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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민의 문화와 역사, 삶이 오롯이 스며든 자연마을인 북동, 사가동, 한성동 등 자연마을에 대해서 모르는 등 제주 자연마을이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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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읍·5면·31동 행정구역 중심…자연마을 관심 부족
제주도민 삶의 터전 566곳…마을마다 이야기 있어
제주도는 제주시 4읍·3면·19동, 서귀포시 3읍·2면·12동 등 모두 7개읍, 5개면, 31동으로 행정구역이 나눠졌다. '한림읍' 등 행정구역은 법정리인 '한림리' '수원리' 등을 묶어 편성했다. 또 법정리인 한림리는 '한림1리' '한림2리' '한림3리' 등 행정리로 구분된다. 한림리 등 법정리에는 다시 '북동' '사가동' '한성동' '문화동' '한근동' '문교동' 등 제주도민이 아주 오래전부터 모여 마을을 이룬 자연마을이 존재한다. 제주도민들은 행정구역인 한림읍이나 법정리인 한림리, 행정리인 한림1리 등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의 문화와 역사, 삶이 오롯이 스며든 자연마을인 북동, 사가동, 한성동 등은 모르는 등 제주 자연마을이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이어진 제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마을 유적인 '제주 고산리 유적'이 발굴되는 등 제주도의 기원은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제주도에 따르면 제주의 옛 명칭은 '도이' '동영주' '섭라' '탐모라' '탁라'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들 명칭 가운데 '동영주'를 제외한 도이, 섭라, 탐모라, 탁라는 '섬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 신화를 보면 태고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고 하는 삼신인이 현재 삼성혈인 한라산 북쪽 모흥혈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다 '벽랑국'에서 목함을 타고 제주에 들어온 삼공주와 혼례를 올리고 제주에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후' '청' '계' 3형제가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해 제주도의 옛 명칭인 '탐라'란 국호를 받아와 탐라로 불리다가, 고려 희종 때(1211년) '제주'로 개칭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566개 마을이 모인 섬
제주도는 현재 7읍·5면·31동으로 나눠졌다.
제주시 지역은 한림·애월·구좌·조천읍, 한경·추자·우도면, 일도1·일도2·이도1·이도2·삼도1·삼도2·용담1·용담2·건입·화북·삼양·봉개·아라·오라·연동·노형·외도·이호·도두동 등이다.
서귀포시 지역은 대정·남원·성산읍, 안덕·표선면, 송산·정방·중앙·천지·효돈·영천·동홍·서홍·대륜·대천·중문·예래동 등으로 구분됐다.
7개 읍·5개 면·31개 동에는 각각 읍·면사무소와 동주민센터가 설치, 행정적으로 구분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제주지역 마을은 법정동과 행정·법정리 등으로 구분된다.
제주시 지역 법정동은 '아라1동' '아라2동' '월평동' '영평동' 등 40곳이고, 행정리는 '한림1리' '한림2리' 등 모두 96개리, 법정리는 '귀덕리' '수원리' 등 모두 84개리다.
서귀포시 지역 법정동은 '서귀동' '토평동' 등 22개동이고, 행정리는 '상모1리' '상모2리' '상모3리' 등 76개리, 법정리는 '상모리' '하모리' 등 51개리다.
제주지역 197개 법정동·리에는 '연미마을' '제성마을' '산이수동마을' 등 566개 자연마을이 있다.
자연마을은 제주도민들이 모여 살던 용천수 인근, 해안가 인근, 화전마을 등이다. 자연마을이 제주의 마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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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마을은 지리적 여건이나 역사·문화적 환경에 따라 전해지는 마을 명칭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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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는 공동체
제주의 마을은 해안가, 용천수 인근 등 물을 구하기 쉬운 곳이나 화전을 일구기 좋은 곳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독특한 지리환경과 화산섬이란 특성 등으로 토지가 척박하고, 빗물이 지하로 쉽게 스며들기 때문에 하천이 발달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이로 인해 제주도민들은 불을 내 밭을 일굴 수 있는 중산간 지역이나, 해안가, 지하수가 솟아나는 용천수가 있는 지역 등에 모여 살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물이 솟아나는 곳이라 해도 해일 피해 우려와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왜구들을 피하기 위해 바닷가는 꺼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물이 스며드는 척박한 토지를 일구는 제주도민 특유의 근성과 생활력으로 중산간 지역 곳곳에 마을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4·3 광풍'으로 중산간 지역 마을은 씻기 어려운 상처를 받았다.
4·3 당시 중산간 지역 마을 가운데 '곤을동' '영남마을' 등은 아예 마을 자체가 사라져버려 '잃어버린 마을'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제주의 마을은 4·3 사건 등이 아니라도 잊혀져가고 있다.
행정기관은 물론, 도민들도 행정 편의상 구분된 행정동·리이나 법정동·리 등을 주로 사용하다보니, 제주도민의 삶이 녹아 있는 자연마을은 자연스럽게 잊혀져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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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가·용천수 등 물을 구하기 쉬운 곳, 화전을 일구기 좋은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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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게 전해줘야할 유래
제주의 마을은 저마다 이야기가 숨어있다.
민군복합형관광미항 건설로 주민 갈등을 빚고 있는 서귀포시 강정동은 '가래현'이라고 불리다가 물이 많은 곳이란 뜻에서 강정(江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또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대정읍 '모슬포'는 대정읍 상모1리 동북쪽에 위치한 '들메기'와 하모3리 서쪽에 위치한 '논물거리'에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 '모슬개(모슬포)'라고 불렸다.
영조 25년(1749)에 상모슬리(上摹瑟里), 중모슬리(中摹瑟里), 하모슬리(下摹瑟里)로 분리됐다.
이후 상모슬리는 서쪽으로 절을 거쳐 남쪽으로 점차 발전됐고, 하모슬리는 동남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상모슬리와 하모슬리 사이에 중모슬리가 있었지만 상모슬리와 하모슬리에 분산 통합됐고, 한일합방 이후 '슬(瑟)' 자가 빠져 지금까지 상모리, 하모리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제주의 마을은 지리적 여건이나 역사·문화적 환경에 따라 전해지는 마을 명칭이 있다.
하지만 마을별로 제작된 향토지 등을 찾아보지 않으면 마을 유래에 대해 알 수 없을 뿐만아니라, 일부 향토지는 마을 지명에 대한 정확한 유래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제주의 마을은 단순한 고유명사로 전락, 제주인의 삶과 문화가 깃든 제주의 마을의 의미를 후손에게 전해주기 위한 제주의 마을 유래와 관련된 자료수집 및 기록 등이 요구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