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41-
(그리운 추억들 -2-)
어느 해인가 금강의 반대쪽 절벽에서 아주 큰 멧돼지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동네사람이 발견하여 장정이 둘이서
메고 왔다. 그날 동네서는 이 멧돼지로 푸짐한 잔치가 치러졌다. 야생 멧돼지도
절벽을 지나다가 떨어지는 실수를 하나보다
산에는 노루도 많았고 토끼도 많았다. 하루는 노루새끼가 우리 집 마당까지 내
려와 야단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노루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보기
만하면 총을 쏘아 잡아먹었으니 멸종위기에 있겠지...
꿩도 많았는데 이 꿩이 콩을 심으면 꼭 내려와 콩을 파먹어 애를 먹이곤 하였다.
나중에는 대전에 나가 “싸이나” 라는 약을 사가지고 와서 콩을 반으로 쪼갠 후
속을 조금 파서 이 약을 넣은 후 밥풀로 붙여서 콩밭에 뿌려 놓으면 이 콩을 먹
은 꿩은 좀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었다. 이 꿩을 주어다가 내장을 다 빼버리고
고기는 먹었다.
멧돼지는 고구마 밭에 내려와 파헤치고 가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야생동물
과의 어울려 살던 그때가 사람이 사는 참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야생
동물이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니 이러한 낭만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 짝이 없
다. 참으로 추억이 많은 시절이었다.
매년 봄이 되고 식목일이 되면 면에서 낙엽송과 오리나무의 묘목을 심으라고
배당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 집 건너편 산인 대추밭골 음지쪽(북쪽면)에 심
었다. 심을 때는 귀찮고 마지못하여 심었으나 그 후 2~30년이 지나니까 이
나무들이 쭉쭉 곧게 자라 아름드리나무로 자라 보기에도 흐뭇하고 요긴하게
재목으로도 써먹을 수가 있으니 아주 좋았다.
장독대 뒤에는 울타리 겸 두릅나무도 심었다. 두릅은 봄에 두 차례에 걸쳐 순을
따서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그 맛 또한 참 좋았다.
또 가죽나무가 하나 있었다. 이 가죽나무는 곧게 크며 나무 자체가 속이 붉은색
이며 가구의 목재로 귀하게 쓰인다 한다. 이 가죽나무도 봄에 순을 따서 찹쌀가
루와 고추장을 끓여서 잎에 바른 후 참깨를 살짝 뿌려서 줄에 걸어 말렸다가 튀
겨서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먹으면 독특한 향기나는 고급 먹거리였다.
비온 후에 앞산 음지진 곳에 가면 버섯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이 버섯도 된장
국에 넣어 먹으면 쫄깃쫄깃한 게 고기를 먹는 기분이었다.
아버님께서 바둑을 참으로 좋아하셨다. 만주에 있을 때도 항상 우리 집에는
손님이 들끓었으며 그때의 바둑 손님들은 일제에 항거하여 만주로 피신 온 사
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 중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농사를 짓도록 땅을 주었으며 볍씨까지 대주고 추수하면 그냥 반반씩
나누었다.
농사를 짓지 않았던 사람들도 농사짓기가 쉬워 누구나 건강만 하면 지을 수 있
었다. 봄에 논을 갈고 물을 대서 쓰레질하고 10 여일 후 바닥에서 피가 자라면
자루가 긴 낫으로 서서 논을 왔다 갔다 하면서 피를 거둔다.
그리고 난후 싹티운 볍씨를 훌훌 뿌리고 다니면 되었다. 그리고 나락이 크는
동안 한두 번 피를 낫으로 베어서 논둑에 버리는 일만 하면 되었다. 땅이 비옥
하여 비료도 퇴비도 없이 농사를 지었다.
가을에 나락을 베어서 쌓아둔 그 자리에서 탈곡기로 타작한후 마대에 담아 반
반씩 나누어 가지면 그해 농사는 끝이다. 그러니 농사일이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으며 혼자 최소 30마지기 (6000평)는 놀며 능히 지을 수가 있었다.
농한기에는 늘 우리 집에서 와서 바둑을 즐겼다. 가끔 수건, 비누, 양은냄비등
을 상으로 하여 바둑 대회도 열곤 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손님들
과 바둑을 두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형님과 둘이서 줄바둑을 두었었다.
한국에 와서 그럭저럭 생활이 안정되니 바둑을 두고 싶어졌다. 그 무렵 바둑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목수한테서 송판 하나를 얻어왔다. 톱으로 바둑판과
같은 규격으로 만들어 대패로 밀고 다듬었다. 그 위에 칼로 줄을 긋고 먹물로
줄을 그은 후 들기름을 발랐다.
바둑판은 완성되었다. 이제 바둑알이 문제였다. 나는 곧 바로 강가로 나가 바
둑알 비슷한 흰 돌과 검은 돌을 한나절을 허비하면서 주어 왔다.
아주 동그란 바둑알과 똑 같은 돌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비슷한 것을 주어왔
더니 둘만 하였다. 이제 틈만 나면 형님과 바둑을 두었다. 그저 줄바둑이지
만 재미가 있었다.
그 후 나는 서울로 올라온 후 바둑을 둘 시간이 없어 못 두었는데 1968년 월
급쟁이로부터 독립하여 회사를 설립할 때 사업파트너와 주로 기원에서 만났음
으로 다시 바둑을 두었다.
지금도 나는 바둑을 즐기고 있다. 정식으로 배운 바둑이 아니기에 늘지 않는다.
그러나 바둑은 신사적인 놀이이기에 바둑을 사랑한다. 아마도 아버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