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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기원과 도읍지 비정에 관한 연구
- 근동기원설에 대한 사서와 언어적 고찰 -
이 진 우*
Ⅰ.머리말
부여와 관련된 우리나라 기록으로 『삼국유사』기이(紀異) 편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형식으로 표현된 함축적인 부여 개국과 관련된 내용과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여의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 사실내용에서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기술되어 실제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여야만 두 고대국가의 영역과 활동범위를 추정할 수 있는바, 이를 검증할 충분한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관련 연구는 고조선과 고대 삼국을 연결하는 중요성에 비하여 미비한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 사가에 의해서 쓰여진 관련 사료중 기원전 기록으로 추정되는『관자』를 위시하여 『후한서』3세기경에 저술된『삼국지』등을 포함하여 부여 관련 사서들과 관련된 연구물 등을 검토하여야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세기초 일인(日人) 사학자들로부터 제시된 연구 결과물인 고조선 <평양 중심설>과 고구려 <만주 기반설>에 의해 고정화된 전통적 사학연구 프레임으로 인해, 부여사 역시 그 기원, 위치와 관련된 연구결과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연원 및 위치비정과 관련하여 선행 연구물을 검토하면 대부분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 활동하던 고구려와 백제의 개국을 마련한 고대국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한-중 고사서 및 고지도에 근거한 지명 위치 해석과 아울러, 고조선을 포함한 고대 삼국의 언어인 고한국어(古韓國語)에 터키계 언어요소가 다수 포함된 언어학적 연관성을 모티브로 하여 부여의 역사적 연원을 찾으려한다. 특히 『삼국지』위지 오환선비동이전 및『후한서』동이전 등에 기술된 부여의 연원 즉, 그들이 옛 망명인 들의 후손이라는 기록을 연원 추적의 단서로 삼아, 그들의 망명시기와 관련된 동서양 기록을 관찰하려고 한다. 이를 통한 부여족의 최초 위치 및 시간 경과에 따른 이동경로를 고고학 및 유전학적 자료를 참고하여 추정 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동아시아에 정착했던 부여족이 남긴 여러 가지 문명과 문화의 흔적들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Ⅱ. 부여 관련사서 및 언어적 관련성 검토.
부여의 개국과 관련된 우리나라 사료로서, 『삼국유사』에는『고기(古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기원전 59년 해모수가 하늘에서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고조선 역대단군의 연대력 기사에서 부여라는 명칭이 최초로 기록 된 고려 말 이암의『단군세기』에 의하면 제22대 단군 색불루가 우현왕으로서 부여(夫餘) 신궁에서 단군의 직위에 오르는 기록에서 부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색불루 단군은 역대 고조선 단군의 적통과는 다른 집단이 정치적 변동에 의하여 단군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 전조선기가 지나고 후조선기인 기원전 13~11세기경으로 고고학적 결과로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건설과 동일시기로 파악된다.
중국 사서에서 부여가 국명으로 처음 등장하는 사서기록으로는 『사기』 「화식열전」으로 부여가 연과 오환의 북쪽에 존재 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내용에 의거하여 부여를 연구하는 기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부여의 위치를 연나라의 수도 지역으로 알려진 북경유역과 난하(欒河) 북부 지역으로 자료를 연구하여 확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후 시기의 기록으로 기원후 1세기 전한의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후한서』등에 기록된 동명(東明)의 탁리국(橐離國) 탈출과 이후 부여국을 건설하는 구체적 설화 내용들은, 이후 고려시대에 발간된 삼국유사 등 부여와 관련 역사를 기록한 사가들에 의해 중국기록이 참고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부여에 대한 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등에는 부여의 위치와 국가 연혁 및 나라의 위세(威勢)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바, 이중 부여의 출자(出自)가 기록된 「위략」에 그들이 옛날에 망명인(亡人)이었다는 사실에서 부여족의 기원을 파악하기 위한 단서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신채호는『조선상고사』에서 부여 국명과 개국 연원에 대해 역사를 연구한 견해로서 부여와 관련된 어원적 정의를 통해 제시한 논거는 연구자의 연구방향에 참고가 되었다.
어원적 정의에 근거하면, 부여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중국기록은『관자』로서 저자 관중이 기원전 7세기경 제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사서이다.후대의 내용 첨삭을 감안하여 연구자들은 기원전 2세기경의 서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규도편에는 조선과 제나라 사이의 조공문제가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강국으로 부상한 제(齊)나라에게 중요한 이슈는 제나라가 춘추시대 패자로서 주후국(周候國) 사이의 조공문제 이외에 북방의 조선과 관련된 무역 상품 교환가치에 대한 논의 내용이었다. 조선은 북쪽에 위치하여 그곳에 식생 하는 표범의 가죽이 특산물로 제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어 통상이 어려우므로 국가무역에 필수적인 교환가치를 정하여 조선의 조공무역을 유도하기 위한 관중의 책략을 기술한 것이다.
『관자』경중 갑편에도 주나라와 조선의 무역에 관련된 내용에 덧붙여 양국간의 거리 8천리가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조선이라는 국명이 등장하는 최초의 사서 관자에서 조선이 아닌 발조선(發朝鮮)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발(發)은 어원적으로 부여를 의미하기 때문에, 발이 조선이란 국명보다 앞서 있어 조선이라는 국체 속에 이미 부여계 통치자가 조선국의 통치체제를 이루었거나 양국연합체가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이를 시기적으로 본다면 부여가 등장하는 최초의 시기인 색불루 단군때인 기원전 13세기 이후의 일로 보여지므로,『관자』에 기술된 기원전 7세기 이전의 정치적 사건들이 연대적으로 포함되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겠다. 또한『산해경』「대황북경」에 기술된 불여국(不與)에 대해, 정인보는 그의 주석에서 불여가 부여라고 하였으며,『상서대전』에는 해동(海東)의 제족(諸族)이 부여를 따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이미 부여가 동북아의 막강한 제국으로 존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부여의 다른 명칭으로서 송나라 형병(邢昺)의 『이아주소(爾雅注疏)』에는 부유(鳧臾)라고 표현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청나라 학자인 오임신(吳任信)은 그의 저서『자안보(字匯補)』에서 부유는 바로 부여라고 해석하였다.
부여의 출자(出自)와 관련하여 가장 이른 시기에 서술된 진수(陳壽)의 『삼국지』「동이전」에는 부여와 관련된 연원과 국세(國勢)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즉, 부여는 나라의 원로들의 말을 인용해 국인(國人)들과 왕족은 옛 어느 나라에서 부터 망명하였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위략의 내용을 덧붙여 선대로부터 강성하고 부유하여 패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부여는 강력한 무기와 군사체계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추정 된다. 또한 부여왕이 죽으면 그 장사를 치르기 위해 한(漢)나라 조정(朝廷) 차원에서 옥갑(玉匣)을 항상 준비하여 놓는다는 내용에서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계였다는 사실이『후한서』부여전 에서도 다시 확인되므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부여와 관련된 역사 논의의 출발점이 시작된다고 하겠다.
부여와 관련 언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관직과 지명 등에서도 고찰할 수 있는데, 앞서 예를 든 『조선상고사』에서 나열된 부여 관련 단어들 즉, 부여(夫餘)ㆍ부리(夫里)ㆍ불내(不耐)ㆍ불이(不而)ㆍ국내(國內)ㆍ불(弗)ㆍ벌(伐)ㆍ발(發) 뿐만 아니라 부여에 대한 고대 명칭인 삼국지 부여전의 비리국(卑離國) 외에도 관자등에 보이는 리지(離支)ㆍ령지(令支)ㆍ부리(夫里)ㆍ불이(不而)ㆍ벌(伐)ㆍ비리(比里)ㆍ발(發)ㆍ불리지(弗離支)ㆍ비여(肥如)ㆍ비이(卑耳)ㆍ비류(沸流)ㆍ예(濊)ㆍ가야(伽倻)등이 같은 의미이며, 특히 가야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국가지만 부여계로 보았다. 부여의 출자 기원과 아울러 언어적 고찰도 본 연구의 주제를 포함하는 중요한 연구요소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어의 언어학적 기원 역시 고대 여러 민족의 언어로부터 형성 되었으며, 특히 강길운은 그의 논고에서 고대 한국 언어 및 삼한의 언어가 터키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지리편에 등장하는 신라지명「星山郡本一利郡一云 里山郡今 加里縣」을 예로 들어, 지명 성산군에서 성(星)의 대응어인 한국어 별의 현대 발음은 pyər이지만 고대어는 bir이고 별이란 의미의 발음은 터키어와 완전히 같다고 보았다. 삼한과 신라 지명연구를 통해 고구려 지배층은 부여어인 부리야트 방언으로 추정하였고, 신라어에서 석탈해와 김알지계는 터키계어, 백제어는 계층에 따라 지배층은 고구려어(몽골어,퉁구스어)를 사용하였고 백성은 드라비다어와 터키계어를 사용하였으며, 가야 지배층은 드라비다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고조선 언어는 퉁구스어, 기자조선은 몽골어, 위만조선은 흉노어인 터키계어로 보았고, 또한『한서』조선전에서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한 니계상삼(尼谿相參)이나『삼국지』위서 위략에 기술된 위만조선 조선상 역계경(歷谿卿)등이 수천호의 무리를 이끌고 진국(辰國)으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에 미루어 진국(辰國)역시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였던 집단으로 보았다.
발해국의 역사를 기록한 『단기고사』 서문에는 저자가 단기고사를 지은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으로 ;
“저자가 명을 받은 지 13년 동안 주야로 근심과 걱정을 하며 왕명을 어길까 두려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와 옛 비(碑)와 흩어져 있던 사서를 참고 하다가 돌궐국(突厥國)에까지 들어가 탐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라고 전하고 있어 발해어가 돌궐 즉 터키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대조영 가계를 포함한 말갈계 발해인이 사용한 언어가 투르크어와 통한다는 사실은 고구려어 그리고 부여어와 일통(一統)한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동일 언어계통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으면 체계적인 어휘군은 좀처럼 교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루어 언어계통이 같다는 의미는 의미심장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를 넘어 동일 계통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집단의 이동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연구결과로 보여 부여의 연원을 찾는 중요 단서가 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연구자는 터키계어가 고대 한국어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사서에 기록된 부여가 존재하던 시기인 기원전 13세기로부터 기원3세기 사이에 터키계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과 연원지를 밝혀보려 한다.
Ⅲ. 사서 분석을 통한 고죽과 부여의 위치 비정
기원전 2세기 이전의 사서『관자』소문편에 기록된 지명 비이계(卑耳谿)는 제환공이 고죽국을 정벌하고 비이계 십여리를 남겨두었다고 기록된 지명으로, 여기서 비이계는 발음상으로 부여와 관련된 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책의 경중갑편에는 제환공이 북쪽의 고죽국과 리지(離支)를 정벌하려는 내용으로 지리상 리지는 고죽의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사기집해』에서는 고죽국의 위치를 요서의 영지(令支)에 있다했고,『정의괄지지』에서는 고죽국이 평주(平州) 노룡현 십리에 있는데 은나라의 제후국이었다고 하였고,『통전』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이며 은(殷)나라 때는 고죽국으로 춘추시대에는 산융(山戎)과 비자(肥子) 두 나라의 땅으로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故孤竹城)이 있는데 백이(白夷)・숙제(叔弟)의 나라로 기술하여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죽국의 위치가 요서와 요동설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죽국의 위치와 관련된 연구에서 신용하는 고죽국에서 고구려가 발생하였다는 『배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고추가라는 관직명이 고죽의 중국고어(中古語)인「kuchu」라는 사실과 동명의 탁리국이 중고어「Tari(Dari)」로서 조선의 연방으로 제나라와 전쟁을 벌인 고죽국 장군이 황화(黃花)였고 그 왕의 이름인 답리가(答里可)에서 기원하므로 부여에서 가장 강성했던 종족이라 밝힌 것은 성과로 볼 수 있으나, 기존 연구자들의 논지와 유의차 없이 현 하북 영평부로 보았다.
고대 영·평주(營·平州)의 위치와 관련된 논의에 대하여『한서』 요서군조 및 『후한서』지리지 등을 근거로, 그 지역 또한 후대에 사서 개정에 의한 위치변이가 있었다는 연구와 아울러 고죽국이 여러 사료에 근거하여 제나라의 남단에 위치하여 북으로 부여로 추정되는 리지 혹은 영지가 위치했음을 보이도록 하겠다. 이에 따라 본 연구자의 관심인 고죽의 지리비정을 위하여, 우선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사기』「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의 전쟁기록에 근거하면 춘추 초에 풍패(豊沛)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기록과 고죽을 정벌한 기원전 7세기인 환공시기에는 하남성 맹진(孟津) 유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뒷받침할 근거로「중국사회과학원 주초봉건도」에는 제나라가 시대에 따라 이동된 위치를 표시하였다. 이는 태공 때 하남성 남양(南陽)에 위치하다가 기원전 6세기 영공 때 래국(萊國)의 정벌 혹은 기원전386년 강제(姜齊)에서 전제(田齊)로 정치주체가 바뀌면서 산동의 임치(臨淄) 부근으로 도읍을 이동한 것을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제환공시기인 기원전 7세기경에 『관자』의 기록과 같이 고죽의 북쪽에 이미 리지(離支)라고 불리는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고, 리지는 불리지로 은상(殷,商) 시대부터 사서에 등장하였던 고조선 일파인 고죽국과 같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위치적으로 이 나라들 보다 남쪽에 있었던 제나라의 정벌에 의해서 기원전 664년 고죽국이 망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하므로 고죽국의 위치는 현 하북성 영평부가 아닌 제나라가 위치한 하남 북방인 산서성 남단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림.1) 하남 남양 이후 산동으로 이동한 제나라. (주초봉건도.1978년)
둘째, 18세기 청나라에 의해서 제작된 「대청광여도」에 근거하면 고죽국의 위치를 말해주는 증거로 산서성 서남단인 해주(解州)에 고죽국 왕자로 알려진 백이와 숙제의 묘(伯夷叔齊墓)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이 지역 답사 결과 운성(運城)에 그의 묘가 있으며 시정부(市政府)등에서도 그곳을 백이숙제의 고향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사기』백이열전(伯夷列傳) 내용과 당나라 전후 중국사서에 기록된 하북성 평주에는 백이숙제묘가 위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평주가 고대에는 하북성 노룡현 인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일수도 있다.
(그림.2) 산서 서남단에 표기된 고죽국 백이숙제묘. (대청광여도,청,18C)
셋째, 위의 두 가지 근거를 두고 산서 남부에 고죽국이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관련 근거를 『사기』「화식열전」 에서 찾을 수 있다.
“부여와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 사이에 도읍이 있다. 남으로 조, 제와 통하고 동북으로 호와 같이 한다. 상곡에서 요동까지 멀고 사람은 적으며 때때로 약탈을 당하니 대개 조(趙)나라와 같이하고 대(代)의 풍속과 서로 비슷하여 …생선, 소금, 대추와 조로 밥을 먹고 북으로는 오환, 부여, 동으로는 예맥, 조선, 진번의 이익을 얽어매고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내용으로 부터 우리는 부여는 조선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인지 할 수 있으며 연나라의 도읍이 위치한 발해와 갈석의 북쪽에 부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대 발해와 갈석의 위치가 부여를 찾는데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다. 위 두 곳의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 수경주를 새롭게 해석한 『해경신탐』에 의하면 고대 발해는 지형의 변화로 물이 줄어들었지만 당시에는 산동 거야택과 황하가 만나는 호수이며 당나라 때에는 남북 3백리 동서 1백리로 대야택(大野澤)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하고 있고, 갈석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 『사기』색은에 의하면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갈석(碣石)은 상산(常山) 구문현에 있는데 이곳은 진나라 장성의 동단으로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하였다. 또한 갈석의 위치에 대하여 말해주는 사료로서 당태종의 4남 이태(李泰)가 쓴『괄지지』에 의하면 한서 지리지 내용 중 호구와 뇌수를 지나면 태악에 이르는 내용에서 태악(大嶽)은 산서에 위치한 곽태산(霍太山)으로 정의하였다. 태행과 긍산을 지나면 갈석에 이른다고 기술한 갈석 또한 왕옥산(王屋山) 부근이므로 당나라 초기 이전에도 갈석은 산서 남부 왕옥산과 중남부 곽태산 부근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연나라는 대체적으로 산서 중부 지역을, 부여는 연(燕)의 북쪽인 산서 북부지역을 영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3) 태산으로 정의된 곽태산과 갈석이 위치한 왕옥산 (대청광여도(청) 18C)
넷째,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부여에 대한 기록으로 다음과 같다.
“기원전 5-6세기경에 불리지(弗離支)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직예, 산서, 산동 등을 정복하고, 대현(代縣)부근에 나라를 세워 자신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불리지국(弗離支國)이라 하니 주서(周書)의 불령지(弗令支)와 사기(史記)의 이지(離支)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중략)..요서의 비여(肥如)나 산동의 부역(鳧繹)이나, 산서의 비이(卑耳)가 다 불의 번역이다..(중략)..발해의 발(渤)도 음이 불이고 불리지가 준 이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2장에서 언급한 부여라는 국호와 관련된 다양한 언어학적 분석은 이미 서술하였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부여국 개창자 이름을 불리지(弗離支)라고 한 것은 단순히 나라 이름과 연동시키기 위한 것으로 판단한다. 조선의 군사들과 함께 산서성 대현(代縣)에 나라를 세웠음을 시사하는 것은 최초강역이 산서 북부와 그 인근 지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자』에 기록된 발조선의 의미와 같이 일단의 선진적 체계를 보유한 부여족이 조선의 백성을 이끌었다 볼 수 있고, 이미 언급된 『단군세기』내용중 기존의 단군과 다른 계열로 보이는 색불루 단군의 즉위 기사와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섯째,『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부여는 장성 북쪽에 있고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읍루, 서로는 선비에 닿아있고 북으로 약수가 있는데 넓이는 가히 이 천리가 된다. 인구는 팔 만호이다”기사와 삼국지 보다 후대에 기술된『후한서』 동이열전에도 같은 내용의 위치 정보가 기술되어 있다.
이밖에, 1921년 중국 하남성 낙양(洛陽)에서 발굴된 고구려 대막리지 연남생의 추증비문과 관련하여 668년 35세때 현토주도독(玄菟主都督)을 역임했던 그가 죽은 뒤 받은 봉토(封土)로 표기된 병분기남(幷,汾,箕,嵐)지역은 대청광여도상 산서성 유차(楡次), 분주(汾州), 유사(楡社), 남주(嵐州)로 당나라시기에 현토지역으로 불리어진 지역으로 현토군이 결국 산서 중부지역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참고로,『구당서』에 요동과 관련된 내용에서 한나라 영토는 낙랑, 현토인데, 지금의 고려, 발해가 위치한 지역이 지금의 요동으로 당나라 영토가 아니다라고 하여 후대의 요동으로 요녕 이동(以東) 지방은 당나라가 차지한 적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기 사서 및 고지도와 비문을 통해 종합하면 갈석 및 한사군지와 관련된 위치가 기존연구의 결과와 다른 산서와 하북 지역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겠다.
Ⅳ.부여의 출자(出自)에 대한 삼국지 韓傳 분석.
부여(夫餘)와 관련된 언어학적 관련성 즉 파생 국가명과 지명 등을 이루는 한국어가 고대 어떤 언어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관성은 이미 2장에서 검토하였고 그 결과 한국고어는 전반적으로 터키어의 영향이 컸음을 설명하였다. 부여라는 국가명은 앞부분 음가인 부리(不而,夫里) 혹은 비리(沸利)등의 발음군과 뒷부분 음가인 령지(令支), 이지(離支)라는 발음군의 연결체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합하면 불리지(弗離支) 혹은 비리지(不離支)등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백제의 비류(沸流)나 가야(伽倻)등이 부여의 어원에서 파생된 언어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언어 분석 결과와 사서의 기록에 의하여 기원전 6C이전에 이미 동북아시아에 진출한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관한 강길운의 한국고어 연구를 기초로 고대음가를 제공한 집단에 대한 실마리를 『삼국지』한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언어적으로 부여(夫餘)와 진(辰)은 터키계언어를 이해하였다는 사실에 기반 하며 그러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다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상기 문장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으로“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 구아진지렴(拘邪秦支廉之號)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라고 하였고, 이 구절의 해석은 대체로 이병도의 설을 따른다 하였는데 부여 출자에 대한 인식부족과 문장의 난해성으로 인하여 아직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바, 최근의 해석 시도로서 문장의 띄어 읽기 변화를 통해“신운국의 견지보, 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하고, 특히 부례구야(不例拘邪)를 프리기아로 해석하여 신채호가 주장한 불리지국(弗離支國), 불령지(弗令支)에 대응한다고 보았다.
본 연구자는 선행연구에 대해 보완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삼국지』한전 내용에서“진한(辰韓)은 고진국(古辰國)이라 하였고, 옛 진왕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는 내용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은 『삼국지』에서 표기된 월지국과 달리 『위략』과 『후한서』의 내용을 들어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의 오기로 주장하는데 대해서 연구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월지국은 고진국(古辰國)과 정치적으로 연결된 국가로 추정되며, 시기적으로 진국(辰國)이라는 존재를 기술한 삼국지 저술시기 보다 수세기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동음(同音)의 흉노 풍속을 가진 강력했던 국가 월지(月氏)가 존재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목(目)은 월(月)의 오기로 보아 연구자는 이 월지국을 다스리는 왕을 고진왕(古辰王)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본문에 출현한 직급 신지(臣智)는 삼한에서 수장을 일컫는 뜻으로 상기 문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로 연구자는 “臣智或加優呼, 臣雲遣支, 報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로 읽으려 하며, 이를 해석하면 “신지 혹은 가우라고 부르는데, 신운국의 견지, 보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된다. 진국(辰國)의 언어가 부여를 비롯한 고대 터키계어 음가와 관련 있으므로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 이전의 국가이름과 지역을 고찰하면『한전』에 기록된 신운국, 보안야국, 분신국, 부례구야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장에 열거된 신지(臣智) 혹은 가우라 부르는 나라와 수장 이름의 음가를 알기 위해 기원전후로 터키어와 관련된 어원을 사용했을 나라들의 명칭을 고대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프리기아(Phrygia)가 부례구야(不例拘邪)·불리지(弗離支)로, 폰투스(Pontus)가 보안야(報安邪)로,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가독(加毒)등으로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어 기원추적에 대한 강길운의 주장을 기반으로 할 때, 위만조선의 대신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망명한 진왕(辰王)이 이끄는 고진국(古辰國)이 터키계어를 사용했고 또한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리는 기록은 시기상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 감숙, 영하성에 존재하다 기원전 2세기말 흉노에게 패한 후 박트리아 지방으로 서천(西遷)한 월지(月氏國)로 대응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월지는 기원전174년 흉노의 노상선우에 의해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서쪽으로 이동하며, 그 지역에 존재하던 대하국(大夏,박트리아)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또한『사기』「대완열전」에 따르면 월지 또한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으며, 고진국(古辰國) 또한 지역적으로 월지가 있었던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이미 소아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7C초 까지 존재하다 먼저 동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문화와 흉노습속을 가진 부례구야 (不例拘邪, Phrygia)의 영향 하에 있다가 이후 동진(東進)하여 진한(辰韓)이란 이름으로 낙랑지(樂浪地)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지리지』에서 그리스, 박트리아 왕들의 세력 반대편에 Phrynoi (흉노)와 Seres(비단, 중국)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부례구야 (不例拘邪,Phrygia)가 한전에 등장하는 고진국(古辰國)이거나 시기적으로 진국(辰國)보다 이른 시기에 동진하여 활동한 사실이 기원전 6세기 이전 기록인 『관자』등에서 발(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Phrynoi의 등장 기록과 관련하여 삼국지『한전』의 기사를 연구한 자료에는 흉노라는 단순설명으로 후속 연구 없이 그친 것은 흉노사 연구에 매우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후한서』등에는 부여와 진번 그리고 고구려를 흉노라 칭했고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던바, 부여와 흉노,고구려와 관련된 특이할 만한 습속으로 형사취수제 (Lavir-ate Marrage)를 꼽을 수 있다. 이제도는 유목민족 원래 혈족의 재산이 족 외로 유출을 방지하고 혈족이 형수를 부양하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흉노계열의 문화인 형사취수제의 전통을 이어가고 터키계 언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와 월지(月支)족의 동진 과정의 중간 기점에 중앙아시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까지 그 습속이 남아있는 카자크스탄(Kazakhstan)을 눈여겨볼 일인 것이다.
(그림.4) 고진국(古辰國) 연원지 추정 아나톨리아 고대국들. (http://www.ancient.eu/asia_minor)
ⅰ) 부례구야국(不例拘邪,프리기아)의 동진과 설화
기원전 20-15C 지구적 기후변화로 인해 동아시아 요서지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가 막을 내리고 융족(戎族)계열이 주도하는 하가점 상층문화가 발생하는 시기에 요서지방에는 강수량 부족과 한랭화의 영향으로 숲과 관목지대가 초원으로 변하여 농사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정주하던 은(殷)족은 중원지방으로 내려가 상(商)왕조를 일으키는 시기와 맞물려 소아시아 및 지중해 지역에서도 가뭄과 한랭화로 인하여 반농-반유목(seminomad)을 하던 종족들은 전투적 유목민화 하고 그중 스키타이(Scythia) 일부가 기원전 8C경 카스피해에서 흑해 북안(北岸)으로 이동 하였다.이 지역 원주민이던 킴메르(Cimmer)가 쫒겨 나면서 , 소아시아에서 이미 멸망한 히타이트제국(帝國)의 공백을 메우며 철기문명 영향으로 번영하던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를 공격하자, 기원전 7C초 이들은 수도 고르디온을 버리고 일찌기 형성된 청동기 전파 루트를 따라 박트리아(大夏)지방과 더 동쪽인 신강지방으로 탈출과 동진(東進)을 감행한 것으로 추정 된다.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는 기원전 16-14C경 이란계 주민이 설립한 고대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미타국(米它國) 혹은 미타니국으로 불렸고 히타이트제국(帝國)이 멸망한 지역에서 발생한 나라로 종교적으로 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신봉하였다. 초기에는 지역적으로 히타이트 문명의 수혜를 받아 철기와 농경문화를 향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5) 청동전차와 청동기 전파 루트는 일치한다.( http://www.waa.ox.ac.uk)
이러한 역사를 개괄해 보면 기원전 6C 이전의 기록으로 여겨지는 『관자』에 기록된 발조선과 『사기』 및 『조선상고사』등에 기록된 부여의 활동시기인 기원전 6-5C는 동서양의 사서 기록으로 비교해 보면 시간적으로 유의차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부례구야(不例拘邪)는 어떠한 이유로 최종적으로 동아시아의 북쪽지방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한 시대에 개척된 것으로 알려진 실크로드 훨씬 이전에 동서방 민족간의 이동로와 무역 통로로서 청동기 루트가 개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아시아에서 중국 서안지방 등에 이르는 그 중간지점에 신강(新疆) 위구르 지역이 위치하고, 이 지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20C이전에 유럽계(Europoid)와 몽골계(Mongoloid)의 인류 문화적 교류가 일어났다고 보고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본다면 알타이 남부를 지나 고비사막과 몽골고원을 통과하여 요서지방 및 요하평원에 이르는 동북 이동로를 통해 요하문명과 다른 한편으로 카자크스탄 남부 초원을 지나 녕하 지역으로 진입하여 내몽골과 산서, 섬서의 경계인 西河를 따라 황하중류에 도달하여 중원지역으로 집입하여 황하문명을 건설한 것으로 고찰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로 미루어 보면 부례구야(不例拘邪)인들 역시 발달된 청동-철기문화를 소유하고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유사한 루트를 이용하여 이미 발달된 전차(戰車) 등을 이용하여 빠른 시간 안에 동북지방으로 진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삼국지』부여전 위략의 내용에서 부여의 기로(耆老)와 부여왕이 구전하는 망명인(亡命人) 의미는 기원전 690년 부례구야(不例拘邪,프리기아)의 왕족 혹은 귀족들이 선진적 철기문화를 가지고 동방으로 망명길에 오른 사건을 일컫는 기록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우리나라 고대설화 속에서 신라48대 경문왕(景文王)과 관련된 「임금님은 당나귀 귀」와 같은 내용의 설화가 부례구야(不例拘邪) 즉, 프리기아의 미다스왕(Midas)의 설화와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약 2천여 년을 뛰어 넘는 시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부례구야(不例拘邪) 사이에 문화적 관계설정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이 밖에,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인 터키에서 거대한 적석목곽무덤(Kurgan)의 존재목곽(木槨)안에서 미다스 추정 유골과 흉노유물의 대명사로 불리는 동복(銅鍑) 그리고 황금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다. 이는 시기적으로도 흉노의 시초이자 스키타이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실로 보인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인에 대한 습속과 외모(外貌) 관련 기사에서“거칠고 크며(粗大)용감하다”는 기록은 북방계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 서양계와 혼혈 관련성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실크로드 상 타림분지 등에서 발굴된 수 천년된 미이라의 평균 신장이 1미터 80센티미터 이상인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인의 체질인류학적 분석자료에 의하면 두개골의 형태에서는 지역적으로 가까운 중국, 일본인 보다 카자크스탄인, 몽골인과 가장 근접한 결과를 보인다. 이로서 부여에서 파생된 고구려, 백제, 신라계의 후손인 현대 한국인들의 북방적 요소를 고고인류학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ⅱ). 부례구야국(不例拘邪)유래 冠帽
『삼국지』변진전에 의하면 진국(辰國)과 동일하게 신지(臣智)라는 수장을 두고 그 다음 품계를 험측이라 하는데, 진국의 두 번째 관직명 읍차가 변진에서는 하위 품계로 변화가 있지만, 변진국(弁辰國)의 벼슬체계 역시 진국과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부여국과 동일하게 변진의 사람들도 체격이 큰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유전학적으로 동일계통의 사람들로 미루어 짐작된다. 진국과 변진(弁辰)국 등의 국가명으로 고찰할 때, 고깔 변(弁)과 관련 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고 짐작된다. 변진의 의속(衣俗)과 관련하여『신당서』와『한원』등의 기록에는 고구려 대가(大加)는 뒤 없는 모자에 소가(小加)는 절풍변 (折風弁)을 썼고, 귀족과 왕은 금으로 된 절풍과 조우관을 썼으며 백제 또한 조우관을 착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로서 경주 천마총의 유물로 금제 절풍(折風)과 입식관모가 발굴되었는데,「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와 고구려 사신의 절풍과 천마총 발굴된 금제 절풍간의 변형 형태를 보여주어 이를 연대적으로 추정해보면 기원전으로부터 이미 소아시아의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로 부터 습속 된 모자 의 변형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변형된 형태의 관모 등의 기원이 동북아 보다 서쪽으로 진출할수록 발굴되는 유물의 연대가 오래된 것이 발굴되기 때문이다.
(그림.6) 신강 롭누르 발굴 펠트모자와 천마총 금동제 절풍.
예를 들면, 신강 롭누르(Lopnur)등에서 발굴된 수 천년전 유럽계 인종(Europoid)이 착용했던 모자는 양털을 가공하여 천으로 직조한 펠트(Felt)를 재료로 하여 고원의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반목 혹은 유목형태의 생활풍습에 맞도록 환경과 문화에 습합된 유물로 보이는바, 이러한 형태의 모자 또한 현재 신강성 등 위구르족(동투르케스탄)의 전통 모자에서 또한 볼 수 있어 문화이동의 중간 지점이 이 지역에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Ⅵ. 맺음말
부여의 기원에 대한『삼국유사』의 기술은 『고기』의 내용을 취했지만 이보다 앞서 저작된 중국사서를 참고하여 북, 동부여 개국과 관련된 신화형식으로 간결하게 묘사하였고,『삼국사기』에는 무력한 부여의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사서에서 부여라는 국가명이 나오는 최초 기록은 『사기』화식열전으로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 있음을 기록했다. 또한,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부여 관련 기록은 『관자』의 발조선으로 발(發)은 부여를 나타내는 여러 이칭 중에 하나로 고조선과 연합된 형태의 부여로 판단되며, 관자의 저술 시기를 기원전 6세기로 보면 이미 부여는 그 이전에 존재하던 국가로 추정된다. 조선과 병립했던 부여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으로,『관자』 소문편에 제와 고죽 그리고 부여간의 위치,『제태공세가』에 기록된 제나라 위치,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지도」등을 종합하면, 부여는 고죽국 북쪽에 그리고 그의 남쪽에 제나라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대청광여도」등에 근거한 지리비정 결과 제는 하남에, 고죽은 산서 남단, 그리고 그 북쪽에 부여가 있었음이 증명된다. 부여의 도읍은 사서와 신채호의 추정 근거에 의하여 산서 북부지역인 대(代)지역으로 보인다.
한국고대어의 언어계통 고찰에 의하면 고대 삼국 등 역시 터키계 언어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는데 ,일례로 『단기고사』서문에는 돌궐에서 역사를 찾은 기록을 보면, 발해 동조(同祖) 고구려 역시 터키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터키계어를 사용한 위만조선의 급변으로 인해 재상과 백성들이 망명한 진국(辰國)의 언어 역시 터키계 언어로 볼 수 있다. 동일 언어계통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으면 체계적인 어휘군은 좀처럼 교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루어 언어계통이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로서 고대국가에 언어적 영향을 준 터키계어의 연원 추적에『삼국지』부여조에서 기로들 스스로 망명인(亡人) 이라는 기록이 핵심으로 판단된다. 부여족의 망명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한전 진국(辰國)조의 옛진왕(古辰王) 관련 기록인“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구절에서, 부례구야라는 단어가 부여와 연관된 국가명 임을 찾아낼 수 있다. 한어음차인 부례구야(不例拘邪)는 기원전 7세기경 소아시아에서 탈출하여 철기문화를 보유하고 동진한 터키어를 사용하는 프리기아(Phrygia)인들로 추정된다. 즉, 그 망명인이 기원전 6세기경 중국기록에 발(發)조선국으로 등장하고, 3세기에는『삼국지』에서 망명인(亡人)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시공간을 넘어 신라 경문왕과 미다스왕의 「당나귀 귀」 설화는 문화적 일치성을 설명하는데 충분하며, 아울러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서 복식화 된 절풍과 관모 형태는 연원적으로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에서 진국(辰國)의 일파인 변한(弁韓)에 전달되고 시기적으로 삼국에 변형된 형태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체질인류학 연구결과 한국인의 두개골지수와 카자크스탄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 지역이 고대 민족이동경로의 중간지점으로 상기 결론의 내용들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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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A study of the origin of Buyeo(夫餘) and the location of nation.
Lee, Jin-Woo
The story of foundation is well described as a legendary style in Samgukyusa(三國遺事) and briefly in Samguksagi(三國史記). On the contrary, we can find the first details on Buyeo at Gwanzi(管子) of Shiji(史記) written by historian Shimaqian(司馬遷) in the B.C 1st centry. According to this record, the first word Bal in Bal-josun (發朝鮮)means Buyeo so, we can presume this country already existed before B.C 6th century. Many researchers studying on the Buyeo and most of them present location of Buyeo to the east-northern part of Beijing or the near Ruanhe(欒河) area. This result came from wrong interpretation of Shiji(史記) because many researcher did not consider Ji(齊) and Gojuk(古竹) moved location as dynasty change. The location of Gojuk was scrutinized through reading both chinese official map and Zhengyikuodizhi(正義括地誌) which described on geographical definition of China area in Tang era. In result, Ji(齊) located in Henan(河南) so, he invaded northward Gojuk(古竹) located in Shanxi(山西). This result means Buyeo(夫餘) located in northern area of Dai(代,大同),Shanxi(山西). The linguists studied Korean language insisted that Korean influenced by ancient turkish language. Most part of Korean words came from the Tungustic and Turkish language. For instance, it is told that when Balhae historian Daeyabal(大野勃) wants to write history Dangigosa(檀紀古事),he should refer Turkish history even visit there. From this story , we can imagine that Buyeo and Goguryo used Tungustic and Turkish language. From this fact, Sanguozhi(三國志) said aged aristocrats of Buyeo unveiled their ancestor had exiled from somewhere in old days. So, this historical fact is the key to find the origin of Buyeo(夫餘).
Hanzhuan(韓傳) in Sanguozhi(三國志),also told that ancient king of Jin(辰國) governed Yuezhi(月支國). Here, we can presumed that Jin(辰國) and Wimanjosun(衛滿朝鮮) understood turkish-korean language because two ministers of Wimanjosun(衛滿朝鮮) fled to Jin(辰國) when Wimanjosun(衛滿朝鮮) was destructed by Han(漢). From this fact, two countries may have same culture and language. Hanzhuan(韓傳) showed the sentence like a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which related with convoy name of each country. The chinese country name 不例拘邪 is matching to Phrygia in pronunciation the ancient country in anatolia. The name Buyeo,Furiji(夫餘,弗離支) is constituted from the suffix and prefix like those Buri(不而) and Rigi(離支). According to the history of Phrygia, it is believed that tribe fled to the east somewhere after fatal demolish by Cimmerian in B.C690. This history probably connected to the exile story of Buyeo aristocrat from somewhere. This means that exiled Phrygian(不例拘邪) from anatolia in B.C7C then appeared again in Shanxi at B.C6C as Bal(發) could be natural in chronological order.
Besides, the same legend story " Donkey ear King" of Silla and Midas in Phrygia suggested they had same cultural background. The shape of phrygian cap may influence to form a shape of official cap in Goguryo and Shilla. Thus, recent biological anthropology reported that skull structure of Korean is almost near that of Kazakhstan and Mongol people rather than Chinese and Japanese,, this means they have ethnic affinity.
전국시대 연은 하남성 무양현에 존재했었고 진개때 북경유역을 침범했으나 계속 점유하지 못했다.
첫댓글 소위 고주몽이 (북)부여를 계승하는 고구리를 개창하는 과정에서
부황 (북)부여의 여러 제후국들을 재차 대연방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남당유고 추모경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고
남당유고 고구리사(략/초)의 기록을 살피면, 부여족이 아니었던 선비족 또는 비리족 통치자의 자치속국들이
때론 복속하고 때론 이산해나가는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서력 기원이후의 "부여"에 대한 기록을 바로 고구리의 서쪽(서남방 및 서북방)의 부여 제후국들에 대한 기록으로 보며,
동부여는 대무신왕 시절에 토벌하여 속국으로 삼았지만...이때 이탈하여 나간 이들이 후세에도 역시 "부여"로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계속)
따라서, 대부여 및 북부여와 동부여를 합친 모든 부여국은 기실 역사가 대무신왕(대무신제) 시절에 끝난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방장님,북부여의 원거주지인 산서와 만주(내몽골과 요령, 길림, 흑룡강)지역에서 흉노에 쫓긴 부여족 일파가 한반도(현 경주중심의 신라와 경남을 중심으로 한 가야)로 남하하여, 일본열도로 건너가 존재한 것으로 보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대륙의 신라와 가야 세력과는 어떻게 연계하여야 할 까요?
다른 세력으로 보아야 되지않을까요? 대륙의 신라가 원 신라...
실록에는 삼국의 시조를 묘를 정비하고 모시지만 부여는 유독 거론조차도 안 합니다.
그 이유가 저는 부여가 외부에서 온 침략족일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손진기의 동북민족원류에도 보면 예족을 점령하여 왕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고구려가 예족과 맥족의 연합민족이라면 부여는 이들을 지배했던 지배민족이었던 거죠.
고구려를 계승한 후대의 나라들이 다 똑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실록에서도 삼국의 묘효는 정비했지만
부여는 거론 조차 하지 않았던 거죠. 저는 이점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는데 손진기의 책을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부여가 지배족이면 당연히 피지배족은 고구려의 원종족이죠.
합당한 논리 같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스키타이의 일족들로 보이는데 ..형제들도 3-4대가 흐르면 이익에 따라 서로 적이되는 수가 다반사니 그런 이치라고 보입니다.
한나라때 대국을 경계로 동쪽은 동이, 서북쪽은 북적으로 표기했는데 아직도 장안동쪽 려산근처에 대왕촌(代王)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려산일대를 려융국의 땅이라고 하니 대략 려산동북쪽은 부여의 땅, 서북은 훈족의 땅으로 규정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