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
식은정 식은행복 식은정 식은행복
아 ~~ 꼬집힌 풋사랑
마음껏 울려다오 원망을 말고서
몸부림 치는님을 몸부림 치는님을
아 ~~ 내 어이 갈소냐
(뿌리친 옷자락에 눈물이 젖는다
속이고 속는세상 속이고 속는세상
아 ~~누구를 믿으랴 )
-남인수는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노래공부를 한것이 아니고 전구공장에서 일했다.
학력도 보잘것 없었고 정식으로 노래공부를 한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타고난 미성(美聲)은 감히 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출충했다. 그는 천부적인 노래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일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에 주변사람들이 깜짝놀라 청하고, 다시 큰소리로 부르자 "어떻게 노래를
그리 잘 할 수 있느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시대에 딱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고음처리 또한 일품이였다. 모두들 레코드 회사에 가보라고 권유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서울로 향한다. 처음 찾아간 곳이 '시에론 레코드사'였다. 오디션을 받자말자 즉석에서 채용된다.
세상에서 보기드문 미성이였기 때문이다. "눈물의 해협"이란 노래로 데뷔한 남인수는 1935년 5월 30일 라디오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 가요계는 강문수(姜文秀 남인수의 본명)의 목소리에 귀와 눈이 쏠리면서 이철과 강사랑의
설득으로 오케이 레코드사에 스카웃된 후 남인수라는 예명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금년 22세, 오케이에 입사한지 3년, '범벅서울' '물방아 사랑' 등으로 단연 가요계의 기린아가
된 일세의 행운아"라고 소개하고 있다(1938. 4. 21자)
1938년 3월에는 "꼬집힌 풋사랑"을 부른다. 그때는 이미 작곡가 박시춘과 콤비를 이루고 있었다.
"꼬집힌 풋사랑"은 화류계의 덧없는 운명을 노래했는데 가엽게 시달리기만 하는 여성들을 한없이 울렸다.
이 노래가 인기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 서울 청진동 요정의 어느 기생이 음독자살했다.
머리맡 축음기에 바로 이 "꼬집힌 풋사랑"이 얹혀 있었다. 감고 또 감아 태엽이 끊긴 채......
이무렵 남인수는 가요계의 정상을 차지하고있었다. 그때 유행가가 전파를 타자 전국 방방곡곡을 진동시켰다.
그가 남긴 노래는 지금도 전파를 타고 우리의 안방까지 찾아오고 있다.
후배가수들이 여러명 "꼬집힌 풋사랑"을 리바이벌 하고있는데..가수 김용임이 대표적이다
-------- 가요반세기 해설 중에서---
첫댓글 감사히 듣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
옙! 감사합니다..
구수하고 정서와 향수 어린 하모니카 소리~~~
정겹게 들림니다~~~항상 좋은 연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취미로 가지고 다닐만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