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4] 6월 민주항쟁(상)
"학생 연행하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사진설명>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군 빈소를 찾은 김 추기경.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성토하는 '아고라'(agora, 고대 그리스 시민광장)였다.
1987년 1월14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다. 경찰에서 "심문 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날조한 그 사건 말이다. 박군 사건은 고문으로라도 권력을 지탱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추악한 실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나도 시민과 학생들 못지않게 분노했다. 독재나 민주화운동 문제 이전에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짓밟은 만행이었다. 1월26일 봉헌된 박군 추모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은 카인에게 물은 것처럼 '네 아들, 네 제자, 네 국민인 박종철군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박군 추모미사와 진상규명 촉구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경찰의 저지도 필사적이었다. 내가 내 집인 명동성당에 들어갈 때 경찰 검문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성당마다 박군 추도 타종(打鍾)을 하자 부산의 어느 성당에서는 누군가 종의 추까지 떼어버리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개헌요구를 거부하는 '4.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탄압 고삐를 더 바짝 죄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방식은 지금처럼 직선제가 아니고 간접선거제였다. 정부는 하늘의 뜻인 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헌(護憲)'으로 맞서면서 장기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민중의 분노는 5월18일 고 김승훈 신부가 박군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6월10일 전두환 대통령의 육사동기 노태우씨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두 사람이 체육관에서 두 손을 높이 치켜드는 순간 마침내 그 분노가 폭발했다.
'6.10 규탄대회'를 마친 학생과 시민 수백명이 그날 밤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사태가 숨가쁘게 전개됐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즉각 해산을 종용했다. 성당 들머리에서 간간히 투석전이 벌어졌다. 경찰이 쏜 최루탄이 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주교관 앞마당까지 날아왔다. 그 바람에 명동성당에서 일생 일대의 혼배성사를 올리기로 예정된 신랑신부 4쌍은 13일 '눈물의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팽팽한 긴장이 이틀을 넘기고 사흘을 넘겼다.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나왔다가 성당으로 피신한 시위대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의 큰 힘이 되었던 소위 '넥타이 부대'가 그때 처음 등장했다.
시위대와 경찰이 무작정 대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태 수습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난 시위대에게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면서 각목과 화염병을 버리라고 얘기했다. 다행스럽게도 시위대가 내 말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나와 명동성당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학생들을 보호해 주어야 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이다.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말라는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젊은 신부들 40여명이 나라를 위한 특별미사를 봉헌한 뒤 성당에 남아 시한부 농성에 들어갔다. 시위 학생들의 몸부림이 이 땅의 민주화를 향한 큰 걸음이기를 염원하는 상징적 조치였다.
경찰 고위 관계자들은 사태수습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함세웅 홍보실장 신부, 김병도 명동본당 신부를 몇차례 만나고 돌아갔다. 신부들은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안관계자 회의에서는 강제해산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았다.
밤이 되면 긴장감이 더했다. 한바탕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정부 고위당국자가 늦은 밤에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면서 에둘러 말했다. 눈치를 보니까 학생들을 강제연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듯 했다.
"무슨 말씀인데 그렇게 망설이십니까? 오늘 밤에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통보를 하러 오신 거지요?"
"……."
"제가 하는 말을 정부 당국에 전해주십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내 입장은 확고했다. 공권력 투입과 학생 연행은 상징적으로 시국 방향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 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나가느냐, 아니면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승패가 드러날 것 같은 기(氣) 싸움의 마지막 승부처 같았다.
고위인사에게 그렇게 말은 해놓았지만 결과는 장담하지 못했다. 만일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면 시쳇말로 '막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꽤 깊은 밤이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나와 성당 구내를 둘러본 뒤 신부와 수녀들이 모여 있는 기도회장으로 들어갔다. 하느님 앞에 앉아 20분쯤 기도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하느님이 도와주셨다. 정부 당국은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고 14일 밤에 경찰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튿날 학생들은 해산 여부를 놓고 투표를 벌였으나 농성을 계속 해야 한다는 강경파 목소리가 만만찮은 것 같았다. 투표가 세차례 거듭되는 중간에 들어가서 20여분간 학생들을 설득시키고 나왔을 만큼 해산 결정에 진통이 컸다. 마침내 엿새 만에 농성이 끝났다.
학생들은 그날 오후 성당측에서 마련해 준 버스 3대에 나눠타고 학교로 돌아가서 해산했다. 나와 신부들, 그리고 시민들은 버스를 타고 성당 들머리를 내려오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6월 항쟁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이미 대세(大勢)는 기울어졌다. 결국 노태우씨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한다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평화신문, 제777호(2004년 6월 13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