생은 하나님 대권의 작용입니다. 사람이 거기에 협력해서 마음 상태가 이렇게 돼야겠다고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한테 “너희는 개과천선해서, 좋은 사람이 돼 가지고 예수 믿어라.” 술 먹는 사람보고는 “술 끊고 예수 믿으시오.” 또 잡기(雜技) 하는 사람들에게는 “잡기 하지 말고 이제 예수 믿으시오.” 그런 소리 않는 것입니다. 당신 있는 대로 먼저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오해하는 까닭에 그 사람의 도덕적 생활을 다 고쳐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 돼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서 작용하는 것은 자기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고 전도자의 어떤 설명이나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신께서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면 술 먹던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술을 먹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그런 걸 가지고 술을 끊어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같이 말한다면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요구가 술 하나에 모두 붙어 다니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고귀한 도리를 미미한 어떤 도덕적 문제 하나에다 연결해서 그걸로 비교하려고 한다면 그건 부정당한 생각입니다.
술 먹는 게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걸로 이야기하면 구원의 큰 도리는 거기에 대해서 탄식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의 부도덕과 연약과 결핍과 죄악을 초월해서 강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건질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길가가 아닌가?
···(다음에)···
김홍전 {교회에 대하여 4} 121쪽~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