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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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기아가 인도 여행길에 오르면서 남편에게 메모를 써서 냉장고 문짝에 붙혀 놓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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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지 마라”
=까스 조심하고, 불조심하고
지퍼 단속 잘 하고 기둘려.
마누라 돌아온다.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어라...
그것을 본 프라기아 남편이 멍때리고 있자
딸내미 아티티가 아빠한테 속닥거린 뒤
그 옆에 이렇게 붙여 놓았다고 한다.
“웃기지 마라”
=웃음이 절로 난다. 기뻐 죽겠다.
지퍼 단속은 내 자유다.
마누라는 오든지 말든지
라면은 먹든지 말든지...
ㅎㅎ
용감무쌍 뻔무비 프라기아 오시면 확인 바래용~~~
●산야스 네임 풀이
다음은 오쇼가 생전에 “사난다Sananda”라는 산야스 네임을 제자에게 주면서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한 내용이다.
사난다.
‘지복의, 기쁨에 찬, 유쾌한’ 등을 모두 의미한다.
그것들은 모두 각기 다른 층 위에 놓여 있다.
“지복에 차 있음‘은 절대적으로 내적인 어떤 것, 어느 누구도 그것을 외부에서부터는 알아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표면적인 것에는 적용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깊이에 있어서만, 표면의 물결들로는 알아볼 수 없는 심연과 같은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대는 그대 존재의 심오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때에만 그대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기쁨은 지복의 외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지복은 아니지만 지복의 표면적인 반사이다. 지복은 핵심에서의 일어남이며, 그것은 그대의 전 존재를 진동시킨다. 그리고 그 표면에서는 기쁨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기쁨이란 지복의 부산물이며, 지복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사람들이 통상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기쁨이 아니다. 다른 어떤 것 곧 쾌감이다. 사람들이 ‘난 즐기고 있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느낌이 기분이 좋다라는 것이지 거기에 기쁨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기쁨은 지복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지복의 부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유쾌함이란 기쁨의 부산물이다.
기쁨은 때로는 일어났다가 때로는 사라질 것이다; 유쾌함은 그대 인성의 한 특징이 된다.
기쁨이 또 다시 몇 번이고 찾아온다면 그때 천천히 그대의 인성은 그를 통해 변화되고 유쾌함이라는 성격적 특징을 지니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전혀 아무 이유 없이도 유쾌하다. 기쁨이 자꾸자꾸 되풀이되어 일어날 때 그것은 당신의 얼굴과 눈과 입술, 당신의 촉감과 당신의 진동 속에 흔적들을 남긴다.
지복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며 기쁨은 그 첫 번째 부산물, 유쾌함은 그 두 번째 부산물이다. 하지만 사난다(sananda) 속에는 그 모든 것이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그 모든 표현 속에서의, 뻗어나올 수 있는 모든 가지 속에서의 기쁨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흡수되어야만 한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놓쳐버린다면, 그대는 지복의 차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지복에 찬 사람은 기쁨에 차 있으며 또한 유쾌하기도 하다. 유쾌함이 일어나지 않는 다면 단지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그대의 표면이 그대의 깊은 이면과 접촉하고 있지 않으며, 그대의 의식적인 마음이 그대의 무의식적인 마음과 소통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떤 다리를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으며, 어떤 연결이 어딘가에서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다리들이 완전하게 잘 작동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이 세 가지 모두는 함께 나타난다. 그것이 곧 기쁨의 완성이다.
(Sananda. It means blissful, joyful, cheerful. And they are all on different layers. Blissfulness is something absolutely inner, nobody can see it from the outside. It is not available on the surface; it is only in the depth, of the depth You cannot see it in the waves; you will have to dig deep into the profundity of your own being, only then will you find it. Joy is its outer expression; it is not bliss but just a reflection of bliss on the surface. Bliss is happening at the core, it vibrates your whole being, and joy arises on the surface.
So joy is a by-product of bliss; without bliss there is no joy. What people ordinarily call joy is not joy, it is something else; it is pleasure. When they say, 'I am enjoying', they are simply saying that this sensation is pleasurable, not that there is joy in it. Joy is not possible without bliss, it is a by-product of bliss. And in just the same way, cheerfulness is a by-product of joy
Joy will arise sometimes and will disappear; cheerfulness becomes a characteristic of your personality. If joy comes again and again, again and again, then slowly slowly your personality is changed through it and it starts having a characteristic of cheerfulness; one is simply cheerful for no reason at all. Joy is happening so much again and again that it leaves traces on your face, in your eyes, in your lips, in your touch, in your vibe.
The real thing is bliss, the first by-product is joy and the second by-product is cheerfulness, but they are all joined in sananda. It is joy in all its expressions, in all its branches. And all have to be imbibed: if any one thing is missing out of these three, then you are missing one dimension of blissfulness. A really blissful person will be joyful and cheerful too. If cheerfulness is not arising that simply means that something is wrong. Maybe your surface is not in contact with your depth, your conscious mind is not in communication with your unconscious mind. Some bridge somewhere is missing, some link somewhere is broken. But whenever all bridges are functioning perfectly well, all these three things appear together. That is the perfection of joy.)
-Osho Darshan Diary "Don't Bite My finger; Look where I'm pointing" 22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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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Daya Sananda에 대하여
산야스 네임은 중간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모든 여자 산야신들에게는 Mather를 뜻하는 Ma라는 단어를 앞에 붙인다
이것은 우리 안에 본래부터 깃들어 있는 본성과 우리들 각자에게 탄생을 준 그 잠재적 능력을 상기시키기 위한 오쇼의 배려이다.(남자들에게는 master를 뜻하는 Swami라는 단어가 앞에 붙음)
Daya는 Kindness(친절, 다정함)/ Compassion(연민, 동정심)을 뜻한다.
오쇼는 카비르의 시를 강의하면서 이 단어를 ‘자비, 관용. 인정. 인정 많은 행위’ 등을 의미하는 Mercy로 번역한 적이 있다.(오쇼 "Ecstasy- The Forgotten Language" 7장 참조)
카비르처럼 깨달은 성자가 인간에게 가지는 그런 사랑인 것이다.
친절이나 다정함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밝고 긍정적인 감정이요 사랑이고, 자비나 연민은 깨달은 자나 모든 붓다들, 성자들이 인간에게 가지는 지고의 사랑이다.
Sananda와 마찬가지로 친절이나 다정함은 자비심의 부산물이고, 자비심은 친절과 다정함 그 깊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절대적인 사랑, 차별없는 무제한의 사랑인 셈이다. 기쁨이나 유쾌함을 통해서는 친절함과 다정함을, 지복을 통해서는 무한한 자비심을...
이렇듯 곰곰 생각해보면 Sananda와 Daya는 서로 상응관계에 있으며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는 이름들이다 .
인간적인 것과 지고의 것의 완성, 그것이 Sananda와 Daya라는 말의 심오한 의미같다.
Ma Daya Sananda~
당신에게 진정한 축복과 사랑을 보내며~~
다음은 깨알 썰 투!
●설날이지만 인천 공항 로비에는 세계 각처로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프라기아는 한 무리의 사모님들과 환담을 나눴다.
저마다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곤 했는데 프라기아가,
“우리 집은 이건희씨 옆집인데...”
허걱! 사모님들이 눈이 동그래지며,
“호! 인물이시다.”
“진짜세요? 언냐 갑부집 딸인가부다. 옴마옴마”
그러자 프라기아가 좌중을 진정시켰다.
“이건희씨. 나이는 38세구여 무직에 노총각이더라구여.”
푸 하하하~~~
프라기아, 아니 사난다 지금은 어디 계시는지~
무직노총각 이건희씨에서부터 대한민국 대표재벌 이건희 회장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축복과 유쾌함을 나눠주세여
(그 중 나도 빠뜨리면 안되는 건 잘 아시겠져? ㅋㅋ)
은총과 축복과 사랑이 가득 넘치시길 빌며~~~
첫댓글 넘 재미있고 유익하게 잘 읽었어요.... ㅋㅋㅋ
ㅎㅎㅎㅎㅎ
역시 리아님은 글로 웃겨주시는 재주가 탁월하십니당 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리아님께도 많은 축복이~~~
Wow~~~ 자비에대한일깨움감사합니다 _()_
라아님은 못하는게 없으셔~~ ^^
ㅎㅎㅎ 고맙습니다. 사난다 덕분에 이런 글도 쓰게 되다니... 영광이요 행운이랄 수 밖에 ㅎㅎㅎ 혹 다른 분들 중에도 산야스 받으시는 분 있으시면 이와 같은 형태로 영광에 동참하도록 노력해보것습니다요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