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아리랑은 한 민족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민족의 노래로 언제 어디서나 불려지고 특히 재외 동포나 해외여행 중 또는 국제적인 경기가 있을 때는 더욱 많이 부르며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는 묘약과도 같은 것이다.
아리랑은 언제 누가 어떻게 지어서 부르게 되었는 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정선아리랑의 경우
강원도 정선군 낙동리에 가면 居七賢洞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고려말 개성부근에 있던 조선개국을 반대하며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충신들이 집단으로 은거생활을 하던 두문동의 72인 중 7명이 와서 살던 곳으로, 거칠현동 공원에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비석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아리랑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래 아리랑은 바람둥이 들이 술 한 잔 하고 풍류와 농탕을 즐기면서 부르던 퇴폐적인 노래였으나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라는 영화가 나온 후부터 보다 체계적이고 온 국민이 함께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으면 바로 '본조 아리랑의' 시작이라고 한다.
실제로 아리랑은 지역성이 가시화 됐으며 세태와 풍속을 잘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나라를 잃고 일본, 중국, 구쏘련 등지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의 응어리진 가슴을 달래주는 노래로 제국 식민지 체제 속에서 더 많이 불려졌고, 민족적 저항을 고취하는 민족의 노래로 재창조 되고, 계몽가요로 활용하였다.
아리랑!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일 뿐 아니라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의 노래요, 혁명의 노래며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노래다.
아리랑은 지금도 살아있다. 현대사에 있어서 무수한 잠재적 노래며 바닥으로부터 분출하는 공동체의 대변이다. 뜨거운 사랑이 비단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후렴구가 발달했으며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이라랑, 광복군아리랑 등 지방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율격은 3음보 2줄 형식으로 우리의 정서에 잘 맞는다.
그 성격은 농민의 고통을 광범하게 포괄하는 서정적인 효과를 드러내고 대조적 사실을 단순화, 객관화 시켜 강렬하게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풍자적 현실을 고발한다.
이번에 아리랑의 본 고장인 강원도 정선의 정선아리랑을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느끼며 아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정선 사람들은 아리랑을 '아라리'라고 하며 노래하는 것을 '소리'라고 표현한다.
정선아라리는 바로 소리 자체가 그들의 삶이요, 한이요, 정이다. 아픔도, 원망도, 갈등도, 사랑과 미움도 다 소리로 표출한다. 그래서 한가지 곡조에 가사가 수천 가지로 변화발전하게 되었고,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는 산골 농민들의 삶을 그대로 노래하였고
'저산의 꽤꼴이는 없는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의 저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뚫는다'. 는 해악성이 뛰어나다.
여량리의 아리랑 전수관에서 몇 안남은 아리랑 기능부유자인 '김남기' 씨의 강원도 사투리가 심해서 설명은 알아 듣기가 어려웠지만 소리는 참으로 애닲은 것이 가슴을 울리는 듯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옥산장의 '전옥매' 할머니가 부르는 정선 아리랑과 그의 애닲은 삶의 이야기를 '돌과 이야기'로 엮어가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선읍내 물래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에 낭군님은 날 안고 돌줄 몰라'라고 해학적으로 노래하면 '당신이 날 생각을 나만치만 한다면 가시밭길 수천리라도 신발 벗고 오리라'고 남편이 받이 친다. 재미있고 즐거운 한 때였다.
진용선 정선아리랑 연구소장은 "아리랑은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끝내 눈물을 닦아주는 노래"라고 했다.
아우라지의 순박한 아가씨와 아라리 뱃길로 떠난 임이 돌아오지 않아서 애타게 기다리던 전설과 아가씨 동상은 한 민족의 정서를 느끼게 하였으며 아우라지에서 뗏목을 타고 한양까지 목재를 운반하여 많은 돈을 받아서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한양 기생 치마폭에서 다 탕진하였다는 이야기에는 역시 시대를 초월안 풍운아들의 호탕한 삶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이라랑은 2002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선정위원회에서 82%의 절대적인 지지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선정되었으며, 2002년 월드컵 응원가로 기쁨과 환희를 표출하였고, 무엇보다 2012년 12월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제 아리랑은 단순한 우리의 노래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노래요 역사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민족정신의 산유물인 아리랑을 잘 보존하고 부르며 민족정신을 계승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정선아리랑의 대학시절부터 20년간을 수없이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듣고 느끼며 녹취를 하여 아주 귀한 자료를 가지게 되었고 상세하게 사례를 들어 설명을 해 주신 성균관대학교 정우택 교수의 노고에 감사와 고개를 숙일 뿐이다. 특히 최복기 할머니의 온갖 행상을 안 해본 것이 없으며 돈벌려고 광산으로 한 남정네를 따라갔다가 남편으로 같이 살게 되었고 남편도 자식도 잃고 혼자서 한많응 한 평생을 소리로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는 애닲은 삶의 이야기와 왜 소리를 하느냐?는 질문에 '허고퍼서' 한다던 한마디는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날 처음으로 정선장에 갔더니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곤드래 나물을 한봉지 사고 4명의 일행들과 함께 먹은 메밀전과 수수부꾸미에 막걸리 한잔은 재래시장의 정취를 만끽하게에 충분하였다.
'小錦剛'은 비록 규모는 작고 보이는 곳은 잠깐이지만 높이 솟은 절벽과 귀암괴석은 계곡에 흐르는 물과의 절묘한 조화로 잠시 마음을 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沒雲臺'는 구름도 쉬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소금강을 지나서 야트막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천인단애의 절벽위에 울창한 소나무와 천년을 지켜온 고사목 한 그루가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시인 황동규님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이 다른 사람들 몰래 와서 놀다가는 곳으로 구름도 쉬어 간다고 몰운대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畵巖藥水에는 마침 주말이라 가족들끼리의 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계곡의 맑고 시원한 물에 잠시 발을 담그니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는 듯, 시원한 바람과 폐부를 찌르는 맑은 공기가 심신을 달래준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아리랑에 대한 새로운 식견을 가지게 되었으며 보고 듣고 느낀 정선 여행의 주제인 아리랑! 세상에 울려퍼지다!의 여행을 마무리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