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장터 장돌뱅이
벌써 삼십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내가 바랑을 지고 화개장터를 오르내리며 과일과 푸성귀를 골라 담던 일이 말이다. 그러니까 1972년 봄부터 나는 지리산 쌍계사에 몸을 담고 살았다. 그때 소임은 원주였지만 하는 일은 행자생활 그대로였다.
범어사에서 행자과정(생활)을 끝낸 나는 사미계를 받아 본격 출가생활을 시작했지만 은사에 대한 일이 순조롭지 않아 결국 속가 집에서 두어 달 지냈다. 나의 완강한 신념(고집)으로 사태는 원래 내가 뜻한바 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은 스님(광덕)이 한발 물러서서 나를 안아주었기 때문이고, 또 그 덕분에 다시 바랑과 승복을 차려 입은 나는 지리산으로 찾아들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은 내가 쌍계사에서 다시 행자생활을 시작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범어사에서 이미 계를 받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사세(事勢) 부득이하여 쌍계사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후원 살림살이를 모두 맡게 되었다. 그런데 쌍계사의 후원 일(살림살이)은 그 당시 어린 내가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많았다. 일이 많기로는 범어사가 월등했지만 그래도 범어사에는 노련한 후원 소임자들이 따로 있고, 거기다가 행자들이 많았기에 일이 척척 잘 되었지만 쌍계사에는 나와 더불어 고작 두 명의 행자가 더 있을 뿐이었다.
몇 안 되는 손으로 일을 하니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일이었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도 또 얼마나 일을 더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을 만큼 일의 연속이었다. 스무 살의 내 나이로는 감당 못할 정도로 벅찼다.
화개장터에 내려가서 시장 보는 일은 이틀거리 사흘거리로 치르는 정기행사였고, 각 법당 청소하랴, 마당 청소하랴, 하루 세 번 공양 준비 하랴, 빙빙 돌듯이 쭉 이어지는 일정은 매일 치르는 행사였다. 이와 같이 절 안의 살림살이를 챙기고 부처님과 대중을 받드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던 시절.
가끔 남들은 도시락 싸들고 칠불암까지 갔다 오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회나 여유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오직 일속에서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것이었다. 범어사 행자생활의 엄격한 고행을 능가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때를 ‘지리산수도상(智異山修道相)’이라고 불러 본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그 일이 익숙해지면 잠시나마 틈이 생기고 여유를 얻게 되나 보다. 역시 그 바쁜 쌍계사 행자생활에서도 나만의 즐거움은 있었다.
내가 혼자 누린 즐거움은 화개장터에 내려가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장에 간다 해도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없고, 나이가 어렸기에 물건 볼 줄도 몰랐고, 좋은 물건 고를 줄도 몰랐다. 화개장터 노점에서 콩나물 장사하고 있는 쌍계사 신도 할머니(보살)가 나대신 물건을 사서 챙겨주는 대로 지고 오는것이 주임무였다.
시장 가는 날, 바랑망태를 지고 할머니(보살)에게 가서 반찬거리가 떨어졌다고 하면 그 할머니는 절살림을 훤하게 아는 터라 주저 없이 푸성귀를 주섬주섬 챙겨서 나의 바랑망태에 가득 넣어주곤 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재가 있다고 말하면 역시 그 일도 다 알아서 과일이나 나물거리를 바랑에 가득 넣어주는 대로 짊어지고 쌍계사로 올라오면 되었다.
목하 내 나이 오십,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화개장터 그 할머니의 한결같이 순박한 마음씨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지리산 계곡(대성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쌍계사를 행해 걷다 보면 석양의 낙조를 받은 물결은 금빛으로 출렁거렸고, 그 위에 뛰노는 물고기(은어)들은 하얀 비늘을 햇빛에 드러내며 팔딱팔딱 춤을 춘다. 그 광경이란 금빛과 은빛의 하모니가 연출한 하나의 환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러한 섬진강의 풍광은 세월이 흐르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아직도 내 마음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는 몇 안되는 그 시절의 소중하고 그리운 추억이다. 요즘도 가끔 그때의 화개장터와 강변의 풍광을 떠올려 보노라면 빙그레 웃음부터 먼저 나온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십리는 넉넉히 될 벚꽃 길을 따라 묵직한 바랑을 지고 걸으면서 산과 강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념에 젖던 일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하는 자조 어린 실소라고나 할까.
큰절 서편의 탑전에 오르면 육조대사의 머리를 모셨다는 육조정상탑이 있다. 아득한 옛날, 육조스님을 엄청 존경한 신라의 어느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 몰래 가서 육조스님의 머리를 끊어 들고 도망쳐 다시 신라에 돌아와 그 머리를 모신 곳이 바로 쌍계사 탑전이라고 했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너무나 신기하고 궁금하여 나는 절 안에 대중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살그머니 탑전으로 올라가 탑 아래 땅속으로 손을 넣었는데 아무리 넣어도 끝이 없었다. 뻥 뚫린 허공만 느껴졌다. 급기야 몸을 거꾸로 물구나무서듯 엎드려 힘껏 팔을 휘저어 보아도 역시 허공만 만져졌고, 애꿎은 엉덩이만 공중으로 치켜들려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 탑전 바로 앞은 옛날부터 이름도 유명한 쌍계사 선방이었다. 그곳(禪院)에 동당(東堂). 서당(西堂)이 있는데 터가 얼마나 드센지 공부하러 오는 선객들은 누구나 한번 씩 캄캄한 밤중에 신장(神將)들의 시험을 받아 마당에 내리꽂힌다는 얘기를 듣고 해만 지면 그 근처에 얼씬도 못했던 기억도 역시 새롭다.
어쩌다가 쌍계사 산내 암자인 가까운 국사암에 오르면, 큰절 원주스님이 왔다고 극진했던 비구니 노장님의 환대도 잊을 수 없고, 숨을 헐떡이며 산길 수십 리를 올라가서야 도달하는 불일암 도인(이름을 모름)스님의 모습도 좋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뭔가 비범한 분위기를 띤 그 도인 스님은 어느 날, 소풍삼아 즐겁게 달려간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잔잔히 웃어주었다. 그 친절을 빌미로 나는 겁도 없이 도인 스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급기야 도인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투명한 살갗 속에 내비치는 실핏줄을 보고 무척 신기해하기도 했다. 도를 잘 닦으면 저렇게 핏줄도 보이는구나 하고 자못 신기하여 큰절에 와서 여러 스님들에게 되물어보기도 했다.
하늘같이 높이 보였던 사숙과 대중들이 나만 남겨놓고 하동 읍내로 출타하고 없던 날, 평소 궁금했던 대웅전 뒤 봉우리의 산줄기를 따라 올랐다. 한발 한 발 올라가면서 조금만 더 가봐야지 하는 호기심 때문에 자꾸만 발길을 옮겨 놓다가 끝내 길을 잃고 말았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어둠은 시시각각 나를 내리눌렀다. 순간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평소 노장 스님들이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열심히 부르기만 하면 소원을 다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앞뒤 재거나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어둠 깔린 썰렁하고 으스스한 산속에 꼼짝없이 갇혀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던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회오리바람이 휙 불어와 내 눈앞에 쌓여 있던 낙엽들을 말아 올리며 저만큼 가고 있었다. 살길이 열리려고 그랬을까, 아니 약속대로 관세음보살의 인도가 눈앞에 나타났던 것일까.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예감이 번뜩했다. 저 회오리바람을 따라가면 살게 된다는 직감이 왔던 것이다. 나는 저만큼 낙엽을 말아 올리며 앞서 간 회오리바람을 따라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내달리는데 내가 달려가는 앞쪽이 점점 환해지고 그 길을 계속 가면 살 것 같은 확신이 들어서 숨가쁜 줄도 모르고 더더욱 앞만 보고 계속 달렸다. 역시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도 분명 대웅전 용마루가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걸음을 천천히 하여 턱까지 차올랐던 호흡을 고르며 비로소 가슴을 쓸어 내렸다.
어리석음은 또 다른 이름의 순수함일까. 쌍계사 시절, 제2의 행자생활은 어리석었던 만큼 더 순수한 시기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님의 다음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쌍계사 후원에서 그 고된 행자생활을 참으며 살았다. 남들은 한 번으로 족한 행자생활을 나는 두 번이나 했으니 역시 행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힘들었던 만큼 스님의 한량없는 은덕과 관심이 더 지극하고 크다는 것, 스님의 특별 지시로 생전 처음 가게 된 쌍계사, 지금도 스님의 명령만 있다면 그 어디라도 서슴없이 달려가고 싶다.
(월간 『풍경』,2001년 11월호에 실린 글의 原文)
광덕스님 시봉일기 3, 구국구세의 횃불, 지은이 송암 지원 스님, 도피안사
첫댓글 지리산 하동 쌍계사,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섬진강의 아름다움과 쌍계사 계곡의 벚꽃, 화개장터! 지난 여름 방학 때 몇몇 분들과 함께 들렀던 곳입니다. 불일암에서 조금 더 가면 불일폭포도 좋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불러서 오시는 분이라면 보현보살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분인데 더 빨리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스릴있게 읽었다고 해야할까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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