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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 ‘사람을 위한 관광’과 관련하여 -
2018. 5. 24.
지속가능한 한반도 관광교류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
원정식(강원대 역사교육과)
1. 인문학적 패러다임 전환기와 관광 1
2. 관광의 개념과 역사적 이해 4
3. 남북관광의 인문학적 비전 7
4. 제언 10
1. 인문학적 패러다임의 전환기와 관광
실용학문을 하는 학자나 사업가, 행정가, 경영자들 가운데 인문학을 우원한 학문이고 인문학자를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사람으로 여기다가 세월이 흘러 한계에 도달하거나 은퇴할 때쯤 되어 인문학적 영역에서 여생을 바치는 사례를 종종 목도한다. 이러한 현상은 각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업화 초기 단계의 사회에서는 산업화를 진척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문 지식 확보나 전문 인력 양성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실용학문과 인문학을 분리하고 수없이 많은 분과를 세분하여 연구나 인력 양성에 매진함으로써 단기 효용성의 극대화를 추구하였다. 이에 성과를 수량화하여 평가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고 그 수량화의 최정상에 화폐 수치로 대응하는 자본이 놓이게 되었다. 산업화 시대에 자본의 지배가 확정되고 자본가의 시대가 된 것은 이러한 과정에 정착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산업화 사회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이 정점이었음). 그러나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나 효용성을 추구하는 것이나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점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본 중심의 사회 체제는 재검토를 요구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재검토를 담당하는 학문이 인문학이고 담당자가 인문학자다. 인문학의 본질이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인간 행위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인문학의 위기니 인문학의 르네상스니 하는 것은 모두 자본이나 권력과의 길항이란 역사 과정의 산물이다.
21세기 현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환기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호모사피엔스가 이 땅을 지배하는 최고의 종으로 발전하고 지구를 지배하기까지 몇 차례의 전환기를 거쳤지만 오늘날처럼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한 시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생명 탄생 이래 현재까지 90% 이상의 종이 멸종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우주의 탄생과 무한 팽창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인류 스스로가 자신들의 멸종을 예측하는 종으로 진화하였으며, 유기체의 생성과 변이에 간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인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자연지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자연 신체에 기계를 부착함으로써 신체 역량의 극대화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러한 개발과 발전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4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이런 기술적 혁신은 거대하고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위험을 낳을 수도 있다. 이를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과학이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해야 할 가장 적당한 시기다. 이와 비교하면 각국의 정부나 시민들이 걱정하는 여타의 문제는 아주 사소하다. 물론 글로벌 경제위기, 테러단체 ‘이슬람국가 is’, 남중국해의 긴장 등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 중요성은 ‘인간강화 human enhancement’라는 문제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라고 하였다. 그가 지적하는 기술적 혁신은 나노공학, 유전공학, 뇌-기계 인터페이스, IT와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광범하게 운위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영역은 인공지능(A.I.)이다. 이것은 2016년 3월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AlphaGo) 리’의 등장으로 우리에게도 다가왔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인간의 기보(棋譜) 없이 스스로 학습하여 알파고 리를 100:1로 이긴 ‘알파고 제로’가 2017년 4월 등장하고, 다시 8개월 후 스스로 학습하여 4시간 만에 체스의 최고가 되고 2시간 만에 쇼기(일본장기)의 최고가 되고 하루 만에 바둑의 최고가 된 범용 인공지능인 ‘알파제로(Alpha Zero)’가 등장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기능과 학습능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달하고 있으므로,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을 부정하기 어려운 단계에 도달했다.
인간은 각종 웨어러블 기기나 로봇의 장착을 넘어서, 컴퓨터와 인간의 육체를 합성한 사이보그(합성인간 또는 인조인간)나 스스로 학습하고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의 등장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인간의 본질과 인류의 운명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 스티븐 호킹, 일론 머스크, 유발 하라리 등이 인공지능에 의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염려하는 것도 그 하나다. 지금 인문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과 인공지능은 상호 어떤 위상을 가질 것인가, 인간과 사이보그와 인공지능 로봇은 상호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우리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등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기초적인 질문이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 당장 인공지능이나 신기술이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류역사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바와 같이 시간적으로, 인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우리를 재편할 것이다. 예컨대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또 오래 사는 것이 불행인 사람과 행복인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또 인간이 신의 영역에 한 발짝 더 접근한 시대가 되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다. 거대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가진 자는 ‘전지전능’과 ‘영생불사’의 가능성이 커졌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빈부의 차이가 더욱 커지고 소수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정보, 경제력, 수명, 능력 등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극소수의 인사나 집단이 압도적 다수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은 돈에 종속되고 기술에 종속되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확립할 필요를 웅변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근대 산업사회가 되고 대중사회가 되면서, 그리고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우리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였던 역사가 지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관광 역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광학도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산업화 위주의 관광, 정책에 기대는 관광, 자본에 종속된 관광은 지속가능하지 않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최근에는 관광학에서도 인문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예컨대 이웅규는
젊은이들의 건강한 신체단련과 정신적 역량 고취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했던 과거 여행의 역사적 사실을 분석하지 않아도, 식민지 지배 하에서부터 해방 후 민주화운동 과정을 거쳐 최근 외래 관광객 1,000만 명 입국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여행의 기능적 관점의 본질 추구 노력은 관광학자들의 책임이었다. 이제 인문학의 관점에서 여행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여행을 통한 관광학의 학문적 발전이 역사적 자산이 되어 권력과 학문세계에서 동시에 활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최근의 관광학이 본래 자본주의와 근대화에 기반을 두고 인식영역을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 경제 활성화와 지역 경제 활성화, 심지어는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관점에 의해 이식된 한국의 관광학은 태생적인 핸디캡(handicap)을 갖고 있다.
라고 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관광이 산업이고 외화벌 수단에 불과했던 태생적 한계가 3만 불 시대가 되어서도 학계와 업계 종사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국가경제와 지역경제 그리고 직업을 창출하는 만능키라고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광은 일정기간 일상의 공간과 일에서 벗어나 휴식하고 즐기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힐링하며, 타자와 교류하고 소통하며, 안목을 키우고 정보를 획득하는 등의 활동이고,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람다운 삶과 정서적 풍요로움을 구현하는 대표적인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기왕의 관광에 대한 반발이 공정여행이나 생태관광과 같은 새로운 형식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2. 관광의 개념과 역사적 이해
관광의 개념은 관광행동에 중점을 둔 것, 경제학적 측면에 관점을 둔 것, 지역주민과 관광객간의 상호작용과 교류에 중점을 둔 것, 경제학에 두면서도 ‘비정주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관광자의 자격에 중점을 둔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한국, 타이완, 일본에서는 ‘觀光’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중국(대륙)에서는 ‘旅遊’하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영어로는 ‘tourism’, 독일어로는 ‘Fremdenverkehr’이라고 한다. 이러한 용어의 차이나 강조점의 차이는 ‘가장 세계화된 한반도’에서 남북관광을 매개로 관광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새로운 실천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관광’이란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관광’이라는 말의 어원은 주나라 때의 『역경』에 나오는 “관국지광이용빈우왕(觀國之光利用賓于王)”이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한 나라의 사절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여 왕을 알현하고 자기 나라의 훌륭한 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 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관찰함이 왕의 빈객으로 대접받기에 적합하다는 일종의 의전적(儀典的)인 개념이다. 여기에서의 관(觀)은 ‘본다’는 뜻이면서 ‘보인다’는 의미도 있으며, 광(光)은 ‘훌륭한것’·‘아름다운 것’·‘자랑스러움’을 뜻하는 것이다. 영어의 ‘투어리즘(tourism)’이란 ‘tour’와 ‘travel’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라틴어 ‘tornus’(돌다, 순회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통상 즐거움을 위한 단기간의 여행을 뜻하고 있다. 독일어의 ‘프렘덴페르케르(Fremdenverkehr)’라는 용어는 ‘외국의’ 또는 ‘외국인’의 뜻을 가진 ‘Fremden’과 ‘내왕’ 및 ‘교통’이라는 의미를 가진 ‘Verkehr’의 합성어로서 외래자가 내왕함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한자의 ‘觀光’은 관광이라는 행동의 목적과 대상, 영어의 ‘tourism’은 행동의 목적과 기간, 독일어의 ‘Fremdenverkehr’는 행동의 주체와 상태를 각각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觀光의 어원으로 든 <<周易>> 20번째 ‘觀卦’(風地觀卦☴☷)의 六四에 대한 설명에 나오는 “육사는 나라의 성대한 모습을 보는 것이니 임금에게 빈개 노릇 하는 것이 유리하다(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는 구절을 보자. 여기서 두 가지 측면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 첫째, “國之光”이다. 1973년 발굴된 장사 마왕퇴의 帛書周易에서는 “육사는 나라의 빛나는 앞길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왕에게 정보를 전달하면 왕이 다른 나라와 연맹을 맺는 데 유리하다.”라고 하여 의미가 같지 않다. 한 마디로 “國之光”의 원래 의미는 “나라의 빛나는 앞길”이었는데 후에 “나라의 성대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관광’이란 용어는 후자를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觀’의 의미다. ‘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①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하고 상세히 살펴서 사물과 사태의 깊은 곳, 가장 본질적인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관’을 <<설문해자>>에서는 “상세히 보는 것이다(觀, 諦觀也)”라고 하여, 매우 자세하게 살펴보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청대의 고증학자 단옥재(段玉裁)는 <<설문해자주>>에서 “곡량전에서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보는 것을 視라 하고, 특별하게 보는 것을 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빌헬름의 영역본에서는 ‘관’을 ‘contemplation’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응시(凝視)하고 주시(注視)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② 보여준다(顯示)의 뜻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송대의 학자 程伊川은 “임금이 위로 천도를 보고 아래로 백성의 풍속을 보면 보는 것이 되고,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면 보여주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우리가 사용하는 관광이란 의미와 주역의 용례와는 일치하는 않는다.
영어의 ‘투어리즘(tourism)’이나 독일어의 ‘프렘덴페르케르(Fremdenverkehr)’ 등 유럽의 용례는 여행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뒀다는 점에 유용하며, 중국에서도 ‘타 지역을 일시적으로 여행하고 유람하는 활동’이란 의미의 ‘旅遊’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여행객에게 휴식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을 旅遊業이라고 하여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라는 관광의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어느 용어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觀光’이란 내용을 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이름이 내용을 규제하는 것을 볼 때 앞으로 어떠한 용어가 21세기 ‘관광’을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관광’이란 용어에는 수많은 내용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땅에 등장하면서 먹고, 입고,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걷고, 달리는 등 일체의 행위가 생존 문제에 최우선적으로 투입되었지만 이때도 인간은 일상 속에서 오락을 통하여 긴장을 완화시키고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생명체로서 인간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려는 욕구를 가진 존재였고, 이것이 인류를 오늘의 인간이 되고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에는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인, 황제, 관리 등 소수에 불과했고 그 이동 역시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 출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출장 중에도 짬을 내서 ‘구경’을 하고 즐기는 것처럼 당시에도 소수만이 여행하고 관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놀고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진 적이 없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특히 고대에는 대다수 인민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그리스의 자유인들도 안전, 경제력, 기술, 정보 부족 등으로 인하여 원하는 바를 구현하기 어려웠다. 중세에도 고대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종교의 시대였으므로 종교순례가 중요한 여행과 관광의 계기가 되었다. 고대에도 종교여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법여행으로 승려들이 중심이었고 일반 신도들의 의무는 아니었다. 중세에는 특히 이슬람 지역에서 ‘성지순례’가 의무화되면서 타 종교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동아시아에서도 일반대중의 성지순례 형태의 여행이 나타났으며,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명산대천의 ‘遊覽’이 유행하였다.
17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귀족 등 상류층 청년들이 신체 단련과 경험 증대를 위한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산업화가 확산되고 심화되면서 중류층과 중하류층이 단체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매스 투어리즘(Mass Tourism : 대중관광)이 등장하여 20세기 중엽이후 성행하였다. 산업혁명과 근대국가의 등장으로 여행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이 확보되고 여행비용 축적이 가능해졌으며 여행사가 등장하고 치안이 강화되었으며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었다. 산업으로 관광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자본이 투입되고 관광/여행 콘텐츠가 급증하면서 관련 사업이 연쇄적으로 신설되었다. 자본이 관광을 산업화하고 지배하면서 관광의 성격 역시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보다 이익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이후 유럽 각국은 폐허가 된 경제회복을 위하여 관광객 유치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국가가 관광 사업에 적극 간여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1919년 이탈리아는 세계 최초로 관광국을 설립하였고, 1920년 독일에서는 관광선전국을 설립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관광은 인간을 위한 지향 보다는 산업으로 교육되고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사업가는 돈벌이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일반 사업과 다름없이 운영하게 되었다. 다만 관광 소비를 부추기는 모든 선전광고와 교육이 관광의 대중화를 촉진시키고 ‘관광권’이 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관광과 여행은 권리로서 헌법과 법률, 세계인권선언(1948.12.10.)과 각종 세계 관광 관련 선언에서 규정하고 있으며, 경제력과 기술력의 발전에 따라 대중들에게까지 참여 기회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인류의 대부분이 생존을 위한 노동에 모든 시간을 쏟으면서 관광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관광의 역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대중관광이 보편화되고 2006년 현재 8천여 만, 2016년 현재 12억의 여행객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로 보아도 관광 참여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 관광 주체가 다양해지고 요구하는 내용 역시 다양해질 뿐만 아니라 관광 자원 역시 과거에 포함되지 않던 인간이나 사회문화에서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되었다. 이에 관광 인프라 이외에도 인문학적 가치 영역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3. 남북관광의 인문학적 비전
관견인 한 이제까지 남북관광을 보는 시각은 정치적 측면, 경제적 측면, 사회문화적 측면에 치중하였고 인문학적 측면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남북관광은, 정치적으로는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긴장 완화 및 평화체제 구축 기반 조성 등에 기여하고, 직접적으로 북한의 경제난 완화 및 침체된 남한의 관광산업에 돌파구를 제공하며, 남북한 주민의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라고 하거나, ‘남북관광 교류협력은, 정치적 측면에서 남북경협사업이면서 동시에 정부의 통일정책 수단으로 볼 수 있고, 남과 북 양측에 경제적 효과를 미쳤으며, 사회문화적 효과로서 남북 간의 정서적 교류를 가져왔다.’고 한 것이 그 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관광은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관광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1년 이내의 비교적 제한된 기간 동안 공간과 사람과 일상을 변경시킴으로써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휴식을 얻고 흥미를 충족시키고 경험을 획득하며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가는 것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한 개인의 기본권을 실현시키는 구체적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주민들의 이러한 기본권이 수십 년 동안 억압된 상태로 지내왔다는 것은 이곳의 주민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남북관광의 온전한 시작은 이 비극을 종결시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며, 동시에 남북 주민들이 기본권의 행사, 인간적 삶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의도 가진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국가 사람들과 비교할 때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일제 강점에 따른 비극이 1945년 분단으로 다시 한반도 남과 북의 모든 주민들에게 증폭되었고 나아가 세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21세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은 한반도를 넘어 지구화된 시대의 세계의 비극이다. 세계를 불안하게 만든 한국전쟁이나 핵전쟁의 위협도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세계열강들의 각축 속에 한반도에서는 전쟁이란 비인간화의 극단을 겪었고, 강고해진 분단 체제 하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민중들은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기 어려웠다. 한반도에서는 천만의 이산가족이 만나지 못하고 자유로운 왕래가 금지된 비인도적이고 비인간화된 늪에서 70년 이상 지냈고 인간다운 삶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기 어려웠다. 아니 한반도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오랜 세월동안 자유를 억압당하고 두려움 속에 지내야했고 이런 상태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한반도에서는 세계인권선언 발표나 대한민국헌법 제정 이후에도 오랫동안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누리기 어려웠다. 남한에서도 자유로운 여행이나 행복감을 얻고자 하는 관광 활동이 해제된 것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며, 북한의 주민들은 그마저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 시계는 여전히 내부갈등과 세계열강의 이권싸움에 묶여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인류 모두가 희망하는 삶의 질 향상 역시 느리게 진행되었다. 남북관광은 한반도 주민의 기본적 인권, 관광권을 실현하는 것이 핵심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분단 70여년 중에서 중요한 남북공동성명을 7회 발표하였다. 7.4남북공동성명(1972), 6.23 평화통일선언(1973), 남북기본합의서(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 한반도 비핵화 선언(1992), 6.15남북공동선언(2000), 10.4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2007), 판문점 선언(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2018)이 그것이다. 이것을 시기적으로 볼 때 데탕트 시기 2회, 소련해체시기 2회, 그리고 3회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시기이다. 앞의 4회는 국제관계의 격변에 대응한 것으로 수동적인 측면이 있다면, 뒤의 3회는 우리 정부가 중심이 되어 이뤄낸 성과다. 반면에 합의의 이행 중단기를 보면 70년대 박정희 정권과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시기이다. 또 열강(특히 미국)의 정권교체 및 이해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아 중지된 측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의 이행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향후 한반도 안정과 평화체제 구축, 남북교류와 남북관광의 활성화, 그리고 남북한 주민들의 기본권 향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교류와 남북관광의 활성화와 관련하여 국제정치학적 관점이나 전망은 필자의 영역 밖이고, 많은 전문가가 논할 문제다. 다만 국제 역학이나 세계 자본의 움직임이 과거처럼 소수 대국의 일방적 힘에 종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즉 중국의 성장이 미국 패권을 상대화하고 있는 점, 정보와 자본이 세계화되고 동조화되었다는 점, 남북한 모두 기왕의 분단체제라는 현상 유지가 어렵다는 것으로 볼 때, 인간의 요구와 자율성이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화에 따라 소셜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수십억이 정보를 제공하고 공유하게 되면서 과거의 소수 독점체제가 상대화되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환경 변화가 개인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참여하면서 집단지성을 만들어내고, 이 집단지성이 다시 개인과 사회와 국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 암울한 미래를 다소라도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북관광은 우리가 개척해야 할 대표적인 남북교류사업으로 꼽힌다. 1998년~2008년까지 10년간의 남북관광의 경험을 가졌지만 2008년부터 현재까지 10년간 중단되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나 실무자들이 “남북관광산업은 남북 양측 모두에게 단순히 관광산업의 발전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군사, 행정, 외교, 환경, 가치관 등 모든 부분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지대하다.”“남북관광의 활성화는 통일, 문화적 이질성 해소, 지역 개발, 관광사업의 촉진, 외화획득, 교류 확대 등 남한은 물론 북한에게도 상당한 경제적 이득과 함께 사회문화적 교류 통합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그 의의를 제시였고, 필자 역시 대부분 공감한다. 또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관광의 재개 역시 기대가 크다는 것도 현재의 분위기다. 하지만 기왕의 연구나 제안을 살펴보건대, 현재의 남북관광 인식과 방법은 10년 전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으며 남북관광 중단의 원인 역시 정치에 종속되어 있는 한 늘 불안정하다는 종속성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관견인 한 지난 10년간 어떻게 중단된 남북관광을 재개하고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하여 새로운 방법이나 이념을 발굴하고 대안을 준비하는 주동적인 노력을 찾기 어렵다. 비록 남북관계는 정치역학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정치적 고려를 피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10년의 실행과 10년의 중지를 경험한 우리들이라면 새로운 돌파와 도약을 위한 주동적인 준비가 필요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년간 관광개발에 대한 북한의 노력이나 전지구적 연결망이 강화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남북관광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확산 정도나 관광 인프라 개선 속도가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 있는 변화가 진척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변화가 세계적 정치, 사회, 문화적 변화 속에 남북관계의 변화로 이어지고, 남북관광도 새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남북관광의 초점은 북한관광에 있다. 북한사람이 남한관광을 해야 비로소 남북관광이란 말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남북관광 활성화를 위해 교차관광 상품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 선진화한 관광 상품을, 북한은 ‘지구상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 같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식이다. 정란수 교수는 “중장기적으로는 북측에서도 파주나 설악산으로 넘어오는 상호관광이 필요하고, 지금은 이를 검토할 계기”라고 했다. 또 김상태 위원은 “북한의 자연관광과 남한의 4차산업 기술이 결합해 우리나라 전체 자원수준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구상도 필요하다”며 “또 남북의 지역을 동시에 여행하는 상품이 개발된다면 이는 중국과 일본에도 상당한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지속가능한 관광이 되기 위해서는 관광자원의 지속성이나 관광지의 생태계 유지에 그칠 것이 아니라 21세기 세계의 변화 위에 민간사회나 기업의 국제적 연계를 활용하고 관광에 대한 개념과 의식을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제언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관광도 자본의 노예가 아니면 권력의 노예였다. 모든 학문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위한 사람의 학문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이고, 관광학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관광학은 관광 분야에서 사람을 노예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성찰하고 대항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며, 그러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관광도 가능할 것이다.
관광이 사람을 위한 관광으로 정립되면, 관광의 기획, 조직, 운영에서부터 관광 시설 건설이나 서비스 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도 사람의 행복과 사람다움이 구현될 수 있도록 재편될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에 돌입한 지금 사람의 사람다움이 더욱 요구되듯이, 자본의 지배로 관광이 물질화되고 비인간화되어 온 것에 대하여 반성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실천이 관광 산업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남북관광 역시 마찬가지다. 남북관광은 정치적 예속과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남북한 주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에서 남북한 주민이 행복해지는 관광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세계인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관광도 출현할 수 있다. 남북한의 주민이 배제된 남북관광은 지난 10년과 같은 중단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광의 물질화와 비인간화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관광은 주체, 내용, 방법 등 모든 면에서, 그리고 연관 산업 측면에서도 광대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무한에 가까운 관광의 욕구가 극대화된다면 관광 산업의 가능성 역시 무한히 확대될 수 있고, 그 영향이 연관 산업으로 확대된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부가가치와 사회적 영향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현재의 자본 운영에는 도전이 될 것이지만 동시에 중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긍정적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관광’이란 용어가 현실적인 내용을 포함하여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은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담을 수 있도록 새로운 용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관광 내용 전반을 재검토하고 보완함으로써 남북관광을 비롯한 한국의 관광을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