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를 고치며
글 : 김 민 숙
재봉틀을 돌린다. 남편이 입던 바지의 허리를 줄여 막내에게 입힐 생각에서다. 허리만 맞춰 줄였더니 엉덩이가 너무 퍼져 영락없는 오지항아리다. 엉덩이 선도 줄이고 허벅지 선도 들여본다. 시침질하고 아이를 불러 입혀본다. 돋보기를 끼고도 몇 번씩 헛손질하는 내게 막내는 바늘에 실을 몇 번 끼워주더니 아예 차리고 들어앉는다.
“가서 네 할 일이나 해라.”
“가정시간에 배워서 나도 시침질할 줄 알아요.”
“사내자식이 바느질을 배웠다고?”
내리 딸 셋을 낳고 시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셋째가 삼칠일이 지난 후에 시댁에 오긴 했는데, 오매불망 증손을 기다리던 할아버지 앞에 딸아이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전년방에 아이를 눕히고 혼자 할아버지 방에 들어갔더니 새아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고 애비는 직장에 잘 나가느냐고만 하셨다. 문을 열고 돌아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셋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태어난 아이가 막내다. 시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저세상에 가셔서 보내준 손자라며 귀해 하셨다. 녀석이 기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산소에 데리고 가면 봉분 위에 손자를 안아 올려놓으셨다.
“증조할아버지시다.”
질겁하는 우리에게 시아버지께서는“할아버지께서도 어깨 위에서 노는 증손이 얼마나 예쁘겠느냐.”고 하셨다. 딸아이를 봉분에 올렸다간 벼락이 쳤을 것이라며 시누이가 돌아서서 키득거리자 모두 소리 내어 따라 웃었다.
키가 누나들을 넘어섰는데 집에서 막내의 이름은 아직도 아기이다. 막내는 남편이 쉰 살이 되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는 막내가 스스로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막내는 준비물을 빠뜨리거나 실내화를 챙겨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학교에 가서 창 너머로 녀석을 찾으면 키만 덜렁 웃자란 탓에 눈에 잘 띄었다. 다른 아이들이 반짝이며 선생님과 눈을 맞출 때 녀석은 친구와 장난을 치거나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기 일쑤였다. 집에 돌아오면 단단히 주의를 주려고 별렀다. 가방을 메고 현관에 들어서는 녀석에게 오늘 학교생활이 어땠느냐고 물으니 좋았다고 싱글거렸다. 선생님의 말씀은 잘 들었고 받아쓰기 시험도 잘 보았다는 것이다.
“시험을?”
낚아채듯 가방을 받아 열고 시험지를 찾아든 손이 맥없이 풀렸다. 동그라미가 네 개에 가위표가 여섯이다. 붉은 색연필로 40이라고 쓴 숫자가 꼿꼿이 일어섰다. 글씨는 엉망이어서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단단히 혼을 내고 밥을 한 끼 굶겨 볼까. 종아리를 때리고 다짐을 받아볼까. 혼란스러웠다. 막내는 그래도 자기보다 더 많이 틀린 친구도 있노라며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벌을 주려는데 웃음이 먼저 나왔다.
바르게 쓰기도 어려운데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까지 맞추라니 1학년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았다. 녀석을 바라보니 작은 손으로 네 문제나 정확하게 쓴 것만도 장한 일이었다. 틀린 여섯의 가위표는 점점 작아지고 맞은 네 개의 동그라미는 앞산만큼 커져서 내 가슴을 채웠다. 아이를 덥석 껴안았다.
남편이 입던 바지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막내에게 아빠의 옷을 입힌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버리기 아까워서 챙겨 놓아 둔 것뿐인데 며칠 전 옷장 정리를 하다가 아들을 불러 입혔더니 허리가 클 뿐 길이가 딱 맞는 것이었다. 지난해 키가 부쩍 자라서 철이 바뀔 때마다 옷을 새로 장만해야 할 처지였는데 반가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 유행이 지나서 못 입는 한복 치마도 어머니의 손만 거치면 원피스로 둔갑하고,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도 조각을 맞추면 새 이불이나 밥상보가 되었다. 어른의 큰 옷을 줄일 때나 작아진 옷에 주름을 덧대고 어스를 이어 품을 늘일 때면 나는 심술을 부렸다. 친구들처럼 시장에서 산 약품 냄새가 싸아하게 나는 새 옷을 입고 싶었다. 어머니가 고쳐준 옷은 감추어둔 가난이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것 같아 덮고 싶은 환부였다.
아이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아빠가 입던 옷을 고쳐준다니 녀석은 뜻밖에 신바람을 냈다. 옷장을 휘휘 저으면서 낙점해둔 것들이 상당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친 바지를 입은 막내가 거울 앞을 서성인다. 아빠의 학생 시절 사진을 펼쳐놓고 제 자신을 바짝 당겨 붙여가며 싱글벙글이다. 키가 자란만큼 마음도 더 자라 녀석에게도 연륜이 쌓이면 아빠의 가슴만큼 품도 넉넉해지리라. 기회를 놓칠세라 고삐를 잡았다.
“아빠가 학교에 다닐 때는 우등생이었다더라.”
막내는 일순 머뭇거리더니 주먹을 쥐어 보인다.
“청출어람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제법 사자성어까지 들먹인다. 4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오고도 당당하던 녀석은 아빠가 못하시는 바느질도 잘할 수 있으니 이미 청출어람이란다. 나란히 거울 앞에 섰더니 내 머리가 막내의 턱 아래에서 멎는다. 오늘 나는 막내에게서 ‘아기’라는 정겨운 이름을 거두어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