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 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14장 마지막 부분인 30~31절을 보겠습니다.
30 나는 너희와 말을 더 이상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일어나라. 여기에서 떠나자."
이어서 17장 1~3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3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3장 다음에 15장, 16장, 14장으로 이어지는 긴 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일어나라. 여기에서 떠나자.” 라고 하신 후에 어딘가 기도처로 가셔서 이렇게 긴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17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영생의 정의를 내립니다.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랍니다.
이 문장에서 ‘안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의 헬라어 동사 원어는 ‘기노스코’인데 전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기노스코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을 하고 한 몸을 이루듯이, 그렇게 전인격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도 하나가 되어야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요한의 신학적 주제는 영생입니다. 공관복음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요한복음서의 주제는 영생이라고 현대 신학자들이 진단하는 이유입니다. 요한복음서를 영적 복음서(spiritual gospel)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 본문은 동양종교에 뿌리를 두고 기독교를 읽는 동양의 많은 영성가들로부터도 깊은 공감을 얻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깊은 체험과 하나됨을 통해서 영생에 이른다는 신앙고백을 우주적 궁극자와의 합일을 통해 대각에 이르는 동양적 구원관과 화통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정 부분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독선과 배타성까지는 보지 못한 것은 그분들의 순진함 때문일까요, 아니면 너그러움 때문일까요?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께서 자신은 세상에서 할 일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에 있으니 그들을 돌보아달라는 기도가 계속됩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이 기도문을 읽고 듣는 서기 90년대의 교회공동체 사람들은 닥쳐오는 핍박을 능히 견뎌낼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