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경력>
-1951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 중․고등학교 졸업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 후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제적과 투옥 후 25년 만에 졸업
-도루코 노조위원장,서노련 등 노동운동
-1986년 5.3 인천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2년 5개월 복역
-제 15,16,17대 국회의원 (경기도 부천 소사)
-한나라당 제1 사무부총장, 기획위원장, 공천심사위원장(17대 총선)
-2006년 민선4기 경기도지사
<수상. 자격증>
-1996년~2005년 10년 중 9년 의정활동 국정 감사 최우수의원 선정
-1999년 결식아동 돕기 의정활동 공로패 수상
-2006년 국회 출입기자단 선정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
‘일 잘하는 국회의원 1위’
-2007, 2009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 민선4기 광역자치단체 공약 이행도 평가 1위
-2007, 2009년 포브스 경영품질대상 공공 혁신부문, 리더십 부문 대상수상
-환경관리기사, 열관리 기능사 등 국가 자격증 9개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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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양반 동네 능참봉의 셋째 아들>
김문수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시 임고면의 한 촌락에서 태어났다. 경주김씨 집성촌이었다.
김 후보의 본인 표현에 따르면 ‘빚 바랜 양반동네’로 유교 문화가 지배적인 곳이다.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도 서당이었고 김 후보 역시 초등학교 내내 서당에 다니며 ‘사서삼경’ ‘명심보감’을 배웠으며 중·고등학교 때도 고향에 돌아오면 늘 서당에 들렀다.
김 후보는 “고향은 나에게 언제나 사람다움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며 어린 시절의 고향을 회고한다.
‘종손의 책임’을 떠맡은 아버지는 경주 김씨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었다. 김 후보는 아버지를 ‘봉건주의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분’이라고 함축해서 표현한다.
가족보다 문중의 관혼상제를 챙기는 게 우선이었던 김 후보의 아버지는 결국 집안 어른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어린 4남 3녀를 판잣집으로 나앉게 했다.
<학창 시절부터 ‘반듯한 김문수’>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김 후보는 이름 석 자도 쓸 줄 몰랐던 ‘늦된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뒤 늦게 문리가 터져 경주 김씨 ‘문중의 별’로 떠 올랐다.
영천군 부동의 1등이었던 재능을 아까워한 선생님의 격려로 경북중학교에 입학한 김 후보. 이때부터 경북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이어진 김 후보의 길고 가난한 ‘유학’생활이 시작된다.
경북고등학교 시절 김 후보가 활동한 주 무대는 수양동우회. 도산 안창호의 유지를 받들어 이광수가 만든 유서 깊은 조직이었다. 대구지역 연대 서클이었던 수양동우회에서 사회의식을 키웠던 김 후보는 고 3때 소위 3선 개헌 반대를 주도했다.
경찰 조사를 받던 김 후보는 지지 않고 3선 개헌 반대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결국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선비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생긴 ‘반듯한 김문수’의 원형은 이때 만들어졌으리라.
<‘문중의 별’에서 제적당한 ‘운동권 수배자’로>
다행히 대학입시를 몇 개월 남겨놓고 정학이 풀려 ‘문중의 별’은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한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당장 무엇이라도 할 것 같았지만 막상 김 후보는 구멍 난 검정 고무신을 신은 너무나도 가난한 ‘촌놈’일 뿐이었다.
“집이 조금만 넉넉해도 얼마나 여유 있는 대학 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 비참할 정도로 궁핍하다. 벅차다. 너무나” 대학1학년 김 후보의 일기가 당시의 그의 생활고를 잘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분에게 역사적인 막중한 책임이 있다. 이 나라를 위해 함께 나서자!”는 한 선배의 동아리 모집 연설을 들은 김 후보의 심장이 뛰었다. 그길로 사회과학동아리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했다. 길고 긴 운동권 인생의 출발이었다.
완전히 ‘행동하는 운동권’으로 변신한 그는 대학 2학년 때 교련 반대, 한일조약 반대 등에 적극 참여했다가 끝내 제적됐다.
장티푸스에 걸려 고향집에서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연일 피를 쏟고 누워있을 때 날아온 제적 통보. 설상가상으로 곧바로 '징집영장'까지 날아와 김 후보는 국군보안대 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차에 태워져 국군통합병원으로 끌려갔다. 반송장 상태의 김후보를 보고 군의관은 정밀 진단 결정을 내렸고 징집 면제 판정을 받고 풀려난다.
다시 복학 조치가 내려졌지만 학교에 다닐 마음이 사라진 김 후보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방학교를 조직화해 유신반대를 외쳤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두 번의 제적과 두 번 투옥되었다가 김 후보는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다.
<노동자들 속으로..>
노동운동과의 인연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주선으로 구로공단에 취직하면서 시작됐다. 청계천도 그의 활동무대였다. 청계천 노조 간부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 후보는 노동운동 과정에서 기술과 자격증을 중시했다. 열관리 기능사, 환경기사, 전기안전기사, 위험물 취급 기능사, 전기 기계 기능사 등 7년 동안 8개의 자격을 취득한 김 후보. 특히 1975년에 첫 번째로 취득한 열관리 기능사 자격증 덕분에 김후보는 한일 공업에 보일러공으로 취직해 6년을 근무하며 노동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김 후보의 활약으로 한일공업노조는 한국의 대표적인 노조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던 중 김 후보는 출근길에 사복형사 두 명에게 붙잡혀 악명 높았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영장도 없고 구속만료도 없었다.
민주화 분위기 탓으로 다행히 다시 회사로 돌아온 김 후보는 일주일간의 파업을 전개한 끝에 임금 30% 인상을 쟁취하며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김 후보는 노동운동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대원전기, YKK 등 내로라하는 회사들의 파업을 지원하면서 금속노조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김 후보는 소위 정화대상자가 되어 삼청교육대로 가야하는 수배자가 된다. 갈 곳 없는 김 후보가 몸을 숨긴 곳이 세진전자 노조지부장을 지냈던 지금의 부인 설난영 여사의 자취방이었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청춘남녀는 한결 가까워졌고 “만인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한 여자를 못 살리겠느냐”는 김 후보의 적극적인 설득 끝에 설여사에게 결혼승낙을 얻어냈다.
<청첩장 없는 결혼식>
1981년 9월 26일. 서울 봉천동 사거리 밑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에서 원피스를 입은 신부와 뿔테 안경을 쓴 깡마른 신랑이 팔짱을 끼고 동시 입장한다. 웨딩드레스도 청첩장도 없는 김 후보와 설난영 여사의 결혼식이었다.
이날 결혼식장 주변으로 전경버스 다섯 대가 출동했다. 하객보다 경찰이 더 많았던 결혼식. 경찰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시위를 열기 위한 ‘위장 결혼식’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81년 결혼식을 올린 김문수-설난영 부부는 서울대 앞에 사회과학 서점을 열어 15년간 운영했다. 생계는 서점으로 간신히 유지했다. 여전히 김 후보의 활동공간은 노동운동이었다.
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대우어패럴 노조 등 깊숙이 노동 현장에 개입하고 직선제 개헌투쟁을 주도하다 86년 주안역 앞에서 보안사에 붙잡혀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도 수차례 당해야만 했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합법 정당의 창당>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88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나온 김 후보는 혼란스러웠다. 국내는 6.29 선언을 거쳐 대통령선거, 88올림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87년부터 동구권이 무너지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까지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 후보는 진지한 모색 끝에 장기표 등과 함께 민중당을 결성하고 합법적인 정당운동에 나섰다. 불법보다 합법이 힘을 더 발휘하는 시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당은 92년 선거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1% 남짓 지지를 받고 결국 해산된다.
합법정당에서 쓴 맛을 본 김 후보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했던 권인숙씨가 운영하던 노동인권회관을 물려받고 다시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96년 총선은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이 공천 물갈이와 함께 각계의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김 후보에게도 제안이 왔다. 강삼재 기조 실장이 접촉 창구였다. 운동권 출신 중에는 김 후보가 유일했다.
<내 이름은 ‘김결식’>
부천소사에서 출마해 15대,16대,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김 후보의 국회의원 시절, 국회 의원회관 316호 김 후보의 사무실은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결과 김 후보는 매년 국정 감사나 각종 특위, 예결위 등에서 10년 연속 베스트 의원으로 뽑혔다. 2005년에는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 ‘주간한국’ 및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등 3곳에서 김 후보를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했다.
2006년에는 국회 출입기자단에 의해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 ‘일 잘하는 국회의원 1위’에 선정되기도 했던 ‘상복’ 많은 국회의원이었다.
특히 김 후보는 학교 급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어릴 적 죽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랐던 김 후보에게 학교 급식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김후보 자신의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다. 김 후보는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건의하고 당시 신한국당 정책위원회에도 문제를 제기하여 학교 급식 법을 세 번이나 고쳐가며 급식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결식아동 급식 예산비를 삭감하려하자 김 후보가 추경 예산안을 조율 중이던 3당 총무회담을 박차고 들어가 “밥 굶는 아이들에게 왜 밥을 주지 않는가. 아이들이 유권자가 아니라고 이래도 되는 거냐”며 거칠게 항의했던 일은 국회의 전설로 남았다. 그 사건 이후 김후보는 <김결식 의원>으로 불렸다.
<택시 핸들 잡고 ‘김기사’>
민선 4기 경기도 지사로서 김 후보는 이른바 ‘김문수 스타일’로 불리는 ‘현장 ’중심 활동으로 유명하다. 하루에도 몇 곳씩 현장을 찾다보니 4년여 동안 관용차로 23만km를 달렸다. 지구 6바퀴를 돈 셈이다.
“정책은 교과서에 없다. 보고서에도 없다. ‘현장’은 살아있는 보고서이며 교과서다”라고 말하는 김 후보의 못 말리는 ‘현장사랑’은 마침내 그를 ‘김지사’에서 ‘김기사’로 변신하게 했다. “골프를 못 치면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는 충고에도 골프 치는 시간이 아까워 여전히 ‘골프 못 치는 정치인’으로 남은 김 후보는 휴일에 골프 채 대신 택시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쇼하지 마라, 얼마나 갈지 두고보자”는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1년여의 기간 동안 보통 택시 기사와 똑같은 조건에서 택시 영업을 한 김 후보.
하루12시간씩 핸들을 잡고 총 18번 운행하는 동안 26개 시군을 넘나들며 400여명의 경기도민을 만났다. “이보다 깊이 도민들과 만나는 방법을 지금까지 나는 찾지 못했다.”는 김 후보가 택시 운전석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정책 구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대표적인 정책이 GTX 즉, 수도권 광역 급행 철도 건설 계획이다. 최고 시속 200Km로 지하 40미터 이하를 달려 일산에서 강남까지 22분, 강남에서 동탄까지 18분 만에 도착하는 GTX는 경기도 전체를 한 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수도권 교통 혁명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GTX는 수도권을 북경, 상해, 동경권과 경쟁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선수’ 즉, 글로벌 메가시티로 육성해야 한다는 김후보의 비젼과 맥을 같이 하는 구상이다.
<‘수도권 규제’와의 한판승>
“세계는 이미 메가시티 패권 경쟁 시대에 돌입했다. 대한민국의 심장 수도권을 경쟁력 있는 메가시티로 키워야한다”고 말해 온 김후보는 외국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위해 경기도가 선결해야 할 과제는 균형발전의 논리로 50여년간 적용 돼온 ‘수도권 규제 완화’라고 주장해 왔다.
상수원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증설을 막아온 하이닉스 공장의 문제를 풀기 위해 7차례나 현장을 찾고,10차례의 경기도민 결의대회를 열고, 27차례의 공청회와 토론회를 열어 마침내 증설 허가를 받아 낸 일은 김후보의 수도권 규제 완화 의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수도권 규제 완화를 위한 김 후보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은 여의도 면적의 8배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 개발제한 구역 112㎢합리적 조정, 상수원 공장입지 제한거리 대폭 축소라는 소중한 성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복지 패러다임을 바꾼 ‘위기가정 무한돌봄 사업’>
김 후보는 <김결식>이라는 별명답게 복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복지지원정책부문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한 ‘위기가정 무한돌봄사업’이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취약계층을 ‘무제한. 무기한’ 지원하는 복지 서비스로 법과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한 가정들을 ‘선지원. 후심사’를 원칙으로 지원해준다.
단순한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민간의 풍부한 복지 인프라와 연계한 수혜자 중심의 지속적이고 통합적인 지원을 하는 ‘위기가정 무한돌봄 사업’은 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때는 명실상부한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운동가였지만, 사회주의 붕괴를 지켜보며 보수 세력의 한 복판으로 용감히 뛰어든 김문수 경기도지사 후보.
이후 김 후보는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 17대 총선 공천심사위원장을 거치며 치열한 내부 경쟁을 극복하고 보수진영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 잡았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 김문수 경기도지사 후보.
민선 5기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선 김문수의 도전이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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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잣집을 떠돌며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어린시절의 김후보
▲ 김후보가 '봉건주의의 마지막 책임자'라고 표현하는 아버지
▲ 두번의 제적과 두번의 투옥 끝에 25년만에 받은 졸업장
▲ 보일러공으로 취직해 6년간 근무했던 도루코의 노조 위원장 활동 시절
▲ 웨딩드레스도 청첩장도 없었던 김후보와 설난영 여사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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