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어디서부터 무슨 말로 시작해야 좋을까. 말문을 열기가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은 내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지나온 나날을 돌이켜보는 처지도 아니고, 어느 눈부신 금자탑을 쌓고 거기에 자랑을 늘어놓을 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해외진출을 실현시키고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섰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눈앞에 닥쳐온 일본에서의 투수생활에 대한 희망과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므로 나는 지난 11년간의 선수생활, 더 길게 말해서 23년간의 야구인생을 말하기 전에 1995년 11월30일 박건배 구단주가 나의 일본진출을 허락해 주시던 때의 감격, 그리고 그뒤 일본진출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느꼈던 일들로부터 얘기를 풀어가려 한다.
1995년 11월의 마지막 한주는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보낸 시간이었다. ‘보유선수조항’이라는 족쇄가 단단히 걸린 한국 프로야구의 테두리 안에서 순리적으로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 나에게 꿈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다가, 또는 이틀이 멀다 하고 광주―서울을 비행기편으로 오르내리다가 ‘혹시 이거 내가 꿈꾸고 있는 거 아닌가’하며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어보고는 아얏 하며 남몰래 웃을 정도로 엄청난 행운이 꿈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박건배 구단주는 1995년11월23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OB구단의 95시즌 우승축하회에서 국민의 여론을 들어보고 나의 해외진출 여부를 결정짓고 11월30일 공식발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1주일. 얼마나 긴 시간이었던가. 매스컴의 보도로 보아 나의 일본진출은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었지만 구단주의 입에서 “선동열의 해외진출을 허락한다”는 말씀이 딱 부러지게 나오기 전까지는 ‘혹시 이러다가 뜻하지 않은 일로 꼬투리잡혀 갑자기 산통깨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가슴이 조마조마해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내가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나를 보고 “이젠 걱정마세요. 다 해결됐으니까 어서 주무시기나 하세요”하고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운명의 기로에 섰다는 긴장감에 휩싸인 당사자인 나로서는 99%가 성사됐다 하더라도 변수가 될 수 있는 나머지 1%에 애간장이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해외진출이 성사되지 않으면 해태 유니폼을 벗고 야구를 집어치우겠다고 선언했던 만큼 나에게는 그야말로 운명의 기로에 선 것이었다. 하루가 왜 그렇게 안가고 1주일이라는 놈이 왜 그렇게 긴지.
마침내 11월30일. 서울 마포에 있는 해태구단 사무실에서 국내의 모든 신문·방송사는 물론 일본에서도 엄청난 보도진이 몰려든 가운데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날 이상국 단장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30일 아침 9시까지 구단으로 들어오라”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설마 날 보내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하려고 들어오라는 건 아닐 테지’하는 생각에서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기자회견석상에 앉기 전까지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박건배 구단주님이 마치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선동열 선수의 해외진출을 허락하셨습니다.”
숱하게 기대하고 또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노주관 사장이 박건배 구단주님을 대신해서 나의 해외진출을 허락한다고 공식발표하는 순간 등허리에 찌르르 전율이 오고 숨이 턱 막혔다.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주택복권 1등에 당첨됐다 한들 이보다 더 기쁘겠는가.
그 순간 여러가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드디어 나도 외국무대에서 내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이고 평가받을 수 있게 됐구나 하는 것이었다.
해외진출!
프로야구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머리 속으로 그려보는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일본 프로야구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당당히 겨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선수에게는 더더욱 간절한 소망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는 더큰 명예와 부가 보장되지 않는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유행어처럼 나돈 ‘국제화시대’니 ‘세계화’니 하는 말들은 그동안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만 들려왔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는 말들은 오히려 소외감을 주고 나의 부아를 돋구었다.
박찬호는 1994년 1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는데 나는 뭔가. 내가 그보다 능력이 떨어진단 말인가. 내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이라면 거기까지는 인정하자. 그렇지만 시대를 잘 타고난 박찬호는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진출해서 양양한 앞날을 기약하고 있는데 나는 야구인생의 절정기를 해태를 위해 다 바쳤는데도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남은 2~3년의 선수생활을 외국에서 보내게 해달라는 소망마저 들어주지 않다니. 때마침 나에게도 1993시즌이 끝난 후 일본으로부터 손짓이 오지 않았던가.
박찬호의 미국진출 사실이 밝혀졌을 때 기자들은 같은 야구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져 왔다. 나는 “참 잘된 일이다.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겉으로는 선배답게 의젓하게 답변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속으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어느 기자가 “개척자는 외롭고 희생적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기사를 써서 나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었지만 이미 의욕을 상실한 나로서는 1994시즌에 혼신의 힘을 다 하기는 아예 글러먹은 일이었다. 1993년에 10승31세이브라는 엄청나게 좋은 성적으로 재기했다가 1994년에 6승12세이브로 미끄러진 것은 몸의 병이 재발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1억3천만원이나 받는 선수가 그런 성적에 그쳤다면 당연히 감액대상이라 하겠지만 해태구단이 “2세이브를 1승으로 간주해서 15승 이상 올리면 감액하지 않는다”는 호의적인 옵션을 걸고 1995년 연봉을 삭감하지 않은 것은 이런저런 사정을 따져볼 때 나한테 연봉을 깎자고 덤빌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배려만 해도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나에 관한 일이라면 콧물만 심하게 흘러도 기사화되는 판이라 연봉을 외부에 숨길 수도 없었고 구단이 각별히 나에게만 베풀어준 관대한 처분을 바라보는 후배들의 눈도 있고 해서 1995시즌에는 열심히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박찬호는 박찬호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뛰었다. 1995시즌에 올린 5승33세이브 방어율 0. 49라면 전년도의 부진을 완전히 만회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육체적인 건강을 되찾았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차분해진 덕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해태 타이거스는 1995시즌에 투타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바람에 4위에 그치고 포스트시즌 게임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나의 역투는 우승에 관한 한 헛수고가 되고 말았지만 역시 “평소에 잘하라”는 평범한 가르침을 잘 따른 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1995시즌 후반에는 고려대 11년후배인 조성민이 일본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진출하는 영광을 안았는데 만약 내가 1995시즌을 얼렁뚱땅 평범하게 보냈더라면 조성민의 개가에 또 한바탕 배앓이나 했을 뿐 나에게는 해외진출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잘했다’는 것은 두가지 뜻을 갖고 있다. 첫째 나는 한국프로야구 무대에서 자타가 공인할만큼 어지간히 좋은 성적을 올렸다.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성적에 관한 한 더이상 겨냥할 목표가 없을 지경이었다. 팬들이 나의 해외진출을 마치 자기 일처럼 성원해준 것도 내가 우리나라 프로야구 무대에서 할만큼 했고 기록과의 싸움에만 매달리고 있는 내가 너무 외롭다는 걸 이해해 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의견조사에서 광주팬들조차 해태의 우승보다 나의 앞길을 열어주는 게 좋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이 과반수였으니 그렇게 해석해도 큰 오해는 아닐 것이다.
또하나는 기자들의 성원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특별히 기자들을 잘 대해준 적은 없지만 그들을 적으로 돌려세운 적도 없다. 기자들은 선수들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그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 선수들을 위한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을 생각하면 내가 스타랍시고 그들 앞에서 거만을 떨 수는 없었다. 오늘날 내가 있기까지는 물론 나의 재능과 노력도 적지 않았지만 기자들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의 해외진출이 중대이슈로 떠올랐을 때 기자들의 위력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여러 언론매체 중에서 일부만이라도, 다만 2~3개 언론기관만이라도 “선동열은 해외에 나가서는 안된다. 끝까지 한국에 남아 해태를 위해 뛰어야 한다”고 물고 늘어졌더라도 나의 일본진출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일본행을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보아주신 야구담당기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기자들이 나를 ‘국보’로 부르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살려준다는 점에서는 고맙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선수로서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올해 30세이브를 따내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응당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는 한국보다는 분명히 한 단계 수준이 높은 일본무대에 ‘도전자’의 입장으로 뛰어드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야구를 대표하는 특사(特使)로서 ‘일본정벌’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주니치구단의 일원으로서 내가 소속된 구단의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만에 하나 내가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한국의 국보가 빛을 잃거나 한국특사가 일본에 무릎꿇는 것으로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아하 선동열이 겁을 집어먹고 있구나’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를 ‘국보’로 추켜세운 것은 내가 한국에 그냥 눌러앉아 있기에는 아깝다는 의미에서 극존칭을 써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도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면 타자와 대결하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일개 선수이긴 마찬가지다.
아무튼 내가 목표한 성적을 올리고 주니치구단도 목표한 우승을 동시에 이루어 ‘선동열’이라는 나 개인과 주니치의 우승을 도운 ‘한국인’이라는 두갈래 이름이 함께 올라간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겠다. 1995년 해태의 예에서 봤듯이 나 자신은 뛰어난 성적을 올렸더라도 내가 몸담은 팀이 포스트시즌에서 탈락했다면 결코 행복한 시즌을 보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있다. 내가 왜 굳이 정든 해태 타이거스를 떠나 낯선 일본의 주니치 드래건스로 뛰어드느냐 하는 문제다.
일본에 가면 물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그런 목적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지난 11년간 해태에 몸담고 있으면서 계약금과 연봉으로 벌어들인 것과 똑같은 액수를 일본에서는 단 1년만에 벌 수 있다. 선수생활 말년에 하느님이 주신 특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돈벌이만이 해외로 나서는 목적은 아니다. 그것만이라면 굳이 낯설고 물선 땅으로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건 너무 비참한 얘기다. 한국에서 2년만 이를 악물고 고생하면 제 모국에서 10년간 챙겨야 만질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며 몰려드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나의 경우에 대입시킨다면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도 재산이라면 크게 욕심부리지 않아도 좋을만한 위치에 이미 올라있다.
내가 남은 투수인생을 굳이 일본에서 전력투구하기로 작정한 것은 비록 선수생활의 말년이나마 나의 능력을 테스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 것일까. 한국에서는 내로라 하는 구위를 자랑했던 내가 한 차원높은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도 통할 것인가. 나의 타자처리능력, 바꿔 말해서 야구를 읽는 눈이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에 해당되는 것일까..... 한결같이 궁금하기만 한 의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