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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2019년 기해년 새해를 맞아 시산제를 겸한 답사를 시작합니다.
2009년 수원 광교산下 사직단 2011년 대전 금병산下 2012년 강화도 고려산下 2014년 음성 수정산下 2016년 이천 설봉산下 2018년 화성 두견봉下 2019년 수원 사직단에서
회원님들 모두의 정성어린 마음을 담아 시산제를 지내려 합니다.
2009년 1월 11일 갑자기 날씨가 영하16도로 떨어져 동장군의 위력이 대단했던 날, 광교산은 너무 무리다 싶어 상의끝에 장소를 옮겨 사직단이란 곳에서 처음으로 시산제를 지냈습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현수막을 걸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떡시루를 앉히고,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도 올리고, 함께한 회원 30명은 무릎꿇고 엎드리어 경건한 마음으로 간절함을 빌었습니다.
추운 날을 주시어 장소를 변경한 것도 행사가 다 끝나가는 시점에서 알았습니다. 떡시루를 놓았던 곳이 정확히 혈자리란 것을 알고 천지신명께서 허락하신 장소다 싶으니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그 덕분에 십년이란 시간을 아무 탈 없이 활동을 해온 듯 하여요.
이번 시산제도 처음 그마음 그대로 간절함을 담아 빌어 보렵니다. 답사때마다 아무 일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했듯이 올 한해도 무탈하게 자연을 공부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사 간절함을 담아 기원합니다.
시산제 당일 개인적으로 소원하시는 일 꼭 빌어 보시길... 따뜻한 밥상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총무 김 은희 올림*
1. 답사일 : 2019년 1월 13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출발
3. 답사지
1) 수원 사직단 시산제
천지신명이 허락하신 좋은 곳에서 예를 갖춰 정성으로 보답해 드리자구요.
2) 융릉(隆陵)
융릉은 사도세자(추존 장조莊祖)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조는 1735년(영조 11년)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년(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융릉은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부근(당시는 경기도 양주)의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가 후에 추존되어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융릉관련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정조실록 정조13년(1789년) 7월 11일 을미
영우원(永祐園)을 천장(遷葬)할 것을 결정하였다. 상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중략]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스러움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속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옛 장릉(長陵)에 혈도(穴道)까지 침범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고 보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수원(水原) 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吉地)라는 설이 예로부터 있어왔는데, 한 곳은 홍제동(弘濟洞)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寧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元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읍(水原邑)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대체로 그 형국으로 말하면 비록 범인의 안목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에 재혈(裁穴)하고 작은 언덕을 안대(案對)해서 좌향(坐向)을 놓으면 바로 이른바 구슬을 안대한다는 것이다. 구슬을 안대하려면 두 봉우리 사이 빈 곳으로 안(案)이 가는데, 이것이 또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向)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금(分金)도 이렇게 재혈하고 이렇게 좌향을 놓고 이렇게 안대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뜻은 이미 수원으로 결정하였다.
▶정조실록 정조13년(1789년) 7월 13일 정유
김익이 아뢰기를, "위로 주봉(主峯)에서부터 아래로 혈(穴) 자리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윗쪽에 있는 혈 자리의 약간 높은 곳에 앉아 국세와 청룡 백호를 둘러보니, 국세가 평탄하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청룡 백호가 에워싸지 않은 것이 아니나, 평탄하고 반듯한 속이 너무 넓고 크다는 느낌이 없지 않고, 에워싼 속 역시 견고하게 결속된 형세가 약간 모자랐으며, 안계(眼界) 역시 조밀하고 번잡한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평탄한 곳이라고 하는 곳에 앉아서 둘러보니 국세가 평온하고 청룡 백호가 긴밀하며 또 혈 좌우를 매미가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 듯한 형국이 있으며, 안계도 매우 조용했습니다. 시야 속에 작은 돈(墩)이 혈 자리와 직선으로 대치해 있는데, 이곳이 본래부터 칭송되어오는 서린 용[盤龍]의 형상이고, 이 돈을 서린 용이 희롱하는 구슬[弄珠]이라고 한 말이 신의 범안(凡眼)으로 보아도 정확한 논평인 것 같았습니다.
▶정조실록 정조13년(1789년) 9월 8일 신묘
혈(穴)의 깊이로써 말하자면, 금번에 얻게 된 진토(眞土)는 하늘이 준 것으로, 색깔로 보나 품질로 보나 곧 비할 데 없는 지극히 좋은 품질이다. 찬탄을 하고자 하더라도 형용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또한 그 뻗어온 산맥이 그다지 넓지 않은데도 혈처(穴處)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풍성하게 맺어졌다가 혈처를 지나면 다시 오무라지므로, 단지 부토(浮土)만 걷어내면 혈의 형체가 저절로 드러나니, 이는 달걀이 노른자위를 내포하고 있는 상(象)이다. 단지 진토의 테두리 중심에 나아가 혈을 꽂기만 하면 상하와 좌우를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무엇보다도 이 천심(淺深)을 마땅하게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록 7척(尺) 쯤으로 표준을 삼는 이미 정해진 규약이 있기는 하지만, 때에 임해 변화하여 요컨대 적중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에 7척까지 미처 파내지 않았는데 황색이 옅어지려는 기미가 있으면, 곧 파기를 중지해야 된다. 이는 대체로 누런 곳을 뚫고 지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적중하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얕게 해야 되지 깊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한삽 한삽 파들어갈 때마다 항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한치 한치 파들어가야 되니, 절대로 아무렇게나 방심하고 파지 말라. 또 혹시 색깔과 품질이 갈수록 짙어지고 딱딱해지며 갈수록 딱딱해지고 누렇게 되거든, 비록 7척을 넘게 파들어가더라도 무방한 것이다.
3) 건릉(健陵)
건릉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융릉(隆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효의왕후는 본관은 청풍(淸風).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증찬성 홍상언(洪商彦)의 딸이다. 1762년(영조 38년)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嘉禮)를 올렸고,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건릉 조성과 천장관련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순조실록 순조 즉위년(1800년) 7월 13일 계사
총호사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광은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 산릉당상(山陵堂上) 서유린(徐有隣)·김문순(金文淳), 예조판서 이만수(李晩秀), 관상감제조 윤행임(尹行恁) 등이 장계(狀啓)하기를, "신 등이 상지관(相地官) 김양직(金養直)·김응일(金應一)·최익(崔翼)·윤수구(尹守九)·정지선(丁志璿)·강필제(姜必濟) 등을 데리고 현륭원(顯隆園) 국내(局內) 강무당(講武堂)에 산릉(山陵)을 새로 점유할 곳으로 달려가서 주봉(主峯)에서부터 혈처(穴處)에 이르기까지 다시 상세히 간심(看審)하였습니다. 또 안산(案山)과 용호(龍虎) 등 여러 곳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여러 지사(地師)들이 모두 더없이 좋고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비록 신 등의 범안(凡眼)에도 또한 완전한 대길지(大吉地)임을 알 수 있었으므로 끝없는 경행(慶幸)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으며 다시 여러 지사들과 함께 쇠를 놓고서 혈(穴)을 찾아보니 모두들 해좌(亥坐)에 사향(巳向)이 정혈(正穴)이 된다고 했습니다. 신 등은 우선 산릉으로 정한다는 하교를 기다려 전례에 의거해서 봉표(封標)하겠습니다." 하였다.
▶순조실록 순조21년(1821년) 4월 21일 신축
건릉을 이장할 곳을 수원 옛날 향교 터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산릉을 살펴본 대신 이하 천릉 도감 당상을 여차에서 불러 보고 또, 상지관(相地官)인 사과(司果) 남양진(南陽進)·김경인(金景寅)·최상일(崔相一), 사용(司勇) 신희(申熙), 교수 방경국(方慶國)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상지관은 차례대로 주달하라."하니, 남양진이 말하기를,
"교하(交河)의 장릉(長陵) 재실(齋室) 뒤는 내려오는 산맥이 길고 멀며 곱고 아름다우며, 자리[穴處]가 안온(安穩)하고 명당(明堂)으로 넓고, 평평하니, 이는 지리서(地理書) 가운데 귀격(貴格)으로 치는 것입니다. 수원의 옛날 향교 터는 산맥의 형세가 웅장하고 존엄한 가운데 또 아름답고 곱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장풍향양(藏風向陽)하여 혈성(穴星)이 십분 뚜렷하며 수구(水口)가 막히고 조회하는 산과 안산(案山)이 모여들었는데 수풀 사이에 아름다운 기운이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최상의 길지입니다. 이 두 곳을 가지고 논하면 수원이 교하보다 더 낫습니다." 하고, 김경인·최상일·신희 등의 아뢴 바도 같았다. 판부사(判府事) 한용귀가 말하기를,
"신 등이 이번에 교하의 장릉 재실 뒤와 수원의 옛날 향교 터를 모두 살펴보았는데, 산세의 웅장함과 혈성의 풍후함과 좌우 산맥의 모여듬과 안산의 수려함은 두 곳이 똑같은데 매우 좋은 땅인 듯합니다. 또 상지관의 말을 듣건대, 역시 똑같이 찬미하면서 ‘만약 수원을 교하에 비교하면 매우 귀하고 매우 길한 품격은 매우 차등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만 년의 무궁한 터를 원침(園寢)의 가까운 안에서 얻었으니 지난해에 선침(先寢)을 가까이 하시려는 성상의 뜻에 진실로 부합된 것으로서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중략]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옳다. 더군다나 상지관이 모두 대단히 길하여 교하보다 낫다고 하니, 다시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옛날 향교 터로 결정하겠다." 하였다.
4) 용주사(경기 화성시 송산동 188)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5) 이고(李皐)선생 묘(경기 수원시 하광교동 산51-1)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망천(忘川).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사람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집의에 오르고, 한림학사·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뒤에 사직하고 수원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즐기는 바가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자신이 사는 산천을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중에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삼사좌승(三司左丞)·경기우도안렴사(京畿右道按廉使)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에게 그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곳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석비를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대개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8명의 학사를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그는 그 중 조견(趙狷)·이집(李集)과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소를 타고 내왕하였다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 심온(沈溫) 선생 묘(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13-1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할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심용(沈龍)이고, 아버지는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이다. 세종의 장인이다. 1418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동생 심정(沈泟)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김 종대 (010 - 4234 - 7074) 실장 하 태현 (010 - 9239 - 2139)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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