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신라사회는 내부적 모순이 생겨 붕괴되고 6두품과 호족세력이 대두하였다. 이들 가운데 송악(오늘날 개성) 지방의 호족인 王建이 세력을 확장하여 고려를 세우고(918) 후삼국을 통일(태조 19년, 936)함으로써 분열된 한민족을 다시 통합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지방에는 여전히 독자적 무력과 경제적 기반을 가진 호족세력이 분립하여 나름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는 개국공신이 되어 중앙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이래 역대 임금이 강력한 호족통제와 집권화 정책을 추진한 것은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이었다.
제4대 광종(949~975)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본래 양인이었던 사람을 풀어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956)하여 노비를 많이 가지고 있던 호족들의 경제·군사기반을 약화시키는 한편, 과거제도를 실시(958)하여 새로 뽑은 신진관료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경종(975~981) 때에는 고려시대의 토지제도인 田柴科를 제정(976)하여 모든 관리에게 등급에 따라 토지를 차등 있게 나누어줌으로써 중앙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정책은 제6대 성종(981~997) 때에 이르러 일단락되고, 당의 제도를 본받아 3성 6부제의 중앙정치체제를 갖추었다. 여기에 송의 제도를 채용하여 중추원과 三司를 두었으며, 나중에 都兵馬使와 式目都監과 같은 독자적인 기구를 설치하였다.
한편, 중서문하성의 관직은 2품 이상의 宰臣(省宰 또는 宰相)과 3품 이하의 郎舍(省郎 또는 諫官)로 구분되었는데, 재신은 백관을 총령하고 정책을 의논 결정하였고, 낭사는 간쟁과 서경 등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중서문하성을 宰府라 하고 중추원을 樞府라 하여 두 기관을 합쳐 宰樞 또는 兩府라 하였다. 중추원에는 2품 이상의 추밀이 군기를 관장하고 3품의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일을 맡았다. 고려는 중추원과 함께 삼사를 두었으나 그것은 하나의 재정회계기관에 불과하고 그 기능이나 지위는 낮았다.
고려의 양대 정치기구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인 재추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협의 결정하는 합좌기구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었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군사문제를 관장하였고,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격식문제를 다루는 회의기관으로 역시 유력한 권력기구였는데, 이들은 중국의 제도와는 다른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였다. 특히 도병마사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도평의사사로 개칭되면서 전기의 중서문하성에 대신하여 국가의 모든 정무를 관장하는 최고기구로 발전하여 도당(都堂)이라 불렸다. 이 밖에 중요한 관부로 시정을 논집하고 백관을 규찰·탄핵하는 어사대가 있었다.9)
고려의 중앙관제는 다음 표와 같다.
이와 같은 관제는 무인정권시대와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크게 변했다. 원은 충렬왕 원년(1275)에 고려의 관제가 원의 관제와 유사한 것이 많다는 이유로 고치도록 강요하여 거의 모든 관제가 개편되었다. 이 관제는 권력 교체기인 충렬왕 24년(1298)과 공민왕 5년(1356)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면서 다시 변경되었다.
성종 때부터 고려를 위협하던 거란이 현종 원년(1010)에 40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입하였다가 패퇴한 후 고려에서는 재침입에 대비하고자 군사를 증강하였다. 그 결과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黃甫兪義 등의 건의에 따라 京軍의 영업전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군인들이 불평을 품게 되었다.
마침 상장군 崔質은 邊功으로 무관에는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문관이 되지 못하여 불만이었는데, 위와 같은 불평이 무인들 사이에 있음을 알고 현종 5년(1014)에 땅을 빼앗긴 상장군 金訓 등을 선동하여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밀고 들어갔다. 이들은 이 기세를 이용하여 왕에게 청하여 무관으로서 常參(6품)을 띤 자는 모두 문관을 겸하게 하였으며 어사대를 혁파하고 금오대를 두었다.
이때 고친 관제는 이듬해(현종 6년) 3월에 난이 평정되어 다시 복구되었고, 관원의 명칭 중 대부와 중승은 그대로 두었으나 시어사는 잡단과 시어사헌으로, 전중시어사는 전중시어사헌으로, 감찰어사는 감찰사헌으로 각각 고쳤다. 관부의 명칭은 사헌대라 하였다가 현종 14년(1023)에 다시 어사대라고 고쳤다.
어사대는 문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든 관제를 정비하면서 어사대의 관제도 정비하였다. 그리고 《고려사》와 각종 문헌기록 등에 의하면 어사대는 臺, 臺閣, 憲司, 憲府, 風憲司, 察院, 또는 烏府 등으로도 불렸다.
고려시대의 감사기관은 관제가 변경되면서 그때마다 기관명과 관직명이 일부 변경되었다. 충렬왕 원년(1275)에 관제를 개편할 때 어사대는 감찰사로 바뀌고 그 소속관의 명칭도 바뀌었으며 정원도 감소되었다. 대부는 제헌으로, 중승은 시승으로, 시어사는 시사로, 전중시어사는 전중시사로, 감찰어사는 감찰사로 각각 명칭이 바뀌었고, 판사, 지사와 잡단은 혁파되었다.
충렬왕 24년(1298)에 즉위한 충선왕은 재상의 수가 너무 많아 일이 늦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 감찰사는 사헌부로 개칭되고 그 관원의 명칭도 대부(종2품으로 올림), 중승(종3품으로 올림), 내시사, 전중내시사, 감찰내사로 변경되었으며 주부가 새로 설치되었다. 충선왕 때 고친 관제는 문종 때의 관제로 되돌아간 감이 있었고,10) 이 개혁은 원의 간섭으로 8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충선왕이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된 후 그 해 12월에 관제가 충렬왕 원년의 것으로 환원되었다.
이 관제는 10년 후(1308) 충선왕이 복위하게 되자 또 한 번의 개혁을 맞게 되었다. 이 때 사헌부의 관제는 대부가 대사헌(정2품으로 올림)으로, 중승이 집의(정3품으로 올림)로, 시어사가 장령(종4품으로 올림)으로, 전중시어사가 지평(정5품으로 올림)으로, 감찰어사가 규정(종6품)으로 각각 변경되었다.
원의 세력이 약화되자 원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공민왕 5년(1356)에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에 사헌부도 어사대라 고쳐지고 소속 관원도 대부, 중승, 시어사, 전중시어사, 감찰어사로 바뀌었다.
그 뒤에도 공민왕 11년, 18년, 21년에 3차의 개혁이 있었다. 이것은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억압하기 위하여 등용한 辛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써 그가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관제도 다시 바뀌게 되었다. 이와 함께 어사대도 다시 사헌부로 변경되어 조선시대에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의 감사기관과 대관 변천표는 다음과 같다
어사대부가 정3품(한때는 2품)에 불과한 낮은 품관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직책은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사》 백관지에 의하면 대관은 “掌論執時政 矯正風俗 糾察彈劾之任”이라 하였다. 즉 정책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의 비위를 규찰, 탄핵하는 것이 그 임무였던 것이다.
대관은 관리뿐 아니라 평민, 천민 등 모든 백성을 사정 대상으로 하였다. 즉 대관은 관리의 불법을 규찰하고 관청의 태만을 감찰하며 나아가서 모든 사람의 의례, 복장, 가정생활, 풍속을 감찰하였다. 그 이외에도 대관은 서경권, 관리천거권 등을 가지고 있어서 관원의 임용이나 신원조회에 간여할 수 있었다. 署經에는 관리의 신원조회를 하는 告身署經과 새로운 법제를 심사하는 依牒署經이 있었다. 서경은 1품부터 9품에 이르는 모든 관리들에게 해당되었다.12)
고려시대에는 관리를 임명할 때 문신은 이부에서, 무신은 병부에서 문벌, 경력, 공과 등을 심사하여 후보자를 왕에게 올렸다. 이것을 政案이라고 하며, 왕은 정안을 참고삼아 그 중 한 사람을 落點하였다. 그러면 대관은 이들의 출신가문이 한미한가, 본인에게 허물이 없는가 등을 살펴 결재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고신서경이라 한다. 만일 대관들이 이 임명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관직에 임명하지 못하게 되며 동의할 경우에만 관리로 임명하였다. 의첩서경은 신법을 세우고 구법을 고치는 경우와 상중에 있는 자를 起復하는 경우 대간으로 하여금 의첩에 서경하게 한 후에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대관은 왕의 근신으로서 侍從贊相하는 임무가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임무이자 곧 특권이었다. 신종 2년(1199)까지는 3省(宰府)과 中樞院(樞府)의 양부, 즉 宰樞 외에 대관과 지별고가 시종에 참여하였으나 그 후에는 학사도 시종에 포함되었다.
대관은 또한 관리의 천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지방관의 천거는 주로 대관에 의뢰하였던 것이다. 대관은 지방관을 감찰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으며 각 지방에 파견되어 백성의 질병과 어려움을 살피고 수령의 비위를 규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언어가 엄숙하고 행실이 단정하며 사리에 밝다 하여 사신으로도 종종 파견되었다.
한편 대관은 과거의 고시관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의 시험관을 知貢擧라 하여 당대에 학식이 뛰어나고 덕행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였다. 대관들은 학식이 뛰어나고 덕행이 있는 자들이었으므로 종종 지공거에 임명되었다. 또 대관들은 병마사나 병마부사와 같은 군직을 맡기도 하였다.
대관들은 불체포의 특권도 가지고 있었고, 관리들이 서로 만날 때의 예의 등에도 예외적인 대우를 받았다. 예컨대 공민왕 5년(1356)에 전 호군 林仲甫가 역모를 꾀하였을 때, 어사대부 孫湧을 공모자라 하여 체포하려 하자 지평 全遇祥이 “대관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대관직을 파직한 연후에 감옥에 가는 것이니 그대는 臺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대관을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대관은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군주의 과실이나 백관의 비위를 간쟁·규찰하며, 부당한 조칙은 봉박하고, 인사행정에 있어서 서경권을 행사하고, 관리천거, 지방감찰, 병마권 등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신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대관은 같은 품계의 다른 관리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들은 품계가 낮더라도 華要職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대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거나 일을 잘못 처리한 경우, 체면을 손상시킨 경우에는 그 책임을 엄하게 물었다. 의종 때 재상과 대관 등이 환관 鄭言咸을 권지합문지후로 삼는 부당한 告身에 서명하였다는 이유로 다음 왕인 명종 원년(1171)에 서명자의 자손을 금고에 처한 것을 보면 그 당시 대관의 책임을 얼마나 엄히 추궁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관의 직권은 무신란 이전에는 대체로 정상적으로 운용되었으나 무신란을 겪은 후로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무신란 후 100여 년 간 무신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대관의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 고려의 왕정은 복고되었으나 元의 간섭을 받게 되어 새로운 귀족이 생겨나 원의 세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용하여 정치와 제반사에 관여하였으므로 대관은 역시 많은 시련을 겪게 되고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한편, 사헌부의 가장 하급관원인 감찰어사(후에 규정이라고 칭함)는 10인으로서 판사에서 전중시어사까지 9인으로 구성된 일반 대관과는 다른 직책으로 여겨졌다. 《고려사절요》에 감찰어사의 직능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糾正職은 백관을 규찰하여 임금의 耳目이 되며, 무릇 제사·조회로부터 錢穀의 출납에 이르기까지 모두 監檢하니 品秩은 낮으나 책임은 중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대간으로 하여금 규정을 천거하게 하여 그 직을 수여하시고 그 품질을 높이어 正言의 다음 자리에 오게 해 기강을 진작시키옵소서.”(《高麗史節要》 권33 昌王 즉위년 8월 趙浚 상소)
糾正(감찰어사)은 명칭 그대로 백관의 규찰과 제사·조회·전곡의 출납 등을 감찰하는 것이 그의 본무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구체적인 용례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이 되거니와, 대관의 다른 직권인 시정의 논집이나 서경 등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감찰어사는 이런 점에서 대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대사헌·집의·장령·지평을 臺長이라 하여 감찰과 구별하였다. 고려조에서도 이 같은 구분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에 따라 양자는 집무청도 달리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사실이긴 하지만 일반 대관들은 각기 대청·집의청·대장청 등에 소속되어 齊坐日에는 齊坐廳에 모여 일을 처리한 반면에 감찰들은 감찰방을 따로이 마련하고 있었다. 고려의 어사대도 전자와 같은 각각의 집무처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과 동일한 조직의 감찰방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13)
고려에도 淸要職이 있었다. 청요직에는 신분과 가문이 좋은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어사대의 대관과 중서문하성의 낭사, 이부와 병부 및 한림원 등에 근무하는 學士나 制詞를 기초하는 임무를 맡은 知制誥 등이 청요직에 해당하였다.
고려와 같은 귀족제사회에서는 가문과 문벌이 사회적 신분을 정하고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특히 어사대의 관원은 대부분 귀족가문에서 진출하였다. 고려 초기의 대표적 집안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경원 李씨와 해주 崔씨·철원 崔씨의 대간직 진출 상황을 보면, 이 세 가문에서 41명이 대간직에 진출하여 전체 관직에 진출한 사람의 50% 정도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인정권시대와 고려 후기에 부분적인 신분상의 혼란이 있었으나 여전히 대관은 좋은 가문 출신에서 나왔다.14)
고려사회는 신분사회이었고 천인계 출신이라든지 허물이 있는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대관은 世家 출신에서 나오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대관은 신분, 능력, 성격 등 여러 면을 고려하여 엄선되었으므로 한 가지라도 미흡한 점이 있으면 대관으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첫째, 하층민의 거주지역인 部曲 출신과 탐라 출신, 승려의 자손은 대관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또한 자신의 신분뿐만 아니라 처가의 신분도 문제가 되어 처가 婢妾의 소생이거나 부곡 출신이면 대관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둘째, 성격이 조급하거나 諧言灰戱謔(익살스럽거나 실없는 말로 하는 농짓거리)을 잘하면 대관에 임용되지 못하였고 또 행실이 불미한 사람도 대관이 될 수 없었다.
셋째, 능력과 경력도 문제가 되었다. 즉 벼슬살이하면서 성적이 없던 사람은 임용될 수 없었고 탄핵받은 사람도 임용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제약 이외에 직무상에서 오는 제약도 있었다.
첫째, 왕의 인척이나 외척은 대관이 될 수 없었다.
둘째, 왕명의 출납을 맡고 있는 승선은 대관을 겸할 수 없었다. 이는 임무가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으므로 정실 관계를 염려하여 배제한 것이다.
셋째, 관리들이 일정 범위 내의 친척관계에 있으면 대관직에 함께 재임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대관이 되려면 많은 제약이 따랐으며 대관으로 재직시에도 다른 관직보다 높은 청렴성과 적극적인 업무처리 자세가 요구되었다. 그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 대관에 임명될 수 없었던 신분
○ 고종 38년(1251)에 孫玔은 처의 派系가 왕의 서족이어서 대관 등을 제수받을 수 없게 되자 처가 말하기를 “제가 천한 태생이므로 유림 청요직을 받지 못하니 청컨대 저를 버리시고 다른 세가와 혼인하소서” 하였으나,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 하여 끝내 듣지 않았다.
○ 全英甫는 본래 帝釋院의 노예 출신으로 대장군, 밀직부사 등을 거쳐 충숙왕 8년(1321)에 지밀직사사 겸대사헌으로 전보되자, 대관들은 문을 닫고 그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는 노예 출신이 대사헌에 임명된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 우왕 원년(1375)에 외척인 韓略을 대관에 임명하려고 하였는데, 외척은 제수할 수 없다는 慶復興의 간언으로 제수하지 못하였다.
② 사헌부 내 상급자의 잘못도 비난
○ 충렬왕 원년(1275) 12월에 감찰사에서 그 기관 책임자인 감찰제헌 許珙을 탄핵하였다. 이는 허공이 아내가 죽은 후에 자기 집에서 양육하던 이질녀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 공민왕 21년(1372) 2월에 사헌부의 규정 林台達 등이 臺長인 柳源, 安景, 金存誠, 崔斯正에 관하여 공사간의 생활에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라 하여 업신여기고, 규정방의 벽에 “存誠(김존성)은 無誠(誠意 없음)이요, 斯正(최사정)은 不正(私情과 관련지음)이요, 柳源은 似猿(원숭이 같음)이요, 安景은 眞犬(발음을 이용함)이다”고 낙서했다.
대사헌 權鎬가 이 사실을 계품하니, 왕은 그 방주 임태달과 유사인 許溫을 순위부에 가두고 고문하여 낙서자를 추문하였다. 허온이 모진 매를 참지 못하여 전 규정 任獻이라고 실토했으므로 관련 있는 규정 모두를 귀양 보냈다. 다만 이때 그 대장들은 어떤 조사와 조치를 받았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렇게 임명된 대관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물러나거나 면직되었다.
첫째, 이들은 세 번 간하여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사직하고 물러났다.
둘째, 대관들이 그의 직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하여 물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극히 드물었다.
셋째, 청렴하지 못하거나 대관의 체면을 잃었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강력히 자체 숙청하였다.
한편 《고려사》에 의하면 어사대의 관원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동은 있다 하더라도, 문종조를 기준으로 하여 보면 대부 1인(정3품)·중승 1인(종4품)·시어사 2인(종5품)·전중시어사 2인(정6품)·감찰어사 10인(종6품)에다 판사 1인(정3품 : 대부상)·지사 1인(종4품 : 중승상)·잡단 1인(종5품)이 증치된, 도합 8직 19인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감찰어사를 제외하더라도 대관은 7직 9인이 된다. 이는 고려라는 국가규모로 볼 때 어느 왕조보다도 많은 수였다.(조선은 4직 6인, 당은 4직 13인, 송은 4직 5인)15)
그리고 고려는 전시과를 실시하고 있었다. 태조 23년(940)에 役分田을 제정하여 개국공로와 충성도 등을 기준으로 한 논공행상적인 급전제를 시행하다가 경종 원년(976)에 비로소 전시과를 제정하였으나 역분전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직과 산직을 구별치 않고 인물 위주로 토지를 지급하였다. 그 후 목종 원년(998)에 비로소 성종 때의 관제를 기준으로 관직 고하에 따라 18과로 구분,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대관에게도 고려의 다른 문무백관과 마찬가지로 전시과가 지급되었다. 《고려사》 식화지 전시과조에 의하면 문종 30년(1076)에 대관에게 지급한 전시과는 다음과 같다.17)
문무관들에게는 전시과 이외에 문종 30년(1076)에 녹봉제를 제정하여 祿米를 지급하였다. 인종 때에 어사대 관원에게 지급한 녹봉은 어사대부 300석, 어사중승 200석, 시어사 93.05석, 전중시어사 76.10석, 감찰어사 66.10석이었다.
時政의 論執은 당시의 政事, 즉 현실정치나 시책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말하며 군주, 백관과 더불어 정치, 경제, 행정, 군사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① 절의 건축공사를 농한기에 하도록 건의
문종 2년(1048) 2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지금 파종이 시작되었는데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으니 매우 걱정된다. 병술년에 대사령을 내리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라고 하였는데 응당 집행해야 할 것 중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빨리 해당 부서로 하여금 집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어사대에서 규찰한 결과 대운사와 대안사의 건축공사가 한창 벌어져 청장년들이 많이 동원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달(3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절간 건축에 청장년과 목수들이 동원되어 폐농할 지경입니다. 한 사람의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굶주리는 사람이 반드시 생기는 법인데 어찌 세 철(봄, 여름, 가을)의 농사시기를 놓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대사령을 내리실 때에 ‘일체 토목공사는 3년간 정지하라’ 하셨으므로 백성들이 그 말씀을 감사히 여기고 기뻐하였는데, 결국은 그것이 실행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나라의 큰 보배이며, 식언한다는 비방이 이로 인하여 일어날 염려가 있사오니, 두 절의 공사를 농한기로 미루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깊이 깨닫고 이 건의를 좇았다.
② 성 축조를 추수가 끝난 후에 하도록 건의
문종 7년(1053) 8월 하천 범람으로 羅城(開京의 外城) 동남쪽이 허물어졌다. 왕이 “나성 동남쪽 江岸을 높인 것은 개경 지세의 허술한 곳을 막기 위해서인데 제방이 허물어졌으므로 3~4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이를 수축하라”고 상서공부에 명령하였다.
며칠 후 어사대에서 “강변 일대가 모두 전답이므로 농작물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사오니 추수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고 아뢰었으며 왕이 이 건의에 따랐다.
③ 관리 감원과 평상시 장병훈련을 건의
공민왕 11년(1362) 6월 감찰사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큰 난리를 치른 후로 公私의 재물이 떨어졌으니 이는 심히 염려할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행차를 따라갔던 관원들에게 한 달에 지급하는 쌀이 삼천여 석에 달하며, 조정 관리들과 衛士들에게 주는 곡식도 줄일 수가 없습니다. 그 위에 환관들은 정한 액수가 없어서 곡식을 소비하는 것이 너무 많으니 그들 가운데 복무하는 자 외에는 모두 도태하소서.
또한 해마다 연달아 적병이 침입하는데 군사가 단합되지 않아서 위급할 때마다 농촌에서 군사를 모으는 것은 백성을 소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창졸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장병을 뽑아서 훈련시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소서.”
④ 정치, 행정 전반에 대한 개선을 권고
공민왕 11년(1362) 10월에 지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왕이 자연의 재해와 관련하여 時政의 득실과 민간의 이해 등에 관하여 바른 언론을 구하니 감찰대부 金續命이 진언하였다.
“옛말에 ‘임금이 영명하고 신하가 현량하면 모든 일이 편안할 것이요, 임금이 소소한 일에만 관심을 두면 신하가 나태하여 만사가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환관이나 승려들의 말을 곧이들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전하의 의견과 맞아야 시행하시므로 대신들까지도 입을 열기 전에 전하의 뜻을 살피게 되어 아첨이 버릇이 되었고 바른말을 하는 길이 끊어졌는바, 이는 훌륭한 정치에 있어 큰 결함입니다.
땅은 臣道의 표상입니다. 지금 신도가 어지러워져서 지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상벌을 엄격히 하고 국가의 관직을 고귀하게 취급하시기 바랍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토지를 넓게 차지하는 것을 경계하시고, 군인에게 밭을 주는 법을 다시 실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환관이 너무 많아 비루하고 속되고 황당한 말을 많이 하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있는 것은 이런 허물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세 궁에 환관을 각기 10인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도태할 것이며, 바른 사람과 단정한 선비들로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게 하소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經書》와 《史記》에 있음에도 불교를 지나치게 믿으십니다. 지금부터 중들이 궁중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경연을 열고 정치하는 방도를 물으며 항상 성현의 글을 보시고 이단의 망령된 말에 속지 말 것입니다.
지방에서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대간과 政曹가 면목과 정실에 얽매어 글자를 모르는 자까지 천거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반드시 그 사람을 불러 보신 후 부적격자로 인정되시면 ‘추천한 자’를 처벌할 것입니다.
傳에 말하기를 ‘大赦令이 없는 나라는 그 정치가 공평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수재와 한재가 자주 발생한 것은 죄인을 자주 용서한 까닭입니다. 지금부터는 죄 있는 자를 용서하여 간악한 자를 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진언의 마지막 부분, 즉 왕이 자주 사면하는 폐단을 말했을 때 왕이 김속명을 힐책하였는데, 대간들이 면대하고 힘껏 간하였으므로 왕이 대단히 노하였다. 그때 지도첨의 柳淑이 나와서 말씀드리기를 “바른말을 구하시고도 바른말에 대해 노하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였다. 이에 왕의 노여움이 다소 누그러졌다.
⑤ 사헌부에서 인사행정을 공정하게 하도록 건의
우왕 9년(1383) 3월에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인사행정을 공정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근속 연수의 장단과 공로의 많고 적음에 따라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근래에는 분주하게 경쟁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관작이 날로 천해지니, 정밀히 검찰하여 차례에 따라 서용하는 등으로 인사행정을 공정히 하소서.
근래에는 간사하거나 아첨하고 사나운 무리가 권력가에 붙어서 수령이 되어 불법을 행하므로 주·부·군·현이 날로 피폐하여지니 대간과 6조에서 청렴한 자를 추천케 하여 임용하되, 만일 잘못 천거한 것이 있으면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 미치게 하소서.”
왕이 이 건의를 받아들여 분경(인사를 관장하는 대신의 집을 찾아가 엽관운동 함)을 금지하였다.
⑥ 대사헌 조준이 사전 개혁을 주장
대사헌 조준은 창왕 때 주장한 사전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 공양왕 원년(1389) 8월에도 다음과 같이 사전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私田은 개인에게 이익되고 나라에는 이익됨이 없으며, 공전은 국가에도 이익되고 개인에게도 편의합니다. 개인에게 이익이 되면 겸병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용도가 부족하게 되며, 국가에 이익되면 창고가 충실하게 되고 송사가 줄어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 (중략) … 마땅히 경기의 땅으로 왕실을 보위하는 사대부의 전지로 삼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혁·제거하여 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녹봉과 軍需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며,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을 근절시키는 영원한 법을 정하소서.”
왕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그 후 사전의 개혁으로 기득권층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개국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糾察·彈劾은 백관의 근태와 직무수행 내용뿐만 아니라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감찰한 후 비위나 불법 등이 발견된 경우에 탄핵하는 것을 말한다. 적을 막지 못한 군인이나 일식·월식을 미리 아뢰지 못한 日官 등과 같이 자기의 직무상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거나 조회에서의 실례, 개인생활에서 불미했던 일에 이르기까지 관리로서의 체통과 품위를 잃은 모든 행실에 대해 탄핵하였다.20)
이처럼 대관들은 모든 관료를 대상으로 탄핵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국문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그들은 法司로서의 기능도 담당했던 것이다.
① 무사안일하게 적과 싸운 군인을 파면
고종 4년(1217) 6월 어사대에서 상소하기를 “鄭邦輔와 趙沖은 적을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여 싸우려 하지 않고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 사졸을 함몰케 했습니다. 또한 역대로 전해오는 병서와 문적을 위시하여 병기 등 물건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으니 관직을 파면하소서” 하였다. 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어사대에서 다시 상소하니 왕이 하는 수 없이 좇았다.
② 일식을 보고하지 않은 일관을 파면
문종 원년(1047) 3월 을해일에 日食이 있었는데 이에 관한 사전 보고가 없었다.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전례에 일식이나 월식이 있으면 태사국에서 미리 위에 아뢰어 中外에 알도록 하게 하며, 洞社(土地神에게 제사하던 곳)에서 북을 울리고, 왕은 흰 옷을 입고 正殿을 피하며, 백관은 흰 옷을 입고 각각 자기 부서를 지키며 해를 향하여 두 손을 잡고 서서 해가 다시 밝아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지금 춘관정 柳彭과 태사승 柳得詔 등이 天象(하늘의 운행하는 모습)에 어두워 미리 아뢰지 못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이 “용서하라” 하였으나, 어사대에서 논박하였다.
“일식과 월식은 陰陽의 常度로서 曆算이 틀림없으므로 쉽게 알 수 있는 것임에도 그들은 그 관직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오니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이 논박을 받아들여 유팽 등을 파직하였다.
③ 양민을 노비로 선물한 사람을 조사
목종 10년(1007) 7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경주 사람 融大가 거짓으로 원성왕의 遠孫이라 일컬으면서 양민 5백여 명을 저의 노비라 하면서 궁인 金氏, 평장사 韓藺卿 및 이부시랑 金諾에게 선물로 제공하고는 후원자를 삼았는데, 심문하여 본 결과 사실임이 밝혀졌사오니 모두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노하여 융대를 죽이고, 한인경을 양주로 귀양 보냈으며, 김낙은 섬으로 귀양 보내는 한편 김씨는 銅 100근을 벌금으로 내게 하였다. 이 사실을 듣는 사람마다 어사대에서 어려운 일을 처리하였다면서 모두 치하하였다.
④ 어사대에서 미결사범 및 고발사항 처리에 관여
숙종 원년(1096) 4월에 중서성에서 아뢰기를 “지금은 만물을 가꾸어야 할 시기가 되었음에도 3월 이후로 기후가 잘못되어 물이 얼고 서리가 내리며 밤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이는 옥에 갇힌 사람 중에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차서 화기가 재앙으로 변한 듯합니다. 성상께서는 어사대와 상서형부에 명령하여 모든 옥사로서 미결상태에 있는 것을 신속하고 정당하게 처결하여 억울함이 없게 하고, 고발한 것이 사실과 틀릴 때에는 무고한 자는 모두 反坐(무고한 자에게 그가 빠뜨리려던 죄목으로 처결하는 것)하도록 하시어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소서. 그리하면 백성들이 서로 기뻐할 것이고 재앙이 복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건의를 채택하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
⑤ 정부 창고의 쌀을 횡령한 관원을 조사 처리
신종 4년(1201) 7월에 도재고의 어사인 낭장 盧彦叔이 권력 있는 고관의 부탁이라는 구실로 서리와 더불어 창고에 있는 쌀 여러 섬을 도둑질하여 꺼내 갔다. 창고를 지키고 있던 장교의 보고로 이 문제가 어사대에 회부되었다.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으므로, 그들이 훔쳐낸 쌀은 모두 거두어들이고 노언숙과 창고 서리 등 관계책임자 20여 명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대관이 풍속의 矯正을 맡았으므로 어사대는 의례·복장·가정생활·민간의 풍습이 법도에 어긋나거나 양속을 해치는 사항이 있으면 처벌을 하는 한편 이를 바로잡아 건전한 사회기풍 조성에 힘썼다.
① 관리가 길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을 금지
문무양반의 관원과 이속이 조정의 문이나 거리 등 공적인 장소에서 만났을 때 엎드려 절하는 관습이 있었다. 현종 14년(1023) 5월에 어사대에서 왕에게 건의하여 백관이 조회에서 무릎을 꿇고 사사로이 속삭이는 것, 조정의 의식이 예의를 잃은 것, 길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 등을 금하는 금령을 내렸다.
현종 16년(1025) 4월에 예부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삼가 《禮記》를 상고하건대 군자는 예를 행함에 풍속을 고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만약 어사대의 격식과 같이 한다면 어찌 상하와 장유의 서차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과 묘사의 반열 이외의 경우는 私禮로서 적당하게 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왕이 예부의 건의를 채택하여 사헌부의 금령을 폐지하도록 하였다.
그 후 이 문제는 오랫동안 재론되지 않다가, 원종 원년(1260) 8월에 중서성에서 “조정 선비들이 3품 관원을 보면 말 앞에서 절하는 등 아첨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으니 이를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래도 개선되지 않았는데 충렬왕 9년(1283) 2월 감찰사에서 왕의 재가를 받아 “양반 관원이 일가 어른 아닌 권세가나 귀족에게 길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을 금한다”고 방을 붙임으로써 금령의 효력을 발하게 되었다.
② 왕의 총희가 지은 호화주택을 허물도록 건의
魏繼廷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선종 때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그는 청백하고 검소하며 원만하고 정직했으며 특히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선종(1083~1094)이 총애하던 첩 萬春이 집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는데,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사중승 위계정이 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만춘은 주상을 기만하고 유혹하고 백성들에게 괴로운 부역을 부과하여 자기 집을 대규모로 신축하였으니, 그것을 허물어버리기 바랍니다.”
왕은 위계정의 직간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의 인품과 강직함을 사랑하여 얼마 후 추밀승선에 임명하였다. 연등행사 하던 날 밤에 왕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왕이 위계정에게 춤을 추라고 권했다. 이때 그는 “광대(伶人)가 있는데 어찌하여 저에게 춤을 추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이를 사양하니, 왕도 강요하지 못하였다.
③ 어사대에서 사치한 식생활을 규찰
숙종 원년(1096) 정월에 임금이 교서를 내려 식생활의 규찰을 지시하였다.
“짐이 선왕의 검소하심을 본받고자 음식의 수를 줄이고 부당한 기욕을 억제하여 왔다. 듣건대 요즈음 서울과 지방의 풍속을 보면 사치한 생활을 좋아함이 한도가 없어서 음식을 먹는데도 가짓수가 너무 많다고 하니 미풍양속을 문란케 하는 이런 현상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제부터 등급을 정하여 시행케 하고, 어사대에서는 이를 규찰하라.”
④ 쌀에 모래나 벼를 섞는 상인을 처벌
명종 11년(1181) 7월에 대간 등이 경시서에 모여서 말[斗]과 곡[斛]들을 검사하고 간교한 상인들이 있는지를 검찰하였다. 이는 시장 상인들이 쌀말에 모래와 겨를 섞어서 팔곤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 시장의 물가를 정하고 말과 곡의 용량을 고르게 하고, 위반하는 자는 섬에 귀양 보내기로 하였다.
그 후 명종 23년(1193) 3월에 어사대에서 상인이 벼를 쌀에 섞어서 잡미라고 부르는 것을 금하였다. 앞서 쌀에 모래나 겨를 섞어 팔지 못하게 하니 그 후 쌀에 벼를 섞어서 파는 상인이 많이 나타났으므로 이와 같은 금령을 내린 것이다.
⑤ 승려의 사기행위를 조사 처리
충선왕 5년(1313) 2월에 중 曉可가 사기행위를 하였다 하여 사헌부에서 잡아다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에 앞서 효가는 스스로 도통하였다고 하면서 요술로 부녀자를 미혹케 하였다. 그는 꿀물과 쌀가루를 혼합한 것을 사람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감로, 사리라 하는 것으로 모두 나의 몸에서 나온 것이다” 하며 선전했다. 사람들은 거짓인 줄을 모르고 그 물을 마시거나 저장하곤 하였다.
또 효가는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굴 위에 올라앉아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육체를 茶毘(불교에서 시체를 태우는 의식)한 후에 7일 만에 부처가 되어 나타나리라” 하면서 땔나무에 불을 붙이게 하니 연기와 화염이 충천하였다. 이때 효가는 굴 속으로 굴러들어가서 감과 밤을 먹으며 약속일까지 지내다가 불탄 잿가루를 헤치고 나왔다.
사헌부에서 그 사기 행동을 알아채고 문초한 결과, 사실로 자백하였으므로 옥에 가둔 것이다.
⑥ 풍속에 관한 금령을 발령
공민왕 10년(1361) 5월에 어사대에서 아뢰었다.
“불교는 밝고 깨끗한 것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들이 죄받거나 복받는다는 허황된 말로 과부들과 부모 없는 딸들을 속여 유인하는가 하면, 머리를 깎게 하고 雜居하며 음탕한 욕심을 누리곤 합니다. 또한 사대부와 종실집에까지 다니며 불공하기를 권하며 산속에 유숙시켜 추한 소문이 나고 풍속을 더럽히니, 지금부터는 이런 일을 일체 금하고 어기는 자를 벌 주소서.”
왕이 이를 채택하여 금령을 발령하였다.
다음달(6월)에 어사대에서 왕의 재가를 받아 사람들이 흰 옷과 흰 갓을 쓰는 것을 금하였고, 또 중이 시가로 들어오는 것도 금했다.
그 후 공민왕 17년(1368) 5월에는 감찰사(어사대의 변경된 명칭)에서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자매와 결혼하는 것과 姓이 다른 6촌 이내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령을 발령하였다.
간쟁은 국정의 최고책임자이고 절대권자인 국왕의 잘못된 행위나 상도에 벗어난 언동과 처분 등에 대하여 언론하는 것으로 그 방법과 정도에 따라 풍간, 순간, 직간, 쟁간, 함간의 5종으로 나눌 수 있다. 諷諫은 사실을 돌려서 비유해 간하는 것, 順諫은 말을 공손히 하여 군주의 마음을 거슬리지 않고 간하는 것, 直諫은 정면으로 간하는 것, 爭諫은 시비를 쟁론하여 군주가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 陷諫은 일신의 생명까지 내걸고 간하는 것을 말한다.
대관은 공사를 막론하고 상도에 벗어난 군주의 모든 언동과 처사에 대하여 간쟁하였고 군주는 이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封駁은 군왕의 부당한 처사나 詔勅을 봉환하여 駁正하는 것이며, 조서나 처사의 내용을 봉함하여 되돌린다는 뜻에서 봉환이라 하며 거기에 잇대어 반박하는 의견을 내게 될 때에는 봉박이 된다. 그러므로 봉박은 일종의 거부권과 같다. 그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 왕에게 잘못 임명한 관원의 파직을 요구
문종 원년(1047) 8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얼마 전에 李希老와 洪德威에게 감찰어사를 제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희로는 성품이 조급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는데도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이 없었고, 홍덕위는 정종의 喪服을 채 벗기도 전인 관등절날의 저녁에 위위주부 徐懃宜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려 제 마음껏 즐김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지라 그들은 風憲의 관직인 감찰어사에 마땅치 않으니, 청컨대 그 직에서 파직하소서” 하였다. 처음에는 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는데, 어사대에서 바른말로 재차 박절하게 아뢰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아 그들을 파직하였다.
② 왕에게 직책에 적합한 관원을 임명하도록 요구
裴景誠이 承宣(왕명을 출납)으로 있을 때 창녀를 아내로 삼자, 간관이 왕에게 고했다.
“배경성의 집안 행실이 이와 같으니 왕명출납의 직임을 계속 맡기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리하여 인종 21년(1143) 9월에 왕이 그를 지어사대사로 고쳐 임명하니, 간관들이 말하기를 “대관의 직책을 맡기는 것은 더욱 부당합니다” 하였다. 왕은 그를 지이부사로 임명하였다.
③ 궁중 관원과 왕의 측근에 대해 감원 요구
명종 8년(1178) 3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내시와 茶房(궁중에서 약을 조제하던 관서)의 경우 정원이 초과되었으니 인원을 줄이소서” 하니 왕이 명령을 내려 내시 林正植 등 12인과 다방 6인을 줄였다.
이렇게 감원하였어도 近臣(왕의 곁에서 모시는 신하)이 너무 많다고 추가로 감원하여 그 인원을 각 官司에 보충할 것을 명종 18년(1188) 11월 어사대에서 청하였다. 이때 왕이 조서를 내리기를 “大臣들의 자제는 비록 부지런하고 근신하지 않더라도 경솔히 내보낼 수 없으며, 권세가 없는 자는 내보낼 수 있으나 모두가 법을 두려워하여 나랏일에 힘쓰고 있으니 그들을 제외하고는 다시 일을 시킬 사람이 없다” 하면서 윤허치 않았다.
④ 왕이 환관을 관리로 임명한 것을 봉박
李公升(1099~1183)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올라 의종 2년(1148) 11월에 사신으로 금나라에 갔다. 당시 금나라에 가는 사람은 부하 군인들로부터 1인당 은 1근씩 받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이를 한푼도 받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에 감복하였다. 왕이 하루는 달밤에 청녕재에서 놀다가 이공승을 지목하여 “가을 달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없는 것이 마치 이공승의 가슴속과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의종 5년(1151) 윤4월에 환관 鄭言咸(왕의 乳母의 남편)이 권지합문지후로 임명되어 서각대(犀角帶)를 띠고 왕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어사잡단 이작승이 이에 분개하여 어사대의 서리 이빈을 시켜 그 각대를 빼앗게 하였다. 정함이 왕의 하사품이라고 하면서 주지 않으려 하니, 이빈이 강제로 빼앗았다.
정함이 이를 왕에게 호소하자 왕이 대노하여 내시 李成允에게 명하여 이빈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빈은 어사대의 안으로 뛰어들어갔으므로 어사대의 다른 아전 閔孝旌을 잡아 구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관들은 정함에 대한 임명을 거둘 것을 청하고 집무를 거부하면서 간쟁하였으며, 드디어는 왕이 정함의 합문지후 임명을 거두었다.
그런데 의종 11년(1157) 4월에 환관 정함을 권지합문지후에 복직시키고 告身(任命狀)에 서명하도록 대간에게 지시하였다. 이 임명에 대간들이 반대하였으나 결국은 고신에 평장사 최윤의를 비롯하여 우간의로 있던 이공승도 서명하였다.
그 후 정함은 권세와 세도가 날로 대단하여져서 의기양양하여 참소를 꾸며 조정의 신하들을 능멸하고 여염을 침범하여 이득을 취했다. 그리고 그가 거처하는 저택을 100여 칸으로 지었는데, 누각이 높이 치솟고 금벽단청을 황홀하게 하여 궁궐에 견줄 지경이었다.
이공승은 그 후 지어사대사에 임명되었는데 왕은 의종 12년(1158) 7월에 정함의 관직을 파면하였다가 같은 해(1158) 9월에 다시 권지합문지후로 임명하려 하자 서경에 응하지 않았다. 왕이 이공승과 중승 宋淸允, 시어사 吳中正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정함은 과인이 강보 속에 있을 때부터 과인을 위해 고생하고 보호하며 길러서 오늘에 이르렀다. 만약 서명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니 다 죽여서 젓을 담가버리겠다” 하였다.
이에 송청윤 등은 부복하여 땀을 흘렸으나, 유독 이공승만은 뜻을 받들지 않았다. 왕이 꾸짖기를 “네가 전번 간관으로 있을 때에는 서명하고도 이번에는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 이공승이 대답하기를 “제가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은 까닭에 복종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칙명으로 이공승을 견책하고, 집으로 물러나 있게 하였다.
⑤ 왕의 음행을 직간
충렬왕 34년(1308) 7월에 왕이 신효사에서 사망하였다. 왕의 유지에 따라 원에서 심양왕이 10여 일을 밤낮으로 달려와 奠祭를 행한 후 수령궁에서 왕위에 즉위했으니, 이분이 충선왕이다.
그 해 10월에 충선왕이 빈전에 제사드린 후 金文衍의 집에 거동하여 父王(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숙창원비를 강간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감찰규정 禹倬이 흰 옷을 입고 도끼를 갖고 대궐에 나아가 거적을 묶어놓고 글을 올려 왕의 난행을 강력히 간하였다. 이때 近臣이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 높여 말하기를 “그대는 근신이 되어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첨만 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소. 그대는 그 죄를 아시오?” 하니 좌우 신하들은 두려워 몸을 떨고 왕은 부끄러워하였다.
서경은 告身과 依牒에 대한 서경이 있었다. 고신서경은 문무백관의 고신, 즉 임명장에 서명하는 것을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5품 이하의 당하관에 국한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든 관료는 대관과 간관의 서경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법령의 개폐 등에도 대간의 서경을 받도록 하였으며 이것이 의첩서경이다. 서경제도를 설치한 근본 취지는 어떤 법령이나 인사문제가 국왕에 의하여 일단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대간들로 하여금 다시 심사하게 하여 부당한 인사나 일처리를 막아보려는 데 있었다.
① 대관이 부적격자의 관원 임명장에 서명을 거부
崔琬은 일찍이 아버지의 喪事를 숨기고 과거를 보았으며, 과거 급제 후 수주참군이 되었다. 그는 수주에서 음란한 행실로 사람들의 배격을 받았는데,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여 성균학록의 벼슬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관 申君平(공민왕 때 어사대부가 됨)은 최완의 고신에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② 뇌물로 임명받은 관리의 고신에 서명을 거부
尹賢은 전법사의 관속으로 기용되어 승진하여 전법좌랑으로 임명되었는데, 뇌물로 布 150필을 받고 죄수를 석방한 것이 탄로났다. 충숙왕 후4년(1335) 4월에 사헌부에서 그 죄를 탄핵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때는 批目(왕의 명령서)이 내려온 지 이틀 후였다. 윤현은 환관과 공모하여 그 탄핵을 가라앉히고 비목을 가져다가 持平에 임명토록 기재된 李孫寶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을 써 넣었다.
이때에는 왕이 우문군 梁載와 낭장 曹莘卿에게 銓注(人事)를 맡겼는데, 그들은 멋대로 관리를 임명하였으므로 뇌물을 주고 벼슬을 얻은 자가 1백여 인에 달했음에도 왕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적격자 가운데는 위 지평 윤현 외에도 정승 姜融, 찬성사 蔡河中, 회의군 崔老成, 좌대언 曹莘卿, 원윤 申時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관 申君平이 이들의 고신에 모두 서명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그들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다. 한편 신군평이 파면된 다음날 장령 朴元桂가 그 고신들에 모두 서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박원계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던 고려시대의 사헌부에서는 포상을 건의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고려 말에 이르러 우왕 때에 포상 건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조선초에는 한때 포상건의가 사헌부의 임무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① 명나라에 간 사신의 국익수호 행적을 두고 포상 건의
우왕 11년(1385) 5월에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판사 孫用珍이 사신으로 京師(明나라 서울을 의미)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일을 의심하고 국문하였습니다. 손용진은 나라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죽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충의는 찬양할 만하니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주는 동시에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소서” 하니, 왕이 이 건의를 좇았다.
② 적과 싸워 나라에 공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 건의
우왕 2년(1376) 10월에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지난번 瀋王(王暠를 의미함)의 事變(우왕 원년 8월에 발생)에 재상들이 합심하여 주요 방침을 토의 결정하고, 여러 장수들이 충의를 분발하여 적은 수의 군대로 밤낮을 이어 달려가서 맞아 싸워 적을 물리침으로써 온 나라를 평안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에 대하여 포상하지 않았으니 공을 평정하여 상을 주소서.”
직접이동
1. 고려시대의 관제
2. 고려시대의 감사제도
3. 고려시대 대관의 활동
4. 대관 등의 지방 파견
5. 고려시대의 훌륭한 대관들
고려시대에는 성종 2년(983)에 이르러 지방에 12목이 설치되고 처음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 후 몇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한 뒤 현종 9년(1018)에 4도호·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의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지방제도의 정비가 진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약 500개의 군·현이 존재하였지만 모든 군·현에 외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전기에는 수령이 파견된 主縣이 130개였는 데 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374개나 되었으니, 아직도 중앙통치력의 지방침투가 불완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속현들은 수령이 설치된 주현에 예속되어 중앙의 간접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고려중기부터는 界首官에 대신하여 중앙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기구로서 5도와 양계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즉 북부지방에는 양계, 남부지방에는 5도를 설치하고 양계에는 병마사·5도에는 안찰사를 각각 파견하여 소관의 군현을 통할하게 하였다.21)
고려초부터 북진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고려는 국경지대의 양계와 서경을 특히 중요하게 여겨, 어사대에서 분대라는 상설의 감찰기관을 이곳에 두었다. 특히 성종 9년(990)에 당제를 본받아 사헌 1인을 서경에 보내 활동하도록 함으로써 처음으로 중앙에 설치되었던 감찰기관이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서경 분대의 조직과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22)
○ 성종 12년(993) 서경에 常平會를 설치하고 쌀의 출납을 분대가 관장하도록 하였다.
○ 문종 원년(1047) 서경의 監軍과 分司御史가 猛·海軍 10領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 인종 14년(1136) 兩府의 대신에게 서경 官班의 연혁을 의정케 한바 감군과 분사어사대를 그대로 두고 나머지 관원은 정원을 감하여 없앴다.
○ 고종 19년(1232) 서경순무사·대장군 閔曦와 사록 崔滋溫이 비밀리에 達魯花赤을 모살하려 하였는데 몽고군사의 보복을 두려워한 서경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최자온을 잡아 가두자 유수, 판관, 分臺御史와 6曹員 등이 모두 저도로 도피하였다.
서경 이외에 양계(북계·동계)에도 분대가 설치되었다.
○ 林景軾은 대부사승·권지감찰어사에 제배된 후 얼마 있다가 북계분대로 옮겼다.
○ 고종 6년(1219) “의주별장 韓恂 등이 방수장군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원수라 칭하면서 監倉使와 대관을 署置하였다”고 서북면병마사가 보고하였다.
○ 고종 18년(1231) 북계분대어사 민희가 돌아와 아뢰었다.
○ 고종 44년(1257) 동북면분사어사 安禧가 영풍산곡에 매복하였다가 동진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 원종 10년(1269) 서북면병마사영 記官인 韓愼 등이 분사어사 沈元濬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분대는 대부분 병마사의 휘하에 있었으나 분대어사의 임면, 진퇴 등이 병마사의 영향 아래 있거나 직무수행 과정에서 병마사의 통제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서경에 중앙의 사헌 1명을 분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중앙의 사헌을 파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서경과 양계지방에는 이렇게 상설의 감찰기관을 두었으나 남방 5도에는 그런 기관을 설치한 흔적이 없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어사대의 관원 등을 파견하였다.
문종 10년(1056) 9월에 왕이 “모든 州牧에 사절을 파견하여 자사, 통판, 현령, 尉 및 長吏들의 정치 성적, 부지런함과 태만함, 청백 여부와 백성의 빈부고락 등 실정을 샅샅이 조사하라”고 명령하였다. 담당 관아에서는 사절을 파견할 경우 연로의 백성과 아전들이 그들을 맞고 전송하기에 수고가 많게 된다는 구실로 이를 중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였다.
“선대 임금들은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의 괴로워하는 바를 조사하였기 때문에 모든 지방 관리들이 청렴한 정치에 노력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국가의 제도와 질서가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징계하거나 혁신할 대책이 없어서 관리들이 사리사욕에 몰두하여 권세 있는 토호들과 결탁하는 경향이 있다. 밭과 언덕에 뽕과 삼을 심으라고 권하는 일이 드물며, 혹 고기[魚], 소금, 좋은 재목이 나거나 축산이나 재물이 있으면 모두 빼앗기게 되고, 만일 주지 않으려 하면 다른 일로 트집을 잡아 매질하여 목숨을 잃게 되니, 억울하고 원통하여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이하 생략).”
그러고는 겸시어사 李攸績, 겸어사잡단 金若珍, 예부낭중 崔尙, 겸감찰어사 安民甫와 감찰어사 閔昌壽를 여러 지방의 무문사로 임명하여 각각 떠나 보냈다.
이처럼 대관들이 무문사, 안무사 또는 찰방사 등의 관직을 가지고 각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락을 살폈다. 물론 여기에는 대관 이외에 간관 등도 포함되고 있지만 대체로 지방의 감찰은 대관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에 관한 사례를 소개한다.
① 지방파견자들의 성적을 평정
명종 8년(1178) 정월에 각 도에 찰방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감찰어사 崔敦禮, 시어사 宋端, 공부낭중 崔詵, 형부원외랑 崔孝著와 합문지후 林惟謙 등 7인은 각 주·도에 찰방사로 파견되어, 각각 백성들의 고통을 위로해 주고 관리들에게 상벌을 주는 한편 지난 10년간 지방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자들까지 성적 우열을 평정하였다. 찰방사들이 탄핵한 사람이 800여 명에 달했는데, 贓吏(贓罪를 범한 관리)는 파직시키고 정사가 우수하다고 평가된 자는 벼슬을 올려주었다.
② 국경 밀무역을 엄금
공양왕 3년(1391)에 요동에서 말을 무역하는 길이 트이자 우마, 금은과 저마포를 가지고 몰래 요동과 심양 등지로 가서 매매하는 상인들이 많이 생겼다. 국가에서 중국과의 통상을 금하였으나 금령이 잘 시행되지 않았고 변방의 관리들도 엄중히 금하지 않아서 오가며 장사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왕이 그 해 5월에 군자소윤 安魯生을 서북면 찰방별감으로 임명하였다. 안노생이 가서 그 상고의 우두머리 10여 명을 참수하고 나머지는 곤장쳐서 水軍으로 배속시키는 한편 그들의 물품을 모두 몰수하였으며, 또 관리로서 이를 금지하지 못한 책임자에게는 곤장을 쳤다. 이에 규율이 강화되고 국경지대가 엄숙하게 되어 다시는 금령을 범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한편 고려가 서경과 양계에 상설기구로 두었던 分臺(分司·行臺)는 조선의 行臺와 그 내용이 달랐다. 고려의 분대는 신라의 외사정과 비슷하며 조선의 행대제는 고려 때 남방 5도에 수시로 감찰관을 파견하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다.
직접이동
1. 고려시대의 관제
2. 고려시대의 감사제도
3. 고려시대 대관의 활동
4. 대관 등의 지방 파견
5. 고려시대의 훌륭한 대관들
고려시대의 대관들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 중 몇 분의 행적을 소개한다.23)
① 재상의 청탁을 태연히 거절한 감찰어사 김방경
金方慶(1212~1300)은 고종 때 감찰어사가 되어 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어떤 재상이 권신에게 고하기를 “이번 어사는 먼젓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마침 그때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전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저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저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색이 변하였다 한다.
김방경이 견룡행수(儀仗兵의 지휘관)가 되었을 때 禁衛軍(왕궁을 지키는 군대)이 권세가에 다투어 아부하는 한편 숙위가 몹시 게을러지니, 그는 이에 분노하여 비록 병이 있더라도 휴가를 청하지 않고 숙위하였다. 숙위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군인들이 밖에 나가서 자는가 하면 한 번은 기생을 데리고 와서 자려는 사람이 있어 김방경이 말리니 무안해 하며 사과한 사례도 있었다.
김방경은 그 후 서북면 병마판관 등을 거쳐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는데, 법률을 준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기풍과 절개가 높고 위엄이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였으며 대낮에는 눕는 일이 없었고 건강을 유지하여 병환이라곤 없었다. 옛 친구들을 잊지 않고 죽으면 반드시 조상을 갔다고 하며 평생동안 임금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었다.
② 청렴·근신한 감찰대부 설공검
薛公儉(1224~1302)은 순창군 사람으로 고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낭중, 우부승선, 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감찰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청렴하고 근신하며 정직하였고 남을 대할 때 공손하였으며 항상 검소하게 지냈다. 또한 조정의 관리로서 6품 이상 되는 자가 親喪을 당하면 자기가 모르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고, 그의 집에 와서 찾는 사람이 있으면 품계와는 관계 없이 바삐 나가서 맞이하였다.
그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蔡洪哲이 가서 진찰하였는데, 그는 베이불을 둘러쓰고 왕골로 만든 자리를 깔고 있어서 쓸쓸한 생활이 마치 중의 거처와 비슷하였다. 채홍철이 나오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같은 자들과 설공을 비교한다면 이른바 벌레와 황학의 차이와 같다”고 하였다.
③ 고발사건 등을 정확하게 조사·처리한 감찰시승 김윤
金倫(1277~1348)은 일찍이 감찰시승에 임명되었을 때 간악한 자를 잡아내고 숨겨진 나쁜 일을 적발하였는데, 문서의 변조에 귀신같이 대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를 못하였다.
한 번은 두 사람이 자기 집에 소속한 노비에 대하여 다투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문제는 벌써 선대 적에 어사대에 송사한 바 있었는데, 당시 어사대 책임자로서 許氏 성을 가진 분이 안분해 준 것입니다. 그 후에 저분 집에서 얻은 것은 죽고 후손이 없었으며, 저희 집에서는 다행히 자손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화재로 문서가 없어지자 이를 기화로 몽땅 제것으로 만들었다고 무고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윤은 잠자코 따져보고는 “이른바 허씨는 문경공이 분명하다” 하면서 관속을 시켜 당시의 장부를 검열케 한 결과 나눠준 인원수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김윤은 정밀하게 일을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종친간에 인애가 깊고 친구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전례와 고사를 많이 알았으므로 사람들의 질문을 받은 경우에는 머뭇거리는 일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가 변정도감의 副使로 있을 때 어떤 재상의 가정에서 한 여자 종의 자손 100여 명을 둘러싸고 시골 백성과 다투고 있었다. 김윤이 종의 문서를 열람한 후에 “이것은 어느 왕 때 아무 재상이 모년 모월 모일에 아들들에게 준 문건이다. 이제 여자 종의 자손들의 나이를 대조하니 선후의 차이가 있고, 종 이름 한 자가 약간 치우친 것으로 보아 위조된 것 같다. 그 재상의 아들들은 모두 후대가 있으니 응당 문서를 한 벌씩 집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것을 참고치 않는가?” 하였다. 이로써 재상집 사람들의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감찰시승과 합포 진장 등을 거쳐 벼슬이 첨의정승에 이르렀다.
④ 대사헌 하윤원의 좌우명
河允源은 진주사람으로 찬성사의 아들이다.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경상, 서해, 양광, 교주 등 4개 도의 안렴사로 임명되었고, 원주와 상주의 목사로도 지냈다.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쳤고 업적이 많았는데, 신돈이 권세를 잡았을 때, 그에게 아부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윤원은 우왕 원년(1375) 10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공사의 구분이 엄격하였으며, 특히 “知非誤斷 皇天降罰(그른 줄을 알면서도 잘못 결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이라는 여덟 글자를 푯말에 써서 사헌부에 나갈 때마다 뒤에다 걸어놓고 사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