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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성경말씀을 공부하실 분을 위해
정리된 <기쁜소식> 지 원고를 첨부 파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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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 묵주기도 성월에...
묵주의 기도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산 내음 나는 향나무 묵주 하나의 지극한 보배로움이여...
평일에도 묵주를 쥐고 당신 앞에 오면 난처럼 향기로운 마음이여...
흩어졌던 생각이 한자리에 모이면 외출했던 사색도 돌아와 앉아
나의 기도는 둥글게 장미를 피움이여...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를
소박한 마음으로 외울 때마다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환희를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고뇌를
그리고 부활의 예수를 얻은 마리아의 승리를 함께 함이여...
성체등 깜박이는 성당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방 안에서
산책을 하는 길가에서
묵주를 든 손은 언제나 겸허하고 따뜻한 믿는 이의 손
예수와 마리아가 결합하듯 나도 그들과 하나되는 은총이여...
가까운 이웃과 함께 모르는 이웃과도 하나되고
산 이들과 함께 죽은 이도 하나되는 신비여...
베틀레헴의 길을, 갈바리아의 길을, 엠마오의 길을
마리아와 함께 앉아서도 걸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나의 기도, 우리의 기도.
오늘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는 단단한 묵주 하나의 빛나는 보배로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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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10월의 주일하늘 속에서...
글 : 윤 클레멘트(양호) 신부님
아침 7시 반에 숙소를 나선다. 방문의 일들로 10월의 주일하루를 활동하려고...
8시 반에는 천호의 토머스쉼터에서 주일 미사를 드렸다.
그곳의 작은 공동체에는 피정과 쉼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돕는 말씀 가족들이 산다.
미사를 드리고 나서 작은 강의를 하고, 공동체가족의 고백성사를 들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지만,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점심을 조금 먼저 들었다.
막 텃밭에서 뜯어온 상치 쌈이 가을의 맛과 함께 풍성하다.
완주군 비봉면의 천호성지에서 큰길가로 나오는 길에는 철이 지나가는 코스모스들이 가을색시인 듯 수줍게 손 흔들고 있었다.
큰길가로 나서기 전에 길옆 삼우초등학교에 들어가 밀려오는 잠을 위해 잠시 쉬었다.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소양 근처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미사를 드리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힘들어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용기를 내라고 위로를 드리고 작은 기도들로 함께 했다.
다른 곳의 병원을 더 방문할까 하다가 몸의 한계를 느끼면서 오늘 방문의 일정을 맺기로 했다.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 조금 쉬었다가 몸의 조건들을 보고나서 저녁에는 익산의 글라라 수녀원으로 옮겨갈까 한다.
그곳에 가면 기도를 조금 드릴 수 있고, 나의 작은 쉼터(방)가 있다.
살아가는 길에서 지치면 찾아가는...
작은 방문들로 길을 달리는 10월의 가을 길에는 코스모스, 가을 풀꽃, 냇가의 억새풀이 춤추고 있었다.
10월의 하늘은 푸른 바다 속처럼 맑고 청초했고, 10월에 부는 가을바람은 지나가고 저물어가는 가을의 정경을 가만히 건네주고 있었다.
가을 내내 익어온 감나무의 감도 떨어지는 감나무 잎 새 너머에서 빨갛고 노란 가을꽃들처럼 달려 있었다.
세상은 그치지 않는 사건과 일들로 어려움 속에서 흔들리고, 우리네 인간 마음들은 방황하듯 휘청거리는데...
아~ 아~ 10월의 하늘이 푸르고 곱다.
10월의 산하가 온통 열매와 수확이다.
10월의 땅 가득히 풍요로움이다.
결실의 계절에도 여전히 낮과 밤은 거듭해서 오가고 바람과 이슬은 그치지 않고 불고 내리는데...
문득 문득 하늘을 보고 땅을 헤아리며 우리 사람들과 나 자신의 어둠과 그늘, 아픔을 바라다본다.
하늘과 땅은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를 계속해가고, 바람과 이슬은 나무와 곡식들이 익어가고 영그는 날들을 밤들을 세우며 지켜주는데...
이 가을속의 10월의 주일하루, 10월의 나무와 곡식이 열매 열리고, 10월의 나뭇잎새가 불타는 10월의 바람 속에서의 주일하루를 작은 활동과 가을날의 아픔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화려한 미사나 강의도 없었어도, 나의 작은 10월의 주일 하루는 그렇게 하루해가 져가고 있었다...
삶은 사는 것, 사랑은 이루어 가고, 봉헌은 드리어 가며, 인생은 점차로 되어가는 것이니...
오 하느님, 지극히 작은 우리 인간의 몸, 우리 작은 인생들 드리옵고 바치오니,
받으소서, 받으옵소서.
이 아름다운 10월의 가을날에...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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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 / 군일주일
2015. 10. 4
마르코 10, 2 ~ 16
♠ 복음 연구 (복음 주제 발표)
* 이혼에 관한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으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계명인 성서말씀(창세기 1,27;2,24) 에 근거로 당시 통용되는 이혼 관습을 비판하신다. 나아가 결혼의 의의를 새롭게 풀이하고 재확인시켜 원칙적인 가르침을 제시하신다. 10~12절은 제자만을 대상으로 행해진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부부간의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결혼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펼치신다. 예수께서는 당시 통용되는 이혼관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계시지만, 둘은 한 몸이 될 것(8절)이라는 말씀으로써 결혼의 신비에 더 많은 역점을 두셨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재확인 시켜 주신 것이다.
(참고사항 : 가능하다면 한 사람이 발표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준비해서 각자 조금씩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복음 요약 : ( *한 사람이 한 단락 씩 읽어봅시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혼인법과 이혼법을 살펴보면 쿰란 종파만 일부일처제를 가리치고,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일부일처제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신명 42/1-4 에 따라 이혼과 재혼을 쉽게 인정했다. 물론 여기 이혼이란 언제나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여 내 보내는 것을 뜻하는 데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 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바리사이들의 이혼 관례에 대해 예수께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시어 이혼 불가를 선언하셨다. “누구든지 제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그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계명 중 제6계 ‘간음하지 말라’는 금령과 관련하여 이혼을 단죄하셨다. 어째서 이혼이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잘못인가? 당시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홀로 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고 아무래도 재혼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이혼을 단죄하는 말씀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다.
① 유대교인들이 모세의 이혼법을 내세 워 소박을 정당화하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을 내세워 예수님의 말씀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들이 마르 10/2-9의 논쟁을 꾸몄다.
②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혼 자체를 단죄하기보다는 이혼한 다음 재혼을 금하셨다고 보았다.
③ 마태오 복음작가가 소속한 교회 신도들은 신명 24/1의 ‘수치스러운 일’을 ‘음란한 일’로 국한시켰다. 곧 남편이 아내의 음행을 발견하는 경우에만 그를 내보내고 재혼할 수 있다고 보았다.
④ 70년경 마르코 복음서를 집필할 무렵 이방계 신도들은 남편이 아내를 내보낸 다음 재혼하면 간음하는 것처럼 ‘또한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말은 여자에게도 이혼하고 재혼 할 권리를 인정한 로마와 그리스 사회에서나 할 수 있었다.
⑤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일대 회개를 부르짖으신 예언자적 외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유로 아내를 버릴 수 있을까’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둘이 한 몸이 되는 비결을 익힐 수 있을까‘ 궁리하라는 외침이시다.
♠ 대화 방향 : 그 당시 중근동지방에서 여자가 이혼을 당해서 ‘가족을 떠나 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는 여자들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그 당시 약자와 더불어서 과부들을 하느님을 믿는 민족이기에 보호했다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혼인성사를 통해 부부가 되었다
① 나에게 있어서 배우자는 어떤 존재인가?
② 배우자에게 줄 수 있는 아주 귀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 참고 문헌 : ▪ 200주년 성서주해서 ▪ 성서 여정(마르코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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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2015. 10. 11
마르코 10, 17 ~ 30
♠ 복음 연구
* 17절 : 어떤 부자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 앞으로 와서 꿇어 엎드렸다. 이 자세는 유다인들의 관례에서는 보기 드문 것인데 예수께 극진한 존경을 드린다는 뜻이다. 그는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며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 18절 : 예수님은 부자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은데 왜 당신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 되물으셨다. 하느님만이 모든 거룩함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보다 불완전하거나 열등하거나 덜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다. 하느님만이 구원을 주관하시고 당신은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강조하셨다. 예수께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해 질문한 그 부자는 예수님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 19절 : 예수님은 그 부자가 하느님의 계명을 알고 있다고 여기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십계명의 제5(살인 금지), 제6(간음 금지), 제7(도둑질 금지), 제8계명(거짓 증언 금지), “사기하여 남의 재물을 빼앗지 마라”(집회 4.1 ; 신명 24.14)와 제4계명(부모 효도)을 상기시키셨다. 사기횡령 금지는 십계명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탐욕 때문에 초래되고 탐욕의 본보기이다. 예수님이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 대신에 부자에게 사기횡령 금지 계명을 제시하신 이유는 탐욕보다 사기횡령이 이미 부자가 된 그에게 더 큰 유혹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인 것 같다. 남을 속여 벌어들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위에 제시된 금령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소유권을 존중하고 정직한 사회생활과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규정이다. 예수님은 장수를 누리기 위해 행해야 하는 효도를 제일 마지막에 제시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부자의 질문과 관련되기 때문인 것 같다.
* 20~21절 : 그 부자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모든 계명을 어릴 때부터 다 지키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니까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한 것 같다. 예수님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 부자를 유심히 바라보셨다. 이는 그가 계명들을 다 지킨 데 대한 칭찬이 아니라,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채우라는 간곡한 권유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셨다. 재산을 포기하라는 명령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부자의 특수소명이다. 재물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에 속한다. 영생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이러한 사랑의 결실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유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신다.
* 22절 : 그 부자는 계명 준행을 능가하는 새로운 구원의 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큰 희생을 요구한다고 여기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침통한 마음으로 떠나갔다. 그는 자기 재물에 집착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지상의 재물과 천상의 보화 중에 재물을 택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포기했다. 예수님이 부자에게 재산을 다 희사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 것은 특수한 제자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 이외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재산을 간직한 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 그러나 그들도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 23~25절 : 예수님은 그 부자가 당신의 명령을 거절하자, 제자들에게 재물에 집착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가르치셨다. 제물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충성을 다할 수 없다. 재물의 독소는 사람을 자기중심주의나 물질만능주의나 금권의 노예로 만들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게 한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그분의 왕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부요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치 진주를 사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파는 상인처럼 전적인 투신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움을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격언에 비유하여 거듭 강조하셨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는 뜻이다.
* 26~27절 : 제자들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렸던 것 같다. 또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전보다 더욱 놀라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투덜거렸다. 부자가 예수님의 요구를 너무 어렵게 여겨 영원한 생명의 길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서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 28절 : 베드로는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위해 그 부자에게 요구하신 것을 다 이행했다’고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주장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은 누구나 다 보상을 받는다’ 고 그들을 위로하셨다.
* 29~30절 :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정을 버리신 당신을 본받아 집, 가족, 땅을 버리는 이들에게 이승과 저승에서 백 배 보상을 약속하셨다. 저승의 보상은 영원한 생명이다.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백 배 보상은 예수님이 세우신 새로운 공동체, 즉 믿음을 통해 영적인 형제자매들로 결속된 공동체를 통해 받는 혜택인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서로 가족이 되고 유대관계를 맺어 가진 것을 나누어 가지며 서로 극진히 손님 대접을 했다. 그러나 이 현세의 보상은 원수들의 박해 때문에 파괴될 위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루빨리 적대세력을 섬멸하고 하느님의 왕권을 성취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완전한 보상은 하느님의 왕국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방도를 묻는다. 그는 기본적인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자다. 주님의 답변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이미 황금의 위력과 달콤함을 알고 누려 온 그에게 그 모두를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다. ‘주님이냐 재산이냐’, ‘영원한 생명이냐 재산이냐’라는 갈등에서 결국 그는 재산을 선택한다. 재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되기에 문제이다. 재물이란 대단한 위력과 영향력이 있기에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택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가진 자는 그 맛을 알기에 더 갈망하고, 못가진 자는 필요성 때문에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물은 그 위력만큼 잘 사용하여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재물만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부모 형제와 자녀, 남편, 아내까지도 끊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보상이 약속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누릴 잔치 등 종말 때의 포상을 약속하셨다.
♠ 대화 방향 : ① 영생은 불우 이웃을 도움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는데 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보화를 하늘에 비축해두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예수님은 왜 부자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는가? 나는 그런 부자가 아닐까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말씀의 등불 (가톨릭신문사)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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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전교주일
2015. 10. 18
마태오 28, 16 ~ 20
♠ 복음 연구
* 16~18절 : 열 한 제자는 갈릴레아를 떠나 예수님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여기서 예수님을 뵈었으며 경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의심하는 제자도 있었다.
* 19~20절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아버지께 받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지니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하신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임마누엘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돌보시며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나를 업고 가신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을 산에서 만났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삶 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미처 알지 못하고 의심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 약해 의심할 지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 옆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믿음이 구체적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 도 있다. 그에게 우리는 개신교신자들처럼 주님을 믿으라고 말로 강요하는 것이 그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다. 작은 친절과 그를 향한 진정 어린 눈빛으로 그의 말을 들어 주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 그것이 시끄러운 개신교신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가톨릭신자들의 모습이다. 며칠 전 대학교 부근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 앞에 서 있는데 어떤 남자가 힐끗 쳐다보더니 종이 한 장을 주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길래 그냥 응하지 않고 길을 건넜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에게 길거리에서 종이 한 장 나누어 주면서 무조건 예수님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삶으로 전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라는 것을 인생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주님 앞에서 나의 삶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주 캄보디아에서 선교하고 계신 신부님을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그곳 이야기를 들었다. 캄보디아는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선을 베풀어도 자신이 전생에서 잘 살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선을 받게 된다고 당연히 생각한다고 한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을 강요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이 가톨릭선교라고 말하셨다. 그러다 보면 먼 훗날 그들이 깨닫고 믿게 되리라 생각한다고 하신다. 아마도 우리나라도 맨 처우에 외국에서 선교사 신부님들이 오셨을 때 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하셨다. 우리나라도 불교문화였기 때문이다...
♠ 대화 방향 :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잘 모를 수 있다. 주님 앞에서 바라보며 서로의 긍정적인 모습을 확인해주고 격려해주자. (우리 주변에 함께하는 ○○○형제님의 겸손함과 온유함. ○○○자매님의 긍정적이고 따스한 말과 유머. 실제로는 아주 뛰어난 기억력과 두뇌를 소유하셨지만 때론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자매님의 너그러움. 등등의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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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2015. 10. 25
마르코 10, 46ㄴ~ 52
♠ 복음 연구
☞ 개괄적 이해 : 예리코 소경의 치유 - 예리코는 요르단 강에서 동쪽으로 약8km,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km 떨어진 해면보다 –25cm 낮은 저지대인 오래된 도시다. 예루살렘 입성 전 이곳에서 만난 소경이 마르코와 루카복음에서는 한 명이지만 마태오는 두 명이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이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을 눈먼 사람들로 빗대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이 대목은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기적 이야기지만, 내용은 전형적인 믿음과 소명의 이야기이다. 전체 맥락에서 마르코 복음에서 딱 두 번 언급되는 벳사이다의 소경 치유와 상반된다(8.22-26)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결과는 같으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과 마침 부분에 큰 전환점을 알리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길목인 예리코에서의 초점은 예수님의 신원과 예수님을 따르는 의미를 바르게 보는데 있다.
* 46~47절 : 예리코에 들어가고 떠난다는 말은 예수님이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곁을 지나가시는 아주 짧은 순간에 행동하시는 뜻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곳은 순례객들의 휴식처인 관계로 구걸하는 거지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치유자의 이름을 밝히는 그리스어 Bar(아들) timaias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Bartimaias) 소경이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자렛사람” 예수님이란 소문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 외치며, 구걸을 청하지 않고 자비를 청한다. 다윗의 자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hyios) 아들이며 “메시아”를 칭한다.
* 48~49절 :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시선이 긍정적으로 주님을 고백하며 환호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환호는 다윗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정체와 그분의 권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11-12장 (11.9-10;12.35-37) 에서 계속 거론된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사전 포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온 힘과 열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는 바르티메오의 간절한 몸부림이 부각된다. 마침내 두 번의 부르짖음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오너라” 이르신다.
* 50~51절 : 예수님께 가려면 현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던져주는 물건을 받았던 소중한 “겉옷”을 벗어 내동이치고 벌떡 예수님께로 간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숨길 것 없이 지금까지의 자기 신분과 삶을 버린다는 회개의 뜻으로 믿음의 자세를 보여주는 행위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는 마치 자기가 제자인 듯 “스승님”(그리스말 rhabboni를 아람어로 음역하여 존경과 큰 애정을 드러내는) 칭호를 부르며 “다시 볼 수 있게(anablepõ) 해 주시기를 청한다.” “다시 본다“ 는 것은 ‘위를 보다’ 또는 ‘하늘을 보다’ 를 뜻하며, 그는 처음에는 자비를 청했으나, 지금 육체적인 시력을 회복시켜 줄 뿐 아니라, 영적 비젼도 열어달라고 청한다.
* 52~53절 : 바르티메오의 청은 받아들여졌다. “믿음이 육체적 영적 치유(구원 sõzõ)가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된다.(1.15) 그래서 치유의 선물을 받은 그는 변화되어 제자들이 그처럼 무서워하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따라나셨던 것이다.
♠ 복음 요약 :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는 참된 제자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열 두 제자들처럼 바르티메오 역시 소경으로서 “길”에 버려져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 내동이치고 예수님 앞으로 즉시 나아가 권력을 탐하면서 아무 것도 이해 못했던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오직 보게 되기만을 청합니다. 바깥사람이었다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보며 남이 따르려 하지 않는 분의 뒤를 따르려는 새로운 제자의 이야기가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제자들의 눈멂과 몰이해를 고치기위해서는 예수님의 도우심과 믿음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또 눈멀고“길”에 소외된 누구에게나 예수님께 와서 눈을 떠서 “보고”, “길” 위에서 그분을 “따르도록”초대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바르티메오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그 길목인 예리코에서 “자아에 갇혀” 눈이 어두운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고, 그분을 올바로 보고 따르게 해 달라고, 자기 안에 눈멀고 귀를 막는 악령과 싸우면서 권력과 돈에 대한 갈망으로 눈먼 상태를 깨닫고, 그분의 힘든 인생길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시력을 구하는 되기를 청합니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현상은 주님의 날의 표징 (이사29.18:35.5)이며, 교회는 연중 30주일 전례에서 새 계약을 약속하는 예례미아(31.7-9)예언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까지 다 구원하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바르티메오는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본보기입니다.
♠ 대화 방향 : ① 오늘날 나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의 길을 두려워하는지요? 왜 그럴까요?
② 내 마음이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참으로 청해야 할 청원은 무엇입니까?
♠ 참고 문헌 : ▪ 마르코 복음해설 (정양모 신부) ▪ 예수님을 따라, 마르코 복음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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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묵상 >
내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면...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안 첼리나 (선희)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 23 ~ 26>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망으로 끝나는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희망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놓아버림은 인색할 만큼 엄격한 생활을 하거나, 영적인 것을 추구함에 있어, 극도의 단식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 그 긴장을 푸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영적인 가난이란 보물을 어디에 두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내 놓고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마음을 지녔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길을 따르려면, 사랑의 마음, 온유한 마음, 측은한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중하게 여기는 것,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나 자신을 죽이고 남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돌처럼 딱딱한 심장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충전 받아야만 말썽꾸러기 자식에게, 원망스럽기까지 한 배우자에게, 생판 모르는 이웃에게 폭풍 같은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태양, 그 햇살이 없이 내 힘만으로 화초를 키울 수 없듯이...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운은 없습니다. 불 사이를 지나지 않으면 금이 정련되지 않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는 생전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하라 하시지만, 우리의 뜻은 거짓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뜻은 영원한 것을 사랑하라 하시건만, 우리는 이승의 다함 있는 것을 찾습니다. 당신은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사랑하라 하시건만, 우리는 이승의 낮고 낮은 땅을 사랑합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지만 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그 모든 흘러가는 소리의 바탕에 깃든 신의 음성, 일상의 모든 풍경, 일상의 모든 소리, 일상의 모든 만남 속에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도 일상 속에서 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은 하지 못해도 작은 만남 순간, 순간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찾는 하루가 되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 출처 :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중앙일보 뉴스클립>, <신영복 교수(담론)>, <이민아(이어령 고수의 딸)> 내용 중에서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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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연수회 스케치 >
9월 봉사자 월례회의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기록원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당산동에서의 월례모임은 11시에 시작한 오전 코이노니아와 점심, 그리고 오후 전국월례회의가 있었다. 지도수녀님이 불참한 관계로 결론을 내지 못했고, 기본적인 문제에만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과 현실론이 대립되었다. 그렇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 월례회의가 되었다.
오전 11시에 사랑의 송가로 시작하여 대표기도는 전국조정이 하였고, 성경낭독은 마르코복음 8,27~35로 많은 인원이 두 차례 낭독했다. 몇 분의 묵상이 있었고...
주최 측에서 마련한 점심식사 후, 오후 회의가 계속되었다. 필자는 서울에서 오신 데레시아 수녀님과 잠시 대화를 했다. 늦게 합류한 오후 회의에서 각 팀 월례현황보고가 있었고, 지난번에 한 수련회평가를 간략하게 하였고, 성서형제회 50주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이야기의 첫머리를 내어놓았지만 아무런 결론 없이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음 모임은 3번째 토요일에 지도신부님이 계시는 글라라수도회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생활터로 갔다. 세르브스팀장의 도움으로 원곡성당 말씀선포자와 더불어서 돌아왔다. 제가 의견에 참석하느라고 의견내용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다만 기쁜소식지에 올렸던 복음묵상자료를 모아서 책자를 만들어서 사용하자는 내용과 복음자료 작성자들의 모임이라든지, 50주년을 위하여 준비할 조직문제 등... 중요한 사항은 지도수녀님의 불참으로 결정을 보류하였다... 오히려 완전히 열지도 못하는 우리공동체가 다가서는 교우들을 막는 것이 아닌지 하는 갸우뚱하는 모습이라 할까... 늘 메뉴를 준비하지도 못하면서 그날그날 따스한 입맛만이 살아있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하는 일이란 주님께서 주워진 일이 됩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희생되는 모든 일이 우리가 계산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몇 배로 되갚아주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서 혹시나 한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들이 창설자신부님의 아나윔정신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바깥에 나가서 세상이나 교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그를 대우하지 않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 여겨봅니다. 서로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일이나 열린 공동체가 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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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기고>
FB 연수회를 마치고...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남 파비올라(은정)
이번 하계연수회는 제 나름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 말에서 그리고 수녀님의 강의 내용, 열정 등에서 제 나름의 많은 정리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 뜻 깊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뒤늦게 토요일에 당산동 식구들과 도착했을 때 마음에서는 처음 오시는 자매님들이 계셔서 걱정 반, 기대 반 이었습니다. 당산동은 식구들이 많아져서 좀 더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것 같고, 매번 왔었던 연수회와는 좀 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프로그램, 강의, 코이노니아, 나눔 등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좋은 것일수록 함께 하는 사람이 많으면 더욱 좋으니까요. ^^
처음 오신 분들도 이번 연수회가 좋은 시간으로 기억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수녀님의 강의는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제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부분들을 짚어주셔서 갈증이 해소된 느낌이 들었고, 수녀님의 순간순간 하시는 말씀에서 제 스스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막연하긴 하지만 무언가가 신앙생활이나 나의 모습에서 잘못되어 있음을 각성하게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 같고 왠지 다 찔려서 부
끄럽고 숨고만 싶었습니다. 오늘 일을 하면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저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마도 주님은 사람을 통하여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성극을 준비하면서도 예전에 성극준비 할 때에는 하기 싫기도 하고, 남들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각 회원들의 모습을 담아 다 같이 참여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하게 되고, 재미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번 성극에서는 조금 더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번에 감사했던 건 전주에서 못 오신 분들이 미안한 마음에 맛있는 반찬과 싱싱한 야채, 쌀 등 너무 많은 것을 보내주셔서 너무나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정말 성서형제회를 뜨겁게 사랑하시는 모습에 감동 받았습니다. 못뵈서 아쉽기도 했고요... 또 감사한 것은 수녀님들이 예전보다 많이 늘어나셔서 제 개인적으로 한 분 한 분 수녀님을 뵐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주님의 섭리하심과 성서형제회를 사랑해주시는 수녀님들이 계셔서 든든한 마음과 감사함, 그리고 거기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열심히 성서공부하고 있지 않는 저게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또 감사할 것이 있네요. 늘 헌신적으로 기쁘게 봉사하시는 봉사자 분들과 애쓰신 형제, 자매님들의 모습에서 천사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게 과연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 있도록 제 스스로 성화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의 하계연수 느낌을 작성하면서 주님께 이번 하계연수에 저를 참석하게 해주시고, 또 많은 채찍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많은 당근 덕분에 저의 나쁜 모습, 습관과 불성실한 신앙에 대하여 잘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늘 헌신하시는 수녀님들, 늘 뜨겁게 성서형제회를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님들, 특히나 열심히 수고하신 몇몇 자매님들의 모습을 통하여 저를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일깨워주신 주님, 그리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미사시간에 뽑았던 성서 말씀입니다.
“너희 영혼이 주님의 자비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를...! ” (집회 51, 29)
저도 기쁨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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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성서형제회 형제자매님들께...
복음연구 담당 FB 회원
장 도미니꼬사비오 (철호)
안녕하세요, 성서형제회 형제자매님들!
그 동안 저는 12일부터 20일까지 로마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가기 전 로마 살레시오대학교에서 유학 중이신 한국 살레시오 신부님들과 연락이 되어서 걱정 없이 로마로 향했습니다. 저녁 6시 반에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에 마중 나오신 사무엘신부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학회장소인 로마예수성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향했습니다. 부속병원인 제멜리 병원 앞에서 내려서 학회장소인 의과대학 강당까지는 5분 거리였습니다.
신부님들이 머무시고 계시는 살레시오대학교 기숙사까지는 차로 1시간 반 거리이고 로마 교통이 복잡하여 학회 세미나 기간인 15일까지는 예수성심대학 부근 도미니코 수녀원을 예약해 주셨습니다. 수녀원에 도착해서 신부님과 그곳 수녀님께서 이태리말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외출 시 저녁 10시 반까지는 들어와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방은 작았지만, 깨끗했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같이 있는 방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다음날 피렌체로 가시어 한국선교사신부님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15일 점심시간에 다른 신부님이 데리러 오실 거라고 말하셨습니다. 핸드폰 카카오 톡으로 대화가 가능하기에 무슨 일이 있으면 카카오톡으로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학회 기간 동안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향후 연구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녁 동안 시차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지만, 다음 날은 학회장에 가서 등록을 하고 오전 10시에 주일 미사가 수녀원에서 있어서 수녀원에 미사에 참석하고 학회장으로 가려는데 유일하게 영어가 가능한 아일랜드에서 오신 수녀님 두 분이 저에게 오셔서 커피 한잔 하자고 하셨습니다. 이태리는 전부 에스프레소를 마십니다. 그것도 하루에 서너 잔은 기본이라고 합니다. 에스프레소가 너무 써서 전 우유가 섞인 카푸치노를 마셨습니다. 그곳 수녀님들은 대다수 할머니수녀님들이었습니다. 마리아, 실라 두 분 수녀님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북한 핵 때문에 걱정해주셨습니다. 이상 없다고 말했으며, 수녀님들 매우 건강하게 보이신다고 말했더니 기뻐하셨습니다. 그곳 도미니코 수녀원은 평일은 오전 6시 45분 미사가 시작이 됩니다. 미사에는 이태리 신부님께서 상주하고 계셨으며 수녀님들과 함께 양영성체를 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아침식사는 빵과 우유입니다. 이태리 말 하나도 모르지만 “카페를 마실 거냐, 라떼를 마실 거냐?” 물으시길래 “라떼!” 라고 대답했더니, 주전자에 뜨거운 우유를 주셨습니다. 이태리 빵은 매우 딱딱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을 떼 아침식사로 바게뜨빵을 드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빡빡한 바게뜨 빵을 톱칼로 썰어서 크림치즈나 잼을 발라서 먹습니다. 주일 저녁 학회장이 주최하는 저녁식사가 있었는데, 버스 두 대로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곳 레스토랑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로마시내 야경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성당이 불빛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로마에서는 바티칸 베드로 성당보다 더 높게 건물을 지을 수 없게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병원 앞에서 내려 주었는데 저녁 12시 반이었습니다. 수녀원 벨을 눌러도 전기가 꺼져 있어서 벨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저녁 10시 반까지 들어오라고 했는데, 이태리 말 한마디도 모르는데 벨을 다섯 번이나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성모님께 기도했습니다. 난감해서 사무엘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자정이 넘었기에 이태리 말이 나오면서 신호가 가는 도중에 두분 할머니 수녀님이 나오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수녀원 문 앞에서 서서 밤을 새야 했을 뻔했습니다. 수녀님들은 저에게 종이에 숫자 10, 30을 써 주셨습니다. 다음날은 수녀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어 주셨습니다. 꼭 10시 반까지 들어오라고 하시길래, 오늘은 걱정 마시라고 영어로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으며 손짓이 통했습니다.
수녀원 미사를 하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15일 수녀원 떠나기 전 할머니 수녀님과 찍은 사진입니다. 뽀또를 싫어하신다는 할머니 수녀님과 강제로 찍은 사진입니다. 젊은 수녀님이 제 편이 되어 주셔서 서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당분간은 로마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한주간도 평안하시길 바라며...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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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5년 8월 입출금 내역 (FB 연수회 회계내용 포함)
일자 | 내 용 | 수 입 | 지 출 | 잔 액 |
7 /31 | 전월 이월금 |
|
| 1,615,486 |
8 / 2 | 사회복음화 지원금 (전주 교도소) |
| 50,300 | 1,565,186 |
8 / 2 | 예수그리스도 수녀회 후원회비 |
| 30,300 | 1,534,886 |
8 / 4 | (안산 원곡성당) 세르브스 팀 F·B | 20,000 |
| 1,554,886 |
8 / 5 | (전주 효자우전) 성모마리아 팀 F·B | 30,000 |
| 1,584,886 |
8 / 7 | (전주 효자4동) 파티마 팀 F·B | 50,000 |
| 1,634,886 |
8 / 8 | (전주 호성동) 예수성심 팀 F·B | 57,000 |
| 1,691,886 |
8 /17 |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 50,000 |
| 1,741,886 |
8 /21 | (서울 이문동) 일반 팀 F·B | 30,000 |
| 1,771,886 |
8 /30 | (안산 원곡성당) 자매님 팀 F·B | 47,000 |
| 1,818,886 |
8 /30 | (전주 서신동) 그리스도폴 팀 F·B | 30,000 |
| 1,848,886 |
8 /30 | <기쁜소식지> 인쇄비 (9월호) |
| 168,000 | 1,680,886 |
8 /30 | <기쁜소식지> 발송 우편요금 (9월호) |
| 61,000 | 1,619,88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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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입출금 합계 | 314,000 | 309,600 |
| |
다음 달 이월금 (통장 잔고) | 1,619,886 | |||
봉헌금을 보내주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입금계좌 : 우리은행 1002-649-272793 이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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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소식란 >
♠ 9월 < F·B 봉사자 월례회의> 모임 안내
<봉사자 월례회의> 모임을 다음과 같이 갖고자 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일시 : 2015년 10월 17일 (토), 오전 10시 30분 정각, 'FB 월례미사' 로 시작
※ 장소 : 익산, 성글라라 수도원 ( 전화번호 063-834-6813)
(전북 익산시 월성동 산 141 )
** 교통편 - <익산 기차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로 약 15분 정도 소요됨...
- <익산 시외버스정류장>에서는 택시로 약 20분 정도 소요됨...
- <시내버스> 이용은 다소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됨...
※ 참가 대상 : 각 지역, 각 팀 봉사자 형제자매님 ( 각 팀 1명 의무 참석 )
※ 안건 : ① 각 지구, 팀별 현황 보고 ( 팀 월례보고서, 지구 월례보고서를 2부씩 작성, 발표, 1부 제출)
② 창립 50주년을 향한 FB 발전방향 협의
③ 기타 안건 협의
※ 문의사항 : 전국조정말씀선포자 (이 보나벤뚜라, 강진) ☎ 010-3066-5147
♠ <코이노니아 팀 월례보고서> , <지구 월례보고서> 양식 활용 안내
모든 지구 봉사자와 코이노니아 팀 봉사자들은 매월 월례회의에 참석할 때 ‘월례보고서’를 2부씩 작성하여 보고한 후, 1부는 본부에 제출 바랍니다...
( F·B 홈페이지의 ‘공지사항’란과 ‘F·B 행사자료실’에서 다운로드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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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의 겨자씨
“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마태오 복음 18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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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아직도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선교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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